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님 다리는 백만불짜리 다리, 발로 쓰는 시나리오들

오늘 어떤 영화에 대해 ‘발로 찍은 영화’라는 평을 들었다면 안 보는 편이 좋다. 하지만 오늘 어떤 영화에 대해 ‘발로 쓴 시나리오’라는 말을 들었다면 기대를 걸어도 좋다. 현장을 누비며 발로 쓴 시나리오는 꽤 믿음직하다. 그렇게 작업하는 사람들이 요즘 부쩍 많다.

영화감독 유하가 깡패를 만났다. 2004년 10월부터 12월까지 행동대장급 깡패들을 여럿 만났다. 깡패들의 사무실을 들락거렸고 종종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유하는 깡패에게 “연애는 해봤어요?” “숙소에서 속옷은 뭐 입어요?” 같은 느물느물한 질문을 던지곤 했다. 깡패는 숙소에서 뭘 입는 지 설명하기 위해 숙소 풍경과 생활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말은 종종 옆길로 샜고, 유하는 내심 반가웠다. 세상 저편에만 살던 사람이 세상 이편을 경험하는 것 같았다. 인생 공부가 팍팍 됐다. 돈이 많았다면 더 자주 만났을 것이다. 영화감독에게 '룸싸롱' 술값은 만만한 게 아니었다.

유하의 아내는 남편이 무서운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게 못마땅했다. 남편이 187cm의 건장한 체격이라는 것은 아무 위로가 안 됐다. 유하의 동료들은 왜 자꾸 음지로 가냐며 의구심을 가졌다. 하지만 음지에서 유하는 ‘형님’이었다. 깡패들은 유하에게 말끝마다 형님이라고 했다. "그렇습니다, 형님." "아닙니다요, 형님." 어느 날 유하는 청첩장을 받았다. ‘저 결혼합니다요, 형님.’ 깡패의 결혼이란 어떤 것일까 궁금했던 유하는 봉투를 챙겨서 결혼식에 갔다. 당연히 <대부>에서 봤던 마피아 결혼식 같은 것은 아니었다. 하객들의 직업군이 좀 다를 뿐 지겹도록 봐본 여느 결혼식과 다를 바가 없었다.

말죽거리 다음은 비열한 거리

<말죽거리 잔혹사>를 잇는 유하의 신작은 <비열한 거리>다. <비열한 거리>는 30대의 중간 보스급 조직 폭력배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갱스터 누아르로 현재 시나리오 작업 중이다. 유하는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깡패를 만났다. 아니다. 어쩌면 깡패를 만났기 때문에 시나리오를 쓴 것인지도 모른다. <비열한 거리>는 깡패가 주인공이되 그의 주변을 얼쩡거리는 영화감독이 조연으로 나온다. 영화 속에서 영화감독은 깡패를 취재하고 결국 깡패 영화를 만든다. 영화감독의 모델은, 당연히 유하 자신이다.

시인이자 영화감독인 유하는 “내 경험을 대중과 경험하겠다는 욕망으로 시를 쓰고 영화를 만든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시집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무림일기> <천일마화>, 그리고 자전적인 성장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는 그런 욕망의 발로다. 그래서 유하는 모르는 이야기를 못 쓴다. 캐릭터가 이웃 같지 않으면 못 쓴다. 유하는 <비열한 거리>를 쓰면서 발품을 팔아야만 써지는 제 처지가 괴롭기도 했지만 생겨먹은 게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어떤 감독은 사형수 영화를 찍기 위해 반년 동안 사형수로 살았다는데, 진짜 취재가 되려면 그렇게 생활이 돼야 해요. 저처럼 두 달 만나서 뭘 끌어내겠다는 건 무리예요. 어차피 이야기는 작가가 꾸며내는 건데 제 경우엔 이야기를 꾸며내려면 땅에 붙어 있는 캐릭터가 필요하니까 부족하지만 그렇게라도 만난 거지요.”

유하는 취재에 대해 기대를 거의 안 했다고 말했다.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크다는 만고불변의 진리 때문이기도 했지만, 일상이란 깡패의 것이거나 보통 사람의 것이거나 지리멸렬하기는 마찬가지다. 오늘은 뭐 덩어리 하나 건지려나 하고 집을 나서지만, 누가 유하를 위해 영화 거리를 준비해 놓고 있는 게 아닌 이상 세상은 너무 뻔한 일들의 반복이다. 그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유하는 한때 취재 중독증에 걸렸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습자지를 대고 베끼듯 ‘모사’하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렸다. 슬쩍슬쩍 이용하는 수첩이나 녹음기 대신 몰래 카메라를 설치하고 싶다는 망상에 사로잡혔다.

