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에 이제 시나리오 '작가'는 없다?
영화현장에서 시나리오 작가는 어디쯤에 위치하는가


충무로의 관행상 시나리오 작가들은 계약금을 받는 순간 작품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넘겨주게 된다. 시나리오작가협회의 한 관계자는 "시나리오 작가가 현장에 접근하는 것조차 달가워하지 않는 것이 한국영화계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경력 6년차인 한 시나리오 작가는 요즘 같아선 차라리 감독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자신이 쓴 작품이 온전히 영화화되는 길은 스스로 연출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늘 이런저런 이유로 개작되어 왔고, 그나마 영화화될 기회조차 많지 않았다. 그는 "시나리오 작가로서 충무로에서 산다는 것이 작품을 늘 남에게 '난도질당하는’ 것이거나 대기자 순번을 받고 끊임없이 기다리는 것이라면 차라리 감독으로서 전권을 갖고 싶다"고 말한다.

그의 바람은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 서른 초반의 나이에 수입원이라고는 푼돈에 불과한 원고료와 사립대학의 시나리오 창작 시간강사 자리가 고작인 그는 당연히 자신의 각본을 영화화할 재력이 없다. 더구나 6년 동안 장편영화 두세 편의 시나리오를 쓴 게 전부인 그의 '일천한' 경력으로 메이저 제작사와 손잡는 것도 요원한 일이다. 그래서 그는 '한 방'을 꿈꾼다. 충무로 제작자와 감독이 자신의 시나리오를 읽고는 눈이 휘둥그레지는 짜릿한 순간, 또는 과감하게 "이 시나리오는 제가 연출합니다"라고 선언하는 순간을 말이다.

■ 이거 내가 쓴 것 맞아?

충무로에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시나리오 작가는 그야말로 '부지기수'다. 시나리오 작가들은 프로듀서 중심의 기획영화 시대가 도래하면서 대사나 몇 줄 고쳐주는 잡일꾼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완성된 영화에서 '제목' 이외에 자신의 흔적을 찾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고, 엔딩 크레디트 각본자 명단에는 감독이나 제작자 이름이 별 이유 없이 올려져 있는 경우도 많다. 충무로라는 피라미드 속에서 시나리오 작가는 단 한 번도 높은 지위에 올라선 적도 없지만 최근 상황은 더욱 악화됐고, 지금은 한국에 시나리오 작가가 진정 필요한 것인지 자문해야 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일반적으로 상업영화는 관객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므로 영화의 내용을 이루는 '이야기'의 품질에 흥행이 좌지우지된다. 문제는 최근 힘있는(?) 프로듀서와 감독이 득세하면서 이야기를 창작하는 일에 시나리오 작가가 전혀 힘을 못 쓴다는 것이다. 프로듀서가 기획을, 감독이 영상을, 작가가 이야기를 맡는다는 고전적인 분업은 사라지고 시나리오 작가의 영역을 프로듀서와 감독이 양분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토리보다 소재가 중시되는 기획영화가 한국영화의 대종을 이루게 되면서 충무로는 급격히 작가의 퇴조를 가져왔다.

부작용이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개봉한 한국영화는 능력 있는 시나리오 작가의 부재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완성도가 떨어지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시나리오의 취약함이 최우선 과제로 떠오른 것이다. 한국영화의 가장 큰 문제점이 '이야기가 없다'는 지적이 등장한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할리우드에서조차 작가들이 오랫동안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충무로는 그 정도를 넘어서 아예 작가의 씨가 마를 지경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현재 시나리오작가협회에 소속된 현업 작가는 100여 명, 협회에 소속이 안 된 채 활동하고 있는 이들까지 합하면 모두 300여 명의 작가들이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중 지난해 단 한 작품이라도 각본 작업에 참여한 작가는 20여 명에 불과하고, 나머지 280여 명 가까운 작가들은 그야말로 '개점 휴업' 상태다. 시나리오작가협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영상작가교육원이 한 해 동안 배출하고 있는 졸업생 100여 명 중 작가로서 충무로에 안착할 수 있는 이는 3명 남짓, 대부분 고학력 출신인 이들 작가지망생들은 졸업과 함께 곧바로 '휴업' 상태에 들어간다.

