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특별기획] 충무로 시나리오 악습들

춤추는 시나리오 게임, 작가는 언제나 패배한다

로버트 알트먼이 영화 (플레이어)를 만든다고 했을 때 할리우드의 쟁쟁한 메이저 영화사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아니 애써 피하려고 했다. 제작자와 시나리오 작가가 얽혀 있는 "거래와 게임"이라는, 할리우드의 가려진 이면을 이야깃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결국 로버트 알트먼 같은 거장도 에비뉴픽처스의 간판으로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이 영화로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할리우드든 충무로든 시나리오 작가와 제작자 사이에 벌어지는 "거래와 게임"이 처절하기는 마찬가지. (플레이어)의 거만한 영화사의 부사장 팀 로빈스 대신 한국의 어느 제작자를 떠올리고, 할리우드의 시나리오 작가 대신 충무로의 작가 지망생들을 끼워넣으면 그럴듯해 보일까.

오늘도 줄담배를 피워가며 밤새 시나리오를 쓰거나 시나리오 뭉치를 들고 영화사 문전을 배회하는 작가들은 부지기수다. 요사이 한해 국내에서 제작되는 영화가 40편 정도면, 충무로 주변에서 떠도는 유명 혹은 무명의 시나리오 작가는 400명 정도다. 이처럼 공급이 수요를 앞지르는 시장에서 공급자가 약자이게 마련이다. "작가들은 춥고 배고프다"는 말은 예부터 문학계의 속설이었지만, 1990년대 영화계에서도 역시 작가들은 춥고 배고프다. 한석규 같은 배우에게야 영화 한편으로 출연료와 부대수입이 물경 10억원에 가까운 일도 생기지만, 시나리오 작가에게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무명 신인의 시나리오가 영화화의 기회를 얻는 것도 실로 "좁은 문"이거니와, 일급 작가의 경우라고 해봐야 각본료가 조연급 배우 출연료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무수한 작가(지망생)들이 좌절하고 회의하는 것은 데뷔를 못하거나 약소한 고료를 받기 때문만은 아니다. 충무로에는 시나리오 작가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법적 산업적 시스템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다. 작가의 권리는 시스템이 아니라 제작자의 양심에 의해 보호받는 것이다. 충무로에서 제작자를 상대로 자신의 권리를 흥정할 수 있는 작가는 그저 10명 이내고, 대부분의 작가는 흔한 말로 "시키는 대로 하고 주는 대로 받는다"는 게 통념이다. 요즘 "잘 나가는" 한 시나리오 작가는 "계약서를 쓰기는 한다. 하지만 제작자가 "갑", 작가가 "을"이라고 할 때, "모든 권한은 갑에게 있고, 모든 책임은 을에게 있다. 을은 갑이 만족할 만한 시나리오를 쓸 때까지 계속 쓴다." 이런 식의 계약서다"라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아직 충무로에서 흔하게 이뤄지는 관행이며, 모든 영화제작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한국영화산업도 끊임없이 지각변동을 해오고 있고, 영화제작시스템과 시나리오 관행도 자꾸 바뀌고 있다. 활발히 흥행작을 생산하는 신진 영화사들 가운데서 비교적 합리적인 시스템을 실천해 시나리오 작가들 사이에서 거래관행이 깨끗하기로 소문난 제작사들도 있다. 그 가운데는 명필름도 들어 있는데, 가령 97년 당시 대학생이던 김현석씨를 발탁해 전속작가처럼 키우는 것이나 시나리오 작가들과의 계약관행도 그렇다.

취재에 응한 몇몇 작가는 (접속) 이후 명필름에 시나리오를 건넸다가 "딱 부러지게" 거절당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접속) 성공했다고 재는구나 싶어서 야박해 보였는데 결과적으로 작가에게는 고마운 일이었다"는 것. 우노와 함께 일해온 시나리오 작가 심산씨는 "우노는 시놉시스 상태에서 계약해 작가가 안정된 상태에서 6개월이나 1년 동안 시나리오를 쓰게 한다. (처녀들의 저녁식사)의 임상수 감독 경우도 2년 동안 시나리오 개발비를 대줬다. 물론 시나리오 작가 개개인의 능력과 신뢰도의 문제도 있지만.. 이 때문에 우노에 젊은 작가들이 수혈된다"고 말했다.