“로버트 맥기(<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의 저자로 전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시나리오 작법 세미나를 열고 있다.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어뎁테이션>에서 도널드가 시나리오 작가가 되겠다며 듣는 명강의의 주인공)가 그런 말을 했어요. 작가가 모르는 세계가 상투적이지 작가가 파악하는 세계는 상투적일 수 없다. 독창성은 특이함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신빙성을 확보하기 위해 고투하는 과정에서 얻어진다. 전 이 말에 전적으로 동감해요. 취재를 한다고 그게 얻어지는 건 아니지만 관객이 영화를 볼 때, ‘저게 말이 돼?’ ‘너무 뻔한 거 아냐?’하며 의심하는 순간을 대비해 취재를 하는 거죠.”

유하는 쇠 파이프와 사시미 칼을 들고 전쟁을 치르는 깡패를 두 눈으로 보지 못했다. 그가 본 깡패는 사외 이사니 스폰서니 하는 멀쩡한 직함을 달고 여기저기 돈 받으러 다니는 깡패들이었다. 그들은 비열했고, 비루했고, 졸렬했다. 우리들이 비열하고 비루하고 졸렬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우리 사회가 어떻게 조폭성을 만들어내는가를 성장 드라마를 빌려 얘기했다면, <비열한 거리>에서는 30대 중견 깡패의 주변을 통해 우리 사회가 조폭성을 어떻게 소비하는지를 말하고 싶다는 게 유하의 연출 의도다. 출발은 마틴 스콜세지의 <좋은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발로 시나리오를 쓴 유하의 깡패 영화가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취재란 인정사정 보기 위한 것

한국영화의 취재력이 늘고 있다. 특별히 할리우드산 갱스터, 누아르, 스릴러 장르 등이 한국형 형사 영화나 깡패 영화로 체질을 바꾸려 할 때 취재는 필수불가결의 요소로 끼어들고 있다. 결국 영화가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하려는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양질의 취재는 생생한 캐릭터와 신빙성 있는 에피소드, 윤기 있는 대사를 만들어내는 신뢰할 만한 통과 의례가 됐고, 시나리오 작가나 영화감독은 머리와 손뿐 아니라 발로 쓰는 시나리오를 위해 기꺼이 악전고투 감수하려 한다. 월척이건 피라미건 이런 장르에 있어 취재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 유용한 낚싯대가 된다.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는 기념비적인 작품은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다. 우연히 사회부 기자들로부터 형사들의 생활을 전해 들은 이명세는 1996년 가을 인천 서부경찰서에서 3개월간 취재를 했다. 이 형자, 저 형사를 따라다니던 이 감독. 한 형사에게 “형사라면 영구 형을 만나봐야 한다”는 말을 듣고 강력계 박재인 형사를 만나게 된다. 바로 박중훈이 연기한 우영구 형사의 모델이다. ‘영구’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박 형사는 평소에는 정신 병원에서 나온 바보 같다가도 결정적인 순간, 범인을 잡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돌변하는 강력계의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박 형사의 취미는 잠복인데 겨울에 잠복할 때는 소리가 날까봐 차 시동을 끄고 담요를 둘둘 만 채 밤을 지새기 일쑤였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잠복 장면, 범인이 나타날라 치면 오줌 싸고 운동화 끈부터 묶는 장면 등은 취재가 아니면 제아무리 이명세라도 상상해내기 어려웠을 명장면이다. 그리고 우영구의 저 유명한 대사 “판단은 판사가 하고, 변명은 변호사가 하고, 용서는 목사가 하고 형사는 무조건 잡는 거야”는 평소 박 형사가 “잡힌 사람들이 이것저것 봐달라고 부탁할 때가 있어요. 그럼 그러죠. ‘야, 판단은 판사가 하고, 변명은 변호사가 하고, 용서는 목사가 하는 거야. 나는 판사도 변호사도 목사도 아니고 형사야”에서 따온 것이다.

형사 영화의 외피를 두른 화성 연쇄 살인 사건 미스터리 <살인의 추억>(2003)도 취재 공이 많이 든 시나리오였다. 원작이 된 김광림의 희곡 <날 보러 와요>도 취재가 잘된 드라마였지만 각본과 연출을 겸한 봉준호 역시 영화적인 허구로 재창조하기 위해 발품을 많이 팔았다. 봉준호는 자료 취재를 마치고 초고를 쓰기 전인 2000년 가을, 사건 관계자들을 두루 만났다. 그중 송강호가 연기한 박두만 형사는 사건을 수사한 조 모씨가 모델이었다.

