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한편에 죽고 산다
충무로 시스템, 제작자와 감독의 애증관계

90년대 최고의 흥행감독이 강우석이라면 80년대엔 배창호였다.

1984년 한해에만 <고래사냥>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깊고 푸른 밤> 3편을 촬영해 도합 100만명 넘는 관객을 동원했으니 '한국의 스필버그'라는 별명이 어색하지 않다. 그가 쌈짓돈을 털어 무보수로 일해줄 스텝과 함께 강원도 횡계에서 영화를 찍었다. 1920년대가 배경인 시대극 <정>은 대기업과 젊은 프로듀서들이 주류를 형성한 상업영화시장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배창호 감독은 누군가 돈을 대기로 약속하기 전에 일단 찍는 방법을 택했다. 올해 영진공의 판권담보융자로 3억원을 마련하긴 했지만 앞으로 들어갈 제작비는 아직도 구하고 있는 형편.

70년대 고 하길종 감독과 함께 영상시대를 이끌었던 홍파 감독은 최근 <영화속으로 떠나는 문화여행>이라는 에세이집을 내며 급변한 영화계에 적응하기 힘든 중견감독의 고뇌를 토로했다. <명성황후>라는 시나리오를 들고 대기업 영화담당자들을 만난 그는 영화를 문화로 이해하던 시대가 지나고 상품으로서의 영화만이 남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들(대기업)은 오직 수치 속에서만 살아왔고, 후진적 경제관념으로만 훈련된 세대였다. 그들의 기업관은 오직 수지타산에만 맞추져 있었을 뿐 문화적 기업관이 자리잡기에는 지나치게 가난한 시대를 살아왔던 것이다."

한번 실패는 영원한 실패?

90년대 영화계의 또다른 단면은 무수하게 쏟아져나온 신인감독들에게서 발견된다. 대기업 투자와 젊은 프로듀서의 기획력이 결합해 첫 성공을 거둔 92년 <결혼 이야기>를 기점으로 줄잡아 70명 이상의 새로운 연출자가 나왔다. 이중 두번째 영화를 만든 감독은 절반이 조금 넘는 정도. 나머지는 두번째 영화를 내놓는 데 실패했고 2년에 한 작품만 꾸준히 만들어도 대단히 인정받은 셈이다. 물론 다른 일을 맡아 다음 작품을 못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첫 영화의 실패가 두번째 영화를 만들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92년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로 데뷔한 홍기선 감독은 그동안 여러편의 영화를 준비했지만 '물주'를 구할 수 없었다. <술꾼> <외딴방>등 사회에 대한 관심이 많이 반영된 사실주의 영화를 고집한 그에게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돈과 자신의 신념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의 김응수 감독도 비슷한 경우다. 운동권 세대의 후일담으로 보이는 그의 데뷔작은 평단의 지지를 얻었지만 상업영화로는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데뷔작으로 로맨틱 코미디를 택해 흥행에 실패한 경우는 더 힘들다. <결혼 이야기2>의 김강노, <커피 카피 코피>의 김유민, <베이비 세일>의 김본, <사랑하기 좋은 날>의 권칠인,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의 김동빈, <꼬리치는 남자>의 허동우, <누가 나를 미치게 하는가>의 구임서 등 많은 감독들이 프로듀서가 기획해 시나리오 작가를 거쳐 완성된 대본으로 데뷔작을 찍었다. 이들은 흥행에 실패해 시장에서 배척당함과 동시에 자기가 원하는 영화를 만들 기회까지 봉쇄당하는 이중의 아픔을 겪는다. 물론 <결혼 이야기> <그 여자 그 남자> <닥터봉>등이 흥행에 성공했지만 실패한 감독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가릴 수는 없다. 90년대 들어 성립한 신인감독 양산체제 덕에 감독데뷔가 훨씬 쉬어진 것도 사실이다.

좋은 시나리오만 있으면 학력이나 경력에 구애받지 않고 데뷔할 수 있다. <러브 러브>의 이서군은 뉴욕대 영화과 재학중인 20대 여성감독이었고 <악어>의 김기덕 감독은 초등학교를 다닌 게 학력의 전부고 연출부 경력도 없지만 시나리오 쓰는 능력때문에 감독이 됐다.

확실히 이런 현상은 영화계의 80년대와 90년대를 갈라놓는다. 부정적인 시각에서 보면 "충무로가 신인감독을 소모품으로 쓰고 있다"는 비판이 나올 만하다. 마치 복권 수십장을 사서 긁어보고 '꽝'이 나오면 다시 돌아보지 않는 것처럼 한번 낙인찍힌 신인감독이 재기하기란 정말 쉽지 않다.

