어느 시나리오 팔이 소녀의 죽음
등장인물

- 시나리오 팔이 소녀
인천의 성냥 공장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그러나 라이터 공장들이 대거 들어서 새로운 불을 지피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성냥 공장 아가씨들은 어디로 갔을까? 혹시 영화가 좋아 시나리오를 팔고다니는 건 아닐까?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앞둔 영화의 거리는 웃음으로 가득하구나. 반짝이는 장식등 사이로 즐거운 표정의 사람들이 분주히 오고간다. 뜻밖의 대박으로 팔자를 고친 제작자는 새끼 배우들을 데리고 이 술집 저 술집 다니느라 밤새는 줄 모르고, 근근이 버텨온 스탭들도 내년을 기약하며 총총히 자기집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그 한쪽에 소녀 하나가 얇은 보자기를 둘러쓰고 무언가를 팔고 있다. "시나리오 사세요. 시나리오 사세요." 소녀의 바구니에는 정성으로 쓴 시나리오들이 절반, 그리고 제 갈길을 몰라 눌러붙은 하얀 눈이 절반이었다. 소녀는 곱아가는 손을 호호 불며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시나리오 사세요, 시나리오 사세요."

작은 안경을 걸친 뜨내기 제작자가 감독 지망생 하나를 데리고 그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시나리오 하나만 사세요. 작은 사랑의 이야기도 있어요." "아이구, 난 또 거진 줄 알았네." 제작자는 소녀의 행색을 아래위로 쳐다보더니 장갑 낀 손으로 시나리오 상자를 뒤적거렸다. "아이구, 이 꼬라지 좀 봐라. 금박 장식을 해도 봐줄까 말까한데, 이 누더기는 뭐냐?" "원래는 그렇지 않았어요" 말하고 싶었다. 누군가 봐준다며 가져갔다가 냄비 받침으로 쓰고, 그걸 라면 먹던 사람이 보고선 몰래 베껴 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그 밑에 있는 건 깨끗할 거예요. 손님한테 처음 보여드리는 거예요." 감독 지망생은 뭔가 괜찮은 걸 건졌는지, 시나리오를 뒤적거려 보고 있다. 제작자가 야단을 친다. "야야, 보지마. 사지도 않을 건데. 괜히 나중에 딴 영화 만들었다 좀 비슷하면 표절했다고 시비걸거다. 요즘 그런 애들 많아요. 뭐, 세상은 지가 다 만들었나?"

그 자들은 떠나고, 소녀는 그들의 입에서 뿜어나온 한기 때문에 더욱 몸이 떨려왔다. 그러다 비틀거리며 차도쪽으로 발을 헛디뎠다. 끼이이익, 자동차가 미끄러지듯 서고, 소녀는 그 앞에 풀썩 쓰러졌다. "죽으려고 환장했어? 이게 누구 찬 줄 알아?" 험상궂은 운전수가 뛰쳐나왔다. "야야, 조용히 해. 신문 기자라도 보면 어쩌려고. 몇푼 줘서 보내." 그뒤로 나타난 사람은 제작자 '왕대박'이었다. 소녀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사과를 하며 흩어진 시나리오들을 주워담았다. 그때 눈부시게 하얀 손이 그녀의 시나리오를 주워드는 것을 보았다. 위를 올려다본 소녀는 순간, 천사를 보았다. 그러나 손의 주인공은 유명한 여배우 '잘나가'였다. "사장님 이거 하나 사주세요. 불쌍하잖아요." "영화로도 못 만들 거 사면 뭘해?" "아이, 하나 사주세요. 이번엔 제가 감독할게요." 그렇게 시나리오 한편이 제작자와 여배우 손으로 넘어갔다. 소녀는 시나리오 값을 받기 위해 그 집 앞에서 기다렸다. "조금만 참자. 이제 곧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거야." 그러나 몇 시간이 지나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똑똑똑, 소녀는 추위를 참지 못해 문을 두드렸다. "아, 그 시나리오? 서두가 좀 약해. 한번 고쳐봐." 프로듀서가 말했다. 소녀는 문 밖에서 언 손을 녹이며 고쳤다. "여배우의 이미지가 안 살잖아. 이건 '잘나가'양을 위한 영환데, 고쳐봐." 고쳐봐, 고쳐봐, 수십번을 고쳐도 빵 한 조각 먹을 수 없었다. 제작자와 여배우는 해외 영화제를 다니느라 시나리오 볼 시간 같은 건 없었으니.

밤은 깊어갔다. 소녀는 다시 거리로 나갔다. 바람은 더욱 거세지고, 빛은 점점 사그라들고, 소녀는 어두운 골목길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추위를 견디다 못해 자신의 시나리오를 켜기 시작했다. "미안해 시나리오야. 누군가 너에게 불을 붙여, 아름다운 영화로 만들어주어야 할 텐데. 이렇게 재가 되어 사라지는구나." 어둠 속에서 시나리오가 타올랐다. 그러자 소녀의 눈앞에 아름다운 우주가 펼쳐졌다. 진흙으로 만든 파란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었다. 따뜻한 사랑과 먹을 것이 가득한 지구였다. 그런데 혜성 하나가 날아와 지구를 치자, 지구는 점점 태양에서 멀어져갔다. 세상은 점점 어둡고 추워지기만 했다. 그때 해바라기 하나가 태양을 향해 목을 뺐다. 가늘고 가는 몸을 늘여 태양의 빛을 빨아들였다. 그리고 식어가는 지구의 반대편 우주에 눈부신 빛을 쏘았다. 또 하나의 태양이 떴다. 그 태양의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사람들은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글:이명석-웹프로젝트 사이트 '사탕발림' 운영중>
사탕발림 홈페이지-www.sugarspr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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