시골 형사였던 그는 전라도에서 숙박업을 하며 제법 잘사는 자영 업자가 돼 있었는데 눈빛만은 호랑이처럼 매서웠다. 처음엔 눈을 마주치기조차 힘들었던 조씨가 1시간이 지난 후 어린애처럼 눈물을 뚝뚝 흘렸다. 봉준호는 마치 강호동이 제 눈앞에서 엉엉 우는 것 같은 당혹감을 느꼈다. 조씨는 “내 가슴엔 떼어낼 수 없는 암 덩어리가 있다”고 말했다. 범인을 잡지 못한 형사, 무언가 간절히 바랐지만 이루지 못한 사람의 억센 슬픔은 봉준호가 <살인의 추억>에서 형사들의 감정선을 살리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전현직 형사보다는 접근하기 힘들지만 깡패나 사기꾼 같은 전현직 범죄자들도 취재의 대상이 된다. 최동훈의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2004)은 여러 사기꾼들의 도움으로 5인조 사기단이 한국은행에서 50억 원을 터는 이야기를 감칠 맛나게 들려줄 수 있었다. 1996년 한국은행 구미지점에서 현금 9억 원이 사기 인출된 사건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최동훈은 취재차 구미경찰서를 찾아갔지만 담당 수사관은 자료 공개를 할 수 없다고 했고, 용의자 중 한 명이 이미 죽었다는 말을 듣고 왔다. 말하자면 허탕을 친 것이다.

최동훈은 어쩔 수 없이 자료 조사와 들은 풍문과 열심히 한 상상력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하지만 그 시나리오를 읽은 제작사 싸이더스의 차승재 대표가 “얘기는 재미있는데 사람 냄새가 안 난다”며 사기꾼들과 다리를 놓아줬다. 최동훈은 회집, 룸살롱, 경마장 등을 다니며 그들의 말투, 표정, 제스처, 에피소드 등을 관찰했다. 마약 때문에 몸무게가 늘었다 줄었다 했다던 아저씨, 안산에서 가짜 휘발유를 팔던 아저씨, 인생을 포커판에 바친 아저씨 등을 만나면서 최동훈은 사기라는 게 수법이 지능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일상적인 것이 많다는 걸 깨달았다. ‘수술시킨다’ ‘접시 돌린다’ 등의 사기계 은어뿐 아니라 “사기는 테크닉이 아니라 심리전이다”던 창혁(박신양)의 통찰력 있는 대사가 그러한 취재 과정에서 얻어졌다.

끝까지 취재해 반드시 쓰고 만다

이렇게 만들어진 <범죄의 재구성>으로 국내 신인감독상을 모조리 싹쓸이한 최동훈은 요즘 두 번째 영화 <타짜>를 준비 중이다. ‘타짜’란 도박판에서 속임수를 잘 부리는 사람을 뜻하는 은어로, 영화는 허영만의 인기 만화를 원작으로 했다. 최동훈은 이번 영화에서는 많은 취재를 할 계획은 아니지만, 몇몇 사람들에게 포석을 깔아 타짜들과 접선을 시도하고 있는 중이고 창고(포커를 치는 장소를 ‘하우스’라고 하고, 화투를 치는 장소는 ‘창고’라 한다) 나들이도 한번쯤 할 생각이다. 현직 검사의 도움을 받아 검사들의 수사 과정에 사실감을 더했던 <공공의 적 2>의 작가 김희재는 얼마 전 <택스>의 초고를 탈고했다.

<택스>는 ‘끝까지 추적하여 반드시 징수한다’는 모토로 고액 체납자를 좇는 서울시 38세금기동팀의 활약을 그린 영화로 김희재 작가는 기동대원, 팀장, 과장, 서울시청 홍보 담당자 등을 만나 형사, 검사와는 달리 업무 내용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들의 영화 같은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옮겨 썼다. 서울시에서만 1조 원, 국세는 10조 원이 밀려 있는 고액 체납자들 중에는 호화 저택에 살며 고급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조세 정의’를 무슨 굴러다니는 개똥같이 아는 이들의 파렴치함을 고발할 <택스>는 <공공의 적> 시리즈의 강우석 감독이 연출해 추석 시즌인 9월 개봉 예정이다.