지금 영화계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중견감독들의 입장에선 할 말이 더 많다. 이들은 <안개> <만추> <만다라>등 문예영화의 걸작이 나왔던 과거에 비해 과연 영화의 질이 나아졌는가라고 반문한다. <북경반점>을 연출하기로 했다가 그만둔 배창호 감독은 "감독을 믿지 않고 간섭하는 풍토에 환멸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나마 90년대 가장 주목할 신인으로 꼽히는 홍상수 감독에게 연출기회를 준 것이 동아수출공사와 미라신코리아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지금 영화계의 주류인 대기업, 창투사와 젊은 제작자들은 결코 손대지 않을 영화라는 것이다. 김홍준 감독은 충무로가 90년대 비로소 자본주의로 이행한 게 아니냐고 말한다.

"젊은 기획자들과 대기업 자본의 힘은 한국영화가 하나의 상품으로 자유경쟁하도록 만들었다. 이는 상품의 평균적 질을 높여 시장점유율을 늘린 반면 최소한의 상업적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면 시장에 진입하지 못하게 만드는 문제점을 낳았다"

게다가 제작편수가 1년에 60여편을 넘지 않는 현 상황은 한 감독에게 여러번의 기회를 허용하기 힘들다. 수십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작가의 길로 들어선 임권택 감독 같은 예를 다시 만날 수 없는 데 당연하다.

적자생존, 충무로의 법칙

영화계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프로듀서들 입장에서는 '억울하다'는 반응이 나온다. 90년대 들어 80년대보다 훨씬 다양한 영화가 나왔고 질적으로 나은 영화를 만들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영화세상 대표 안동규씨는 "경쟁력 없는 사람이 도태되는 게 당연한 게임의 법칙"이라고 말한다. 중견감독 중에도 장선우, 박광수, 정지영 감독 등 경쟁력있는 사람은 다 작품활동을 하고 있고 배창호 감독이 독립영화방식을 택하는 것도 그만큼 경쟁력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

우노필름 대표 차승재씨는 데뷔작은 일종의 '자격증 시험'이라고 말한다. "함량미달이 아니라면 살아남지만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면 버림받는 게 프리랜서들의 생존법"이라는 것.

그런면에서 프로듀서 역시 감독과 마찬가지의 생존경쟁을 하고 있다. 흥행실패의 타격이 큰 쪽은 오히려 프로듀서라고 보는 게 맞다. 프리시네마 대표 김인수씨는 현재 충무로 시스템은 일본식 도제방식과 헐리우드 대공장체제의 중간에 놓여 있다고 진단한다.

"책상에 수백편의 시나리오가 쌓여 있어 수십명의 전속작가와 감독이 작업한다면 기능공인 감독에게 연출만 맡기는 시스템이 되겠지만 지금은 감독이 시나리오까지 책임져야 살아남는다."

김기독 감독이 <악어> <야생동물 보호구역>등 연달아 두 편 흥행에 실패하고도 3번째 영화를 찍는 것은 준비된 시나리오가 많기 때문이며, 70~80년대 완성된 시나리오로 연출만 했던 중견감독들이 도태되는 것은 시나리오 쓰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시장의 힘이 영화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비판과 오히려 발전시켰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는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기는 어렵다. 다만 지금의 주류영화 외부에서 대안적 영화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다.

올해 영화진흥공사의 판권담보융자 대상자가 발표되자 홍기선, 권칠인, 임종재, 오병철. 김동빈 감독등은 '영화작가회의'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들은 영화진흥공사의 3억원 지원이 상업영화 논리에 치우치지 않게 견제하며 작가의 목소리가 들어간 영화를 만들자는 취지로 모였다. 이 모임에서 신통한 결과가 나온 건 아니지만, 홍기선 감독은 "국가 지원만이 중견감독은 없고 신인감독이 한번의 실패로 영영 버림받는 상황을 극복하는 대안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국가의 정책적 지원이 저예산 독립영화를 활성화시키면 주류영화의 질서에 끼여들지 못하는 다양한 영화가 나오는 계기도 마련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이것도 낙관할 수만은 없다.

선택권은 감독에게

영화평혼가 토니 레인즈는 <씨네21>134호에 쓴 기고문에서 "정부가 고품질 영화만들기 '육성'에 나섰던 다른 나라들의 경우, 금전적인 면에서나 창의적인 면에서나 그 결과는 대부분 비참했다"고 말했다. 한번도 정부의 적극적인 영화육성책을 경험하지 못한 한국영화계의 입장에선 사치스런 얘기로 들리지만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얘기도 아니다.

그의 말이 국가적 지원을 그만두라는 뜻은 아닐 게다. 최소한의 국가적 지원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지만 오히려 더 큰 문제는 감독 가자가 어떤 생존전략을 택하느냐에 있다. 게릴라 같은 방식도 마다하지 않는 배창호 감독을 보며 그저 충무로의 세태를 욕할 것인지, 그 치열함을 귀감으로 삼을 것인지는 감독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

<글 : 씨네21-남동철 기자>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