■ '구두' 계약의 함정

각본 작업에 들어간다 해도 피곤하기는 마찬가지. 계약서 없이 일을 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계약금을 받는 것조차 불투명하다. 현재 한국에서 데뷔 시나리오 작가에게 주어지는 원고료는 대략 1천만 원에서 1천5백만 원선. 이름 있는 작가의 경우 3천만 원까지도 지급된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책정된 금액에 대해선 불만이 없다. 대신 책정만 된 채 정작 제대로 지급되지 못하는 상황이 문제인 것이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작가는 초보 작가 시절 당했던 수모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는 지금도 충무로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제작자와 '구두' 계약을 맺고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다. 제작자는 "일단 초고를 넘기면 그때 계약하자"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가 가져온 시나리오를 본 제작자는 "안 되겠다"며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했다. 그러나 그도 물러나지 않았다. 계약금의 일부라도 받아내고자 제작자를 찾아갔던 것. 결국 제작자는 작가에게 신용카드를 집어던지며 "먹고 떨어져라"고 말하며 사무실 밖으로 나가버렸고, 결국 그는 자존심 때문에 신용카드를 집어들지 못했다. 결국 그는 제작자로부터 한 푼의 원고료도 받지 못했다. 물론 <선물>의 시나리오 작가 박정우씨처럼 정당한 원고료와 러닝 개런티까지 지급받는 경우도 있지만, 이런 일은 정말 가뭄에 콩 나듯 드물다.

충무로에서는 비일비재한 이런 상황을 염려한 일부 작가들은 안정된 계약조건을 바라고 제작사에 직원으로 입사하는 경우도 있다. <번지점프를 하다>의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제작사 눈엔터테인먼트에 입사했던 고은님씨가 대표적인 사례. 고은님 작가는 "안정적인 창작작업을 위해 월급제를 받아들이는 경우도 많다"며 "신인작가로서 능력을 검증받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에 오히려 유리한 조건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문제는 있다. 시나리오 작업 이외에도 제작사 잡무까지 맡겨지는 경우가 다반사인 것이다. 현재 제작사에 정기적으로 출근하고 있는 한 시나리오 작가는 "신인이기 때문에 오히려 안정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지만 "제작사에서 일반 사무까지 시켜 오히려 창작 효율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한 방'을 꿈꾸는 작가들

이 모든 것을 일순간에 극복할 수 있는 것이 '공모전'이다. 시나리오 작가들이 종종 '한 방'이라고 표현하는 공모전 당선은 가장 이상적인 데뷔 조건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영화진흥위원회 공모전 등 한 해 동안 국내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공모전은 대략 10여 개. 공신력 있는 공모전의 경우 수백 편의 시나리오가 한꺼번에 몰리기도 한다. 제작자들도 시나리오 개발에 투자를 꺼리는 대신 될 만한 시나리오를 손쉽게 건지기 위해 공모전에 관심을 보인다. 그러나 공모전 당선과 작품의 영화화와는 별개의 문제일뿐더러 일반 제작사들이 개최하는 공모전은 시나리오 작가들로부터 그다지 신뢰감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장 공신력 있다는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공모전 당선작조차도 영화화된 작품은 극소수고, 일반 제작사 공모전에서는 당선작을 선정하는 대신 응모한 시나리오의 아이디어를 차용하는 경우도 왕왕 발생한다. 영상원 시나리오과 출신으로 <인터뷰>의 시나리오 각색을 담당했던 권용국씨는 "영화진흥위원회 공모전에서 당선돼 주위 작가들이 몇 년 동안 영화화를 기다리다 시간만 낭비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또 시나리오 작가들이 일반 공모전을 신뢰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라며 "실제로 제작사들이 진행하는 공모전이라는 것도 기획실에서 최근 관객 트렌드 조사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여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신인작가들의 경우 데뷔를 위해 자신의 작품을 맡기다시피 하지만 경력이 조금이라도 쌓인 기성작가들은 또다른 비애를 느낀다. 일단 제작에 들어가면 감독과 제작자가 자신의 작품을 제멋대로 요리하는 상황에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기 때문. 한 작가는 이것을 두고 "배 아파가며 아이를 낳았지만 돈 몇 푼에 그 아이를 팔아넘겨야만 하는 상황"에 비유하기도 했다. 충무로 관행상 시나리오 작가들은 계약금을 받는 순간 작품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넘겨주게 된다. 시나리오작가협회의 한 관계자는 "시나리오 작가가 현장에 접근하는 것조차 달가워하지 않는 것이 한국영화계의 현실"이라며 "불공정한 계약관행보다 작가들의 원성을 더 많이 사고 있는 부분이 저작권 문제"라고 말했다. 충무로 시나리오 작가들이 방송작가로 옮겨가는 가장 큰 이유도 경제적인 이유보다 방송에서는 작가로서 자신의 작품에 애정을 쏟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뷰>의 권용국 작가는 "방송작가는 PD보다도 작품에 대한 장악력이 높다"며 "시나리오 작가들이 경력 작가가 없고 늘 신인작가가 대부분인 것도 같은 이유"라고 덧붙였다.