깡패, 형사, 검사, 사기꾼, 도박꾼에 세금기동팀까지 특정 직업군과 그들이 하는 일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취재에 공들인 흔적이 표가 잘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점점 다양해지려는 한국영화 덕에 취재의 범위는 한층 넓어지고 있다. 크고 작은 취재가 잘 쓴 시나리오를 위해 동반된다. 어느덧 취재는 단순한 아이디어 채집 차원이 아니라 작가가 구체적인 삶의 감각을 익히는 데 있어 중요한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최근 개봉한 <말아톤>(2005)이 적절한 예다. 자폐아 배형진 군을 철인으로 만든 어머니 박미경의 수기 <달려라! 형진아>와 KBS-1TV <인간극장> ‘달려라! 내 아들’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말아톤>이 4백만 관객을 감동시킨 국민 영화로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감독 정윤철의 남다른 취재가 있었다.

2003년 조선일보 주최 춘천마라톤대회에 참가한 정윤철은 한 10km만 뛰어보자고 했다가 41.195km 풀 코스를 5시간 30분 만에 완주했다. 초죽음이 돼서 결승점에 들어왔고 무리한 완주로 지금도 후유증을 겪고 있지만 정윤철은 그때 <말아톤>의 클라이맥스를 얻었다. 초고에서는 초원(조승우)이의 ‘자립’을 보여 줄 마땅한 설정을 찾지 못했는데 죽을 힘을 다해 뛰던 감독이 35km 지점에서 만난 스프링클러는 마른 시나리오에 단비를 뿌려줬다. 아, 저거다. 정윤철은 영화 초반 비의 모티프와 “이런 날이 뛰기는 더 좋지”하던 초원이의 연습 장면을 연결시키며 초원이가 비와 바람과 햇빛을 가르며 질주하는 아름다운 클라이맥스를 연출했다. 또한 취재 과정에서 60분짜리 테이프 50개 분량으로 담은 형진이와 가족들의 모습은 수첩이나 녹음기였으면 감당해낼 수 없을 심리적인 갈등을 영화적으로 재창조하는 데 결정적 도움이 됐다.

취재의 중요한 가치 중 하나는 오감을 일깨워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것이다. 얼마 전 김영하의 소설 <검은 꽃>을 영화로 만들고자 멕시코, 쿠바, 과테말라 등을 다녀온 이재한도 그런 경험을 했다. <검은 꽃>은 1905년 1,033명의 조선인들이 신대륙을 찾아 제물포를 떠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부푼 희망과는 달리 멕시코 에네켄(애니깽) 농장의 노예로 팔려간 그들은 조선의 주권이 일본으로 넘어갔다는 걸 알게 되자 멕시코에 ‘신대한’이라는 나라를 건국하고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다는 이야기다. <검은 꽃>은 이재한이 우연히 비행기에서 들은 이야기를 김영하에게 전한 데서 발단이 됐고, 이재한은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를 끝내고 이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되찾아 영화로 옮기려 하는 중이다.

지난 1월 중순 10여 일간의 일정으로 남미를 다녀온 이재한은 현재 로케이션에 대한 정보와 더불어 100년 전 지구 반대편에서 노예로 살다 스스로 나라를 세운 이들의 피땀을 맡고 왔다. 난생처음 만져본 애니깽은 너무 거칠었다.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날씨는 살인적으로 더웠다. 이 땅에서 이 바람과 햇빛을 받으며 이렇게 거친 식물을 경작했던 그들의 고통과 그 속의 희망을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멕시코 사람을 보았고, 멕시코인의 스페인어를 귀에 익혔고 사막과 밀림을 가로지르며 먀야 문명의 건축물과 라틴 음악을 체험했다. 이재한은 비로서,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민자들의 건국 이야기가 중심이 될 영화는 놀랍게도 세르지오 레오네나 샘 패킨파가 개척한 네오웨스턴 장르에 담아질 것이라고 한다. 가서 그런 확신을 얻었다고 한다.

시나리오, 취재의 재구성

이러저러한 성공적인 사례와 이러저러한 도전적인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취재가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라는 것만은 자명하다. 실제로 어떤 사람이 있고, 어떤 일이 있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나오고 어떤 일이 있어야 더 좋은 시나리오가 되느냐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로버트 맥기의 말대로 신빙성 있는 이야기는 이른바 사실성이라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란 말이야, 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건을 이야기에 포함시키기 위한 가장 약한 구실일 뿐이다.”