일반적인 관례와 달리 시놉시스만 쓰는 데도 계약을 맺고 집필료까지 챙겨준 프로듀서도 있다. 세차례 공모전 당선 경력이 있는 한 작가는 안상훈이라는 프로듀서와 기분좋게 일한 적이 있다고 소개했다. 지난해 시놉시스 부탁을 하러온 프로듀서가 먼저 계약서를 쓰자고 제안했고 집필료 200만원까지 선불로 주더라는 것. 작가는 그뒤에도 첫 대면 때의 신뢰감으로 먼저 시놉시스를 써주고 집필료를 사양한 적이 있을 정도라고 했다. (씨네21) 편집실로 최근 김광호와 조영철이라는 두명의 시나리오 작가가 찾아왔다. 이들은 영화사들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호소했는데, 이들이 겪은 일은 충무로에서 시나리오를 둘러싼 오랜 관행에 해당했다.

(씨네21)도 이런 문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입장은 아니다. 지난 97년부터 4회에 걸쳐 진행한 "씨네21 시나리오 공모"에서 당선된 작품이 일부 영화화가 무기연기 또는 취소되면서 고료지급이 늦춰지고 있는 것이다. (씨네21)은 해당 영화사들에 지급에 관한 약속을 받았으며 이 약속이 이행되리라 믿고서 "시나리오와 관련한 충무로의 악습들"이라는 기획 아래 문제사례들을 수집해 공개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기획을 진행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취재에 응한 작가들 중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기성, 신인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이 자신이

직접 겪은 일조차도 공개하길 꺼렸다. 자신의 이름은 물론 영화사 이름, 감독 이름까지도 말하려 하지 않았다. "이 바닥에서 일하고 살려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사례1.

기약없이 일을 시킨 다음 책임지지 않는 경우가 가장 많다. 작가들은 몇달씩 혹은 1년 이상 시나리오 집필과 각색에 매달리지만 영화가 엎어지면 많은 경우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다. 충무로에서 시나리오가 완성된 상태에서 투자자를 못 구하거나 캐스팅에 문제가 생겨 영화기획이 취소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고 이럴 경우 시나리오 작가가 피해를 입기 쉽다.

제작신고까지 끝내고 촬영을 준비하던 한 영화가 있었는데 제작자가 감독을 교체하겠다고 나서 갈등을 빚었다. 해결 기미가 안 보이니까 감독과 제작자가 따로 판권 처분을 시도했는데 공교롭게도 같이 삼성으로 달려갔던 것. 결국 이 영화 제작은 무산됐고, 작가만 물을 먹고 말았다. 문제는 이런 과정에서 작가는 최소한의 권리도 보장받지 못한다는 데 있다. 신인 작가 씨는 영화화의 꿈을 접어야 했을 뿐 아니라 시나리오 고료도 못 받고 말았다. 제작자나 감독의 "장사"에 들러리 서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례2.

데뷔 이전의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들 경우 특히 영화사들로부터 아무런 보장도 받지 못한 채 막연한 기대감으로 각본수정이나 각색작업을 해주곤 한다. 99년 1월,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 조영철씨는 상당한 흥행작들을 보유한 영화사를 찾아가 시나리오를 건넸다. 시나리오 제목은 (가디스). 1주일 뒤 만나자는 연락이 와서 다시 영화사를 찾아갔다. 영화사 기획실 직원은 몇가지 "주문"을 했다. 먼저 제목을 바꾸고, 신을 몇개 더 만들고, 전체 분량은 약간 줄이고, 등장인물을 줄이는 대신 여주인공 등장 횟수를 늘려라, 여주인공의 성격이 너무 직선적이니 좀 부드럽게 고치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조씨는 주문대로 수정했고 한달 반 만에 작업을 끝냈다.

