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짤리고 잘 있어?"...어느 구성작가실의 일지 - 김정희
<함께 알아봅시다>,<생방송 전국은 지금>,<아시아 태평양 시대를 준비한다>등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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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10시.작가실의 아침은 조용하다. 부지런한 사람 한 두명이 일찍 나와서 열심히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다. 간간이 작가를 찾는 PD의 전화가 걸려온다.

30분쯤 되면,대개 서너명이 차례로 작가실에 도착한다. 컴퓨터와 자료, 그리고 가방을 든 작가들의 모습은 진지하다 못해 경건하다. 몇사람은 오자마자 PD에게 올라가고 몇사람은 컴퓨터를 켠다. 이때부터 작가실의 전화기도 바빠지기 시작한다. 가끔 섭외를 하는 작가들을 보게된다. 원래 작가가 섭외까지 해야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을 하다보면, 이것이 PD일이냐, 작가일이냐를 일일이 따지는 것이 어려을 때가 있다. 어떤 작가는 자막을 뽑기도 하고, 어떤 작가는 컴퓨터 그래픽을 그려서 맡기기도 한다. 제작여건은 저마다 다르니까 왜 작가가 그런 일까지 하느냐고 따지는 것은 속없는 짓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은 작가는 이렇게 PD일을 대신 해주기도 하는데 PD가 작가일을 대신 해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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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소식이다. 모 프로에서 일하던 작가 다섯명이 갑자기 그만두게 되었다는 것이다. 같이 일하던 PD들이 다른 부서로 간지 약 2주만에 담당 차장이 이렇게 말하더란다. "능력이부족한 것은 아니나, 분위기 쇄신을 위해 팀의 작가를 바꿔야겠어" 어이가 없는 일이었으나 다섯명의 작가는 그날부터 출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배들은 그 작가들이 누구인지 알아야 했다. 그러나 이름을 들어도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은 당연했다. 요즘은 방송국에 구성작가가 너무 많아져서 이름만 듣고는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이 방송국만 해도 1백50명이나 되는 작가가 있고 3개방송사와 프로덕션, 각 유선 방송사 등에서 활약하고 있는 구성작가는 5백여명이 넘을 것이라 한다.

여하튼. 이번 사건은 동료나 선후배 작가들을 상당히 우울하게 만들었다. 하루 아침에 작가가 바뀌고 '잘려서' 작가들을 놀라게 하는 일은 늘 있어왔다. 그리고 사실 그런 일은 능력에 따라 일을 하게 되고, 또는 그만둘 수도 있는 프리랜서로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과가 어떻다 하더라도, 그 상황을 주변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갈수록 작가를 바꾸는 절차나 형식이 특히 작가들 입장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바로 방송제작 현장에서 구성작가의 입지가 그만큼 어려워지고 있다는 암시다.


3

최근 다른 방송국에서 일하던 작가 L씨가 오랜만에 작가실을 찾았다. 갑자기 하던 프로를 그만 두었다고 한다. 그 이유가 기가 막혔다. 원래 그 프로그램에서 주기로 한 원고료가 편당 1백만원 월 2백만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작가의 등급을 매긴다고 하면서 L씨에게 "지금 정해진 원고료는 1등급 작가에게 지불되는 원고료인데 당신은 1등급은 못되니 2등급 원고료를 받으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L씨는 고민 끝에 그 방송사에 이런 결정을 통보했다.

"작가 경력 10년인데 내가 1등급 작가가 못되는 이유가 뭐죠? 2등급 작가 대접을 받아가며 이 프로를 계속하고 싶지 않아요. 대신, 지금까지 쓴 원고는 1등급 원고료를 주세요"

우리는 L씨가 1등급 작가가 된 것을 축하해 주었다. 하지만 L씨는 일자리를 잃어버렸다. 일을 다시 시작하려면 별 수 없이 다음 개편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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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H씨를 볼때마다 동료들은 "아직도 그 프로에서 '안 짤리고' 잘 있어?"라고 묻는다. 인기 프로그램에 소개를 받은 H씨는 이상한 조건으로 일을 시작했다. 원래 그 프로그램에서 필요로 하는 작가의 수는 4명 .그런데 가보니 한 명이 더 있더라는 것이다. 팀장의 말이 "일하는 것을 두어달 보고 작가를 정리하겠다"는 것이다. 그 두어달 동안 새로 그 프로에 소개를 받아간 3명의 작가들은 언제 이 프로를 그만두어야 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다. 다행히 우리가 알고 있는 작가 H씨는 두어달이 지나고 난 뒤에도 계속 그 프로그램을 할수 있게 되었으나, 방송사의 편리만 우선하는 처사에 동료들은 모두 비애감을 느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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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FM 원고를 쓰는 Y선배가 왔다. 기분이 아주 나쁜 얼굴이었다. 사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라디오 원고료가 오른다고 Y선배는 무척 즐거운 얼굴이었다. 그동안 라디오 원고료가 박해서 쓰는 원고량에 비해 원고료가 적었는데 이번에 오르는 바람에 어느정도 현실화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개편때, Y선배의 원고료가 30만원이 깍였다고 한다. 무슨 영문이냐고 했더니, 원고료는 올랐으나 원고매수가 줄었다고 한다. 그것도 무려 3분의 1이나! 사실개편이전에도 날마다 규정원고 매수보다 더 써야지만, 방송분량이 맞아 떨어졌다. 그런데 방송시간은 줄지 않았는데, 원고매수만줄어든 것이다. "원고료를 올리면 뭐하나. 작가에게 돌아오는 원고료는 이런 저런 방법으로 매일 제자리 걸음인데..." 모두 이렇게 이구동성으로 흥분한다.