봉준호는 <살인의 추억>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고민이 많았다. 취재를 통해 얻은 생생한 디테일을 살려야 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렸다. “소위 월척을 낚게 되면 영화라는 어항에 어울리지 않더라도 꼭 집어넣고 싶은 욕심이 생겨요. 하지만 취재는 쑤셔 넣는 게 아니죠. 아무리 탐나는 물고기도 어울리지 않으면 바다로 돌려 보내야 해요. 그게 취재의 몫이에요.”

최동훈도 취재 만능주의에 거리를 두는 입장이다. “<대부> 찍는다고 마피아와 같이 생활하나요? <범죄의 재구성>이 취재가 잘됐다는 평을 듣긴 하지만 기껏해야 열 번 정도 취재를 했을 뿐이에요. 3년 동안 시나리오를 쓰면서 제가 읽은 책, 들은 음악, 친구들과 나눈 이야기가 몇 차례 취재보다 덜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는 거죠.” 무엇보다 취재는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국외자가 아니라 내국인으로서 해당 필드에 육화되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시간을 흘려 보내야 한다. 나중에 다 버리기 위해 취재한다는 말이 그래서 나오는 거다. 취재의 다른 이름은 ‘삽질’이다. 유하는 “취재의 가장 큰 맹점은 비본질적인 것에 너무 많은 신경을 쓰게 된 나머지 상상력이 발휘될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취재는 잘 쓰면 약이고 잘못 쓰면 독이다. 그래도 약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게 취재의 장점이다. <알포인트>(2004)로 데뷔한 시나리오 작가 출신 감독 공수창은 취재를 좋은 재료로 요리를 하는 것에 비유한다. “요리란 조리법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신선한 재료로 만든 요리는 여운이 오래 남죠. 영화도 그래요. 요즘에는 번쩍이는 아이디어로 승부를 보려는 기획이 많은데 현장에서 뽑아낸 시나리오는 그와 비교할 수 없는 생명력이 있지요.” 생명력. 그 생명력은 단순히 시나리오에 남지 않고 작가가 영화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도록 용기와 힘을 북돋워준다.

“자료 취재만 하고 초고를 썼을 때는 무슨 자폐아 에피소드의 총집합 같았는데 내가 직접 뛰어 보니까 초원이가 느끼는 움직이는 세상에 대한 벅찬 느낌을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어요.”(<말아톤> 정윤철), “9차 살인의 희생자가 된 여중생 부모를 만나지 못했어요. 도저히 용기가 안 나더라고요. 그런 용기도 없으면서 영화를 왜 찍나 스스로를 책망하면서도 시체가 발견된 곳에 가서 생각을 많이 했어요.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자문도 하고, 범인을 만나면 ‘당신이 죽인 여자를 기억하냐?’고 물어보고도 싶고. 그때 들끓었던 분노의 힘으로 영화를 찍은 것 같아요.”(<살인의 추억> 봉준호), “고액 체납자들은 세금은 안 내도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검사 앞에 불려온 피의자들은 대부분 자기 잘 못을 인정하는데 이 사람들은 자기 돈을 빼앗긴다고 생각하더라구요. 성실하게 세금 내는 사람들은 바보로 알아요. 작가로서 이런 소재로 시나리오를 쓰게 되면 아무래도 사회적인 시각을 갖게 되고 책임감도 커지죠.”(<택스> 김희재).

아주 잘 꾸며낸 이야기는 콜라와 같다. 물과 이산화탄소와 캐러멜과 설탕과 인산과 그 밖에 알 수 없는 재료들을 알 수 없는 배합으로 콜라를 만든다. 어떤 것이 콜라의 맛을 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 나 취재 열심히 했어요, 라고 자랑하는 시나리오나 장르 영화의 규칙만 착실히 따라가는 시나리오나 하품 나오기는 마찬가지다. 둘 다 맛 없는 콜라다.

관객은 톡 쏘는 콜라를 마시고 싶어 한다. 작가란 이야기를 꾸며내는 사람이다. 이 자리에서 발로 쓴 시나리오를 칭찬하는 것은 진짜 같은 거짓말을 꾸며내기 위해 머리와 엉덩이뿐 아니라 두 발까지 괴롭혔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많이 괴롭혀서 관객들을 덜 괴롭히려 했던 그 갸륵한 노력이 어떤 알 수 없는 배합을 통해 ‘톡’ 쏘는 맛을 냈기 때문이다.

필름 2.0 사진 김선태 기자 / 글 한승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