제목은 "개같은 영혼들" "광혼가" "추락 영혼" 등 11개나 더 만들었고, 초고의 205신을 209신으로 늘리고, 전체 분량은 3쪽 줄였다. 등장인물은 10명을 없애는 대신 2명을 새로 만들었고,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신도 45%에서 70%로 늘렸다. 그러나 조씨가 고친 시나리오를 가져갔을 때 영화사에서는 그냥 "놓고 가라"고 했다. 열흘이 지나도 연락이 없어 전화하자 영화사에서는 "시나리오가 부실하고 신인 냄새가 너무 난다"며 제작할 의사가 없다고 대답했다. 조씨가 영화사에 시나리오를 되찾으러 갔을 때 부아를 돋운 것은 또다른 시나리오 때문이다. 두번째 영화사에 갔을 때 전해주고 온 또다른 시나리오도 함께 돌려받았는데, 읽어본 흔적도 없고 반찬그릇 받침으로 썼는지 "김치 국물"이 묻어 있었다는 것이다. "시나리오가 좋고 나쁨을 떠나 피땀 흘려 쓴 작품이 쓰레기 취급받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에 치유할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겼다"고 토로했다.

이에 대해 영화사에서는 초고를 보고 의견을 말했을 뿐이지 "수정을 요구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영화사에서는 "소감"을 말했는데, 조씨는 그 말을 "조건"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따져보면 영화사에서는 조씨의 다른 시나리오 관리를 잘못해 김치 국물이 묻은 것을 빼면 큰 잘못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조씨가 만났다는 영화사의 관계자는 조씨 주장에 대해 묻자 "시나리오가 셀 수 없이 들어오는데 어떻게 다 알 수 있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사례3.

시나리오에도 채택료가? 98년 9월, 한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은 P극장에서 운영하는 영화사의 한 직원에게 시나리오를 전해줬다. 이 간부는 확답은 하지 않고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3개월 가량 시간을 끌었다. 하루는 사무실로 찾아가자 조용히 불러서 한가지 제안을 했다. "영화를 제작하도록 사주를 설득할 테니 작가료를 받으면 알선료로 작가료의 40%를 줄 수 있느냐"는 것.

사례4.

아이디어 도용은 가장 심각한 케이스. 비교적 최근 개봉작인 (화이트 발렌타인)의 혐의는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원래 (오중주)라는 제목으로 한 작가가 제공한 스토리에서 비둘기 등 주요 모티브를 빼내 다른 작가에게 집필을 맡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 스토리를 제공한 작가와 원작자가 이에 항의하자 제작사에서는 뒤늦게 고료를 지불하고 무마했다. 또 몇해 전 영화 (큐)를 둘러싼 공방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경우다. 94년 최준영, 신인호라는 신인 작가가 당구의 달인으로 알려진 이상천이라는 희귀 소재로 기획하고 쓴 시나리오가 1년쯤 지나 전혀 다른 사람이 쓴 시나리오로 바뀐 채 제작한다는 계획이 알려진 것.

한 작가는 지난해 댄스영화 몇편이 준비되고 있다는 소문이 돌 때 어느 제작자로부터 "좀 바꿔서 한번 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놀랍게도 그 제작자의 손에는 제작 준비중이던 댄스영화의 시나리오가 들려 있었고, "빨리 치고 나가면 된다"고 다그치더라는 것. 물론 일언지하에 거절했지만 말로만 듣던 이야기를 직접 체험하면서 "자존심도 상하고 절망스러웠다"며 말끝을 흐렸다.

예비작가가 쓴 시나리오를 그대로 영화화하기 어려울 수는 있다. 이 경우, 제작사에서 약 200만~300만원을 주고 원안만 사서 좀더 훈련된 작가에게 집필을 맡기는 것이 상식적인 일이다.

사례5.

공모제를 악용하는 경우도 있다. 제작자가 공모전 당선 경력이 있는 작가들의 명단을 입수한 다음 이들에게 시놉시스 하나 써오라고 모두 연락을 한다. 물론 시놉시스 작가료는 없다. 이렇게 모은 시놉시스 중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 또다른 작가들에게 싼값에 집필 의뢰를 하는 것이다. 실제로 공모전에서 세차례 당선 경력이 있는 한 작가는 첫 당선 직후 전화를 받고 영화사를 찾아가 "온갖 시나리오 공모 당선자 명단을 붙여놓고 똑같은 전화를 하는 것을 직접 봤다"고 말했다.

