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는 과학이다
스토리가 넘쳐나고 있다. TV를 켜면 홈드라마처럼 길게 이어지는 이야기가 끝없이 흘러나오고 토크나 개그처럼 톡톡 끊어지며 재치로 웃음을 주는 조각난 이야기들도 쏟아진다. 주말, 가족과 함께 영화관을 찾으면 흥미진진한 할리우드 이야기를 맞볼 수 있고 아이들이 코를 박고 낄낄거리는 만화속에서도 신나는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조금만 관조적인 시선으로 일상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이야기 홍수속에 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대중문화의 핵심장르로 떠오른 TV드라마, 영화, 만화 등은 눈으로 보는 이야기이다. TV드라마의 폭발적인 인기와 유례없는 영화흥행으로 우리 대중문화계는 모처럼 영상문화의 중흥기로 들어선 느낌이다.

영화 <쉬리>가 2백만명을 동원했다고 떠들썩했고 <용가리>가 비싼 값에 해외로 팔려나갔다고 한동안 매스컴을 뒤흔들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퀸> <국희>등 드라마들은 TV 프로그램 전체 인기 순위 꼭대기에서 내려올 줄 모른다. 그러나 이같은 영상의 빅뱅현상을 한꺼풀만 벗겨보면 우리 대중문화 상품에는 좋은 스토리가 많지 않다는 사실을 곧 눈치채게 된다.

아류작은 제쳐놓고 흥행에 성공했다는 영화나 인기있는 드라마들이 식견있는 관객의 문화적 갈증을 해소시켜 주었는지는 의문이다. 몰아치듯 일어나는 인기돌풍현상을 바라보면서도 관객, 시청자들이 한결같이 아쉬워하는 것은 스토리가 약하다는 것이다.

이야기 구조를 갖춘 모든 영상물은 이론상 볼거리(스펙터클)와 읽을거리(내러티브)를 지니고 있다. 문학이론을 빌리면 스펙터클은 형용사적 글쓰기, 즉 묘사와 관련이 있고 내러티브는 동사적 글쓰기, 즉 서사와 관련이 있다.

장쾌한 폭발신이나 현란한 그래픽 등 스펙터클은 할리우드 수준에 점차 육박하고 있지만 영화의 짜임새 있는 줄거리는 크게 미흡하다는 안타까운 지적들이다.

TV드라마도 비슷한 현실이다. 파삭한 사랑묘사, 인기스타의 개성 등으로 젊은 시청자를 사로잡고 있지만 가벼운 에피소드로 가득차 있다. TV드라마는 눈으로 씹는 추잉껌이라는 말이 있다. 대중 문화에서까지 인생의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단물이 나도록 씹는 맛은 주어야 할 것이다. 특히 영상문화의 꽃으로 부각된 영화는 스토리 구성의 테크닉이 더욱 절실한 장르이다.

영화, 드라마의 괄목할 만한 성장에도 불구, 우리 영상물의 가장 큰 문화적 약점은 바로 스토리의 허약성에 있다. 스토리의 최고 형식은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끌어안을 수 있는 구조적 완결성에 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재미가 빠져버린 의미는 둔탁하고,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 재미는 공허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좋은 스토리가 풍성해지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문화 연구자들은 영상문화에 대한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스토리는 재능있는 작가가 영감에 의해 창조해내는 신비스런 결과물이 아니라는 인식, 이처럼 뒤집어 본 생각속에 길이 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논법이라면 문화탐구의 한 분야로서 스토리 연구는 과학이 되어야 한다. 이미 서구에서는 러시아의 민담연구로 학문적 성과를 올린 프롭으로부터 토도로프, 롤랑 바르트, 그레마스로 이어지는 문예, 기호학자들이 내놓은 내러티브에 대한 연구 집적물들이 산처럼 쌓여있다. 할리우드만 하더라도 스토리 연구가 보다 촘촘해지고 체계화되고 있다. 영화가 시작된후 관객이 눈물을 흘릴 시점까지 계산하고 있다.

아직도 담배꽁초를 수없이 비벼 끄면서 고뇌하는 작가생산에 목을 멘다면 참으로 어리숙한 생각이다.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감흥의 원리, 기대감을 충족시킬 수 있는 스토리라인의 배열체계 등이 과학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국내에서도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려는 학자들이 점차 늘고 있다. 그러나 스토리연구는 일부 학자들의 자족적 연구대상으로 머물러서는 안될 것이다. 문화의 계절을 맞아 문화종사자뿐 아니라 관객까지도 이야기꾼이 돼 좋은 이야기를 즐기는 때가 오기를 기대해 본다.

<글 : 경향신문 박성수 생활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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