■ 제작자와 감독의 현실론

이같은 상황에서 시나리오 작가들은 스스로를 부속품으로 치부해 버리기도 한다. 김선미 작가는 "어느 정도 시나리오 작업을 하다보면 이렇게 하면 된다는 요구조건을 알 수 있게 된다"며 "내 역량을 발휘한다기보다는 감독이나 제작자가 필요로 하는 작품을 쓰게 된다"고 덧붙였다. 시나리오작가협회의 한 관계자는 "시나리오 작가들의 창작의욕이 꺾이면서 한국영화의 전반적인 하향 평준화가 이루어진 것은 이같은 작가들의 자괴감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다른 충무로 시나리오 작가는 "시나리오는 투자자로부터 돈을 끌어오면 그것으로 효용가치는 끝난 것"이라며 "감독과 제작자는 그 이후에는 더 이상 시나리오에 신경쓰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충무로에서 시나리오는 투자자로부터 제작비를 끌어오기 위해 내미는 '약속어음'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이같은 상황에 대한 제작자의 반론도 만만치 않다. 제작자들은 "시나리오 작가를 믿고 수십억원의 제작비를 투자하는 시대는 지났다"는 의견에 대체로 동의한다. 작가 혼자만의 상상력으로 쓰여진 이야기는 검증할 방법도 확실치 않고 그것이 함량미달일 경우에는 계약금을 완불하기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충무로 제작사 관계자들이 "시나리오의 중요성은 제작자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지만 신뢰할 만한 작가를 찾아낸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며 "참신한 시나리오 작가를 발굴하는 것이 힘들 바에야 기획영화에 집중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감독들도 이제 좋은 시나리오 작가보다는 능력있는 프로듀서를 만나고 싶어한다. 과거 송능한-임권택, 최인호-배창호, 심산-김성수 등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의 파트너 관계는 이제 옛말이고, 감독은 좋은 프로듀서를 만나야만 흥행작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여관작업'이라는 것은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 사이의 지난한 작업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감독들 스스로도 더 이상 시나리오 작가와 밀접한 관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최근 개봉한 한국영화의 원안자가 거의 감독 본인이었던 점은 이런 면에서 시사적이다. 최근 자작 시나리오로 데뷔한 충무로의 한 감독은 "시나리오 작가의 고유 영역은 감독의 영역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며 "제작자들 또한 감독이 시나리오 작업까지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를 원하는 경우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 발전을 위한 노력들

한국영화계에서 완성도 높은 시나리오의 부재를 걱정하는 목소리는 여전하다. 여전히 <번지점프를 하다> 같은 '튀는' 시나리오를 모두들 기다리고 있고, 좋은 시나리오는 대중의 관심을 한눈에 모은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시스템이 고쳐지지 않는 한 충무로에서 좋은 시나리오를 찾는다는 것은 요원한 일일 수밖에 없다. 물론 모순적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나리오작가협회에서 준비중인 것으로 알려진 소위 '표준계약제' 즉 저작권 집중관리제도가 대표적인 예다. 시나리오 작가로서 합리적인 처우를 확보해야만 양질의 시나리오를 만들 수 있다는 것. 우선 작가로서의 정체성과 최소한의 생계비라도 확보해야 작품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협회 차원에서의 움직임과는 별개로 제작사를 중심으로 시나리오창작팀을 결성하는 것 또한 자체적인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창작팀을 구성한 다다필름이 대표적인 예. 그러나 이러한 대안에도 문제점은 있다. 김선미 작가는 "예전에도 이미 몇몇 제작사에서는 창작팀을 결성했지만 그 곳에서 나오는 아이템은 모두 자사에 귀속된다는 첨부조항이 따라다닌다"며 "노예계약서나 다름없지만 실제로 이러한 조항때문에 타회사와의 계약이 파기된 경우도 없지 않다"고 말했다.

한국영화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 시나리오 작가의 이야기 창작력은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감독과 프로듀서, 시나리오 작가 등의 안정적인 삼각관계가 절실한 것도 그 때문이다. 여전히 재능있는 젊은이들은 스타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며 충무로에 모여들고 있다. 그러나 충무로의 관행이 그들의 재능을 불필요하게 소모시키지 않으려면 이러한 대안 마련의 움직임이 더욱 활발해져야만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FILM 2.0 글 : 최상희, 신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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