공모전의 또다른 함정은 의도적으로 당선작을 내지 않을 수도 있고 시나리오가 공개된다는 점이다. 몇해 전 한 영화감독이 어떤 시나리오공모전의 심사에 참여했다가 제법 잘 쓰인 시나리오를 하나 발견하고 수상작에서 누락시킨 뒤 아이디어를 빼돌려 영화화를 추진하다 기획자체가 무산되면서 시나리오가 묻혀버린 경우도 있다.

4~5년 전에는, 무비코리아라는 영화사에서 고료 4천만원를 내걸고 공모전을 연 적이 있다. 물론 당선작은 뽑지 않았고, 이때 응모했던 시나리오의 소재가 여기저기 돌아다닌 적이 있다. 대체로 작가들은 특정 영화사가 고액의 고료를 내걸고 시나리오를 공모하는 것은 별로 신뢰하지 않고 고운 눈으로 보지 않는다.

사례6.

작품을 쓰게 한 다음 다른 영화사에 팔아넘기는 일을 당한 작가도 있다. 공모전에서 당선한 적이 있는 이 작가는 한 감독으로부터 4개월 동안 불려다니며 시놉시스를 써주고 100만원을 받았다. 감독은 대기업의 고위인사를 잘 아니까 제작비를 끌어들이면 최고 대우를 해주겠다는 말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같이 작업하던 찰영감독이 부르더니 시놉시스를 따로 하나 써달라고 부탁했다. 작가는 받았던 100만원을 돌려주고 손을 뗐다. "같은 작품하겠다고 모인 감독과 촬영감독이 영화 만들 궁리는 안 하고 서로 모르게 시놉시스 장사에 혈안이 돼 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영화진흥공사 공모전에서 뽑은 당선작을 추첨으로 제작사를 결정하는 방식이 문제라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제작할 능력도 없는 회사가 작품을 확보한 다음 실제로 흥정을 붙이는 일도 있었다.

사례7.

크레딧은 어디로 갔나. 작가들은 "초고는 작가 혼자 다 썼는데 이후에 감독이나 또다른 사람이 손질 좀 했다고 공동 창작이라고 하는 것도 작품을 뺏기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본적으로 시나리오는 이야기 틀을 구성하고 인물을 구축하는 것이 제일 어렵고 힘든 일인데, 디테일에 강할 수밖에 없는 감독이 살을 붙이고 다듬었다고 작가의 창의성에 대한 평가가 깎여서 안 된다는 것이다. 주로 신인이나 지망생들의 피해 사례가 많은 것은 제작자나 감독들이 그들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신인들의 발랄함이나 패기를 기대하는 측면도 있지만 작가료가 싸다는 것과 요리하기 쉽다는 이유가 더 크다. 일의 특성상 작가는 감독이나 제작자와 갈등 빚기 쉬운 자리다. 작품을 놓고 토론을 하다 보면 이견이 생길 수 있고, 그럴 때 감독은 작가의 창의성을 고려하기보다 아무래도 순응하는 사람이 편할 수밖에 없다.

사례8.

지난해 흥행한 한 멜로영화의 경우, 프로듀서가 아이디어를 무명작가에게 주고 시나리오를 주문했다. 그런데 완성된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지 않자 프로듀서는 다른 작가에게 재주문했고 도합 6명의 작가지망생에게 주문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마침내 그는 믿을 만한 한 작가에게 연락했고, 이 작가의 주문은 "크레딧에 내 이름만 넣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 오리지널 시나리오도 아닌데 별 뜻 없다"고 얘기하는 작가에게 프로듀서는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이 경우, 희생번트를 친 중간 타자들이 영화 크레딧 자막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을 억울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대표작가 이름만 크레딧에 올리는 것은 국내뿐 아니라 할리우드에서도 흔한 일이다. 게다가 프로듀서가 원안을 제공한 이런 경우, 프로듀서를 비난하기는 어렵다.

사례9.

시나리오 작가는 알지도 못하는 이른바 "영상소설"로 제작자가 돈을 번다. 제작자가 소설가 지망생에게 시나리오를 주고 지문과 대사를 풀어 소설처럼 쓰게 해서 이른바 "영상소설"을 출판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충무로에서 대체로 시나리오의 저작권은 작가가 아니라 제작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비디오, TV, 소설 등 인접저작권은 말할 나위도 없다.

1999년 4월 씨네21 특집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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