하긴 얼마전 다른 방송국의 교양국에서는 작가의 월수입 최고한도액을 정했다고 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한 작가의 한달 수입이 얼마 이상 초과할 수 없다는 '이상한' 방침이 생겼다는 것이다. 방송사의 횡포에 모두 아연실색했다. 이런 횡포가 없더라도 교양작가가 한달에 7백만원을 벌기는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최소한 경력이 7년이 넘어야 하고, 그것도 다큐멘터리 작가는 7,8년은 지나야 연수입 2천만원을 넘길수 있는 실정이다. 흔히 사회에서는 방송작가를 수입도 좋고 성취감도 높은 유망직종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특히 구성작가, 그것도 교양프로 구성작가의 경우, 얼토당토 않은 얘기다. 그런데, 구성작가의 주활동무대인 방송사에 프리랜서인 작가의 월최저수익은 보장해 주지 않으면서, 최고 얼마 이상은 수입이 생기면 안된다는 방침이 생기다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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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일을 쉬었던 O가 모습을 나타냈다. 상냥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의 O는 방송경력으로 치면, 햇수로 약 6년째인데도, 이렇다 하게 내세을 프로그램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O를 볼때마다 선후배들이 모두 안타까운 마음이다. 더구나 O는 개인사정 상 일을 꼭 해야하는 상황이다. 간간히 선후배들이 단발성 프로를 소개해주고는 있지만, 웬일인지 O와 한 번 일을 한 PD와는 다시 일을 하지 못했다. 오늘도 C가 특집프로에 O를 추천했다가 퇴짜를 맞았다. O가 작가로서 PD에게 확신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O와 친하게 지내는 C에게 물어 보았더니 몇가지 문제를 지적해준다.

첫째가 감각의 문제였다. O는 부지런히 자료를 모으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전문 자료조사원이 생기면서 그런 장점은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게다가 작가로서 프로그램 구성의 기본인 감각, 즉 아이템을 보는 눈, 해석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O의 구성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해석을 모아놓는데서 그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곧 작가의 색깔, 즉 개성이 없다는 얘기도 된다.

두 번째는 O의 전문분야가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실 작가 경력 6년째면, 스튜디오 프로든 ENG프로든 어느 한 쪽을 선택해서 자기 분야를 이미 정했어야 한다. 그런 데 O는 이것 저것 많이는 했으나, 딱히 다큐멘타리 작가도 아니요, 종합 구성작가도 아닌 어정정한 위치가 되어버린 것이다.

세 번째는 문장력이 뛰어나지도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현재 왕성하게 일을 하고 있는 작가는 구성력, 문장력, 감각 등 몇 개의 요소 중 한 두가지만 확실하면 작가로서 어느정도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 문장력이 그리 뛰어나지는 않지만, 구성을 잘하는 작가, 그 반대로 구성력은 약간 떨어지지만 문장력이 좋아, 나레이션에 설득력과 힘이 있는 작가, 물론 양쪽이 가능한 작가라면 작가로서 확실한 자기 위치를 차지할 수 있겠지만.

네 번째로 TV구성작가로서 영상구성력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TV작가라면 무엇보다. 화면을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 하는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좋은 프로그램을 본다든가, 영화나 사진 등 다른 영상예술 분야에도 관심을 기울이며 안목을 키워야 하는데, O는 여하튼 그런 면에 특별한 아이디어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C의 이런 생각에 대부분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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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새우는 작가 3,4명이 작가실을 지키는 시간. 어떤 사람은 내일 아침 생방송이 있고, 어떤 사람은 나레이션 더빙이 있고 아침 일찍 있을 구성회의를 위해 밤을 새는 사람들이다. 작가실에는 거의 매일 밤을 새는 사람들이 있다 K씨도 내일이 방송이다. 취재도 부족하고 화면도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편집된 화면도 영 시원하지 않단다. '입사이래 최대 위기' 라고 중얼거리면서 원고를 쓰고 있다. 상황은 늘 만족스럽지 못하다. 하지만 방송프로그램은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보도록 만들어야 한다. 방송은 잘 나가야 한다. 그것은 프리랜서,방송 프로 하나하나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작가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작가실이 불야성을 이루는 데에는 이런 이유도 없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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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원고를 치는 손가락의 움직임만 부산하고 나즈막히 컴퓨터 키보드의 소음만 들린다. 밤을 새운 사람들의 옷은 구겨지고, 얼굴은 창백하다. 어떤 원고는 생방송 스튜디오에서 진행자에 의해 읽혀질 것이고 어떤 원고는 성우의 목소리를 통해 영상에 깔리게 될 것이다. 작가는 바로 그 순간, 즉 세상을 향해 말을 거는 그 순간을 위해서 존재한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까지 그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비록 아직은 질타와 침묵의 메아리가 되돌아 올지라도 언젠가 세상으로부터 격려와 동의와 애정과 그리고 작은 변화의 몸짓이 전해져 올 그때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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