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헤라자데를 찾아서

얼마 전, 영화 사업에 손대기 시작한 모 대기업에서 주최하는 '시나리오 공모전'의 심사를 한 적 있다. 대상에만 물경 5천만 원의 거금을 걸고 벌인 그 '이야기의 잔치'에는 강호의 이야기 고수를 자처하는 이들이 참여해 자웅을 겨뤘다. 어디서 본 듯한 스토리를 함부로 흉내 내 되다 만 듯한 인상을 남긴 션찮은 시나리오도 있었으나 개중엔 기성작품 못지않은 탄탄한 드라마 얼개와 영화 보는 재미를 줄 것 같은 진주들도 더러 있었다. 제작자, 프로듀서, 감독, 저널리스트 등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이 만장일치로 뽑은 대상작은 신인 작가의 솜씨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세련된 준작이었다. 심사위원들 사이에선 작품의 '진본성'에 대한 의혹이 제기됐고, 글을 쓴 작가를 불러다 꼬장꼬장 심문까지 하고 나서야 기껍게 수상작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좋은 이야기의 요건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보기에 따라, 사람들마다 기준도 제각각이다. 아무렇게나 이야기의 요소들을 흩뜨리지 않는 찰진 구성이나 실감나게 인물을 살려내는 정교한 캐릭터 묘사, 스토리에 주제를 실어 나르는 작가의 통찰력을 우선순위로 꼽는 사람도 있다. 영화화를 전제 삼은 시나리오라면, '훌륭할 뿐 아니라 영화로 만들어질 가능성이 있는가'를 최고로 친다. 무엇이거나, 좋은 이야기를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한국영화가 어렵다 어렵다 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로 '이야기의 기근'을 드는 사람들도 있다. 감독들은 "좋은 작가가 있어야 내가 직접 시나리오를 안 쓰지"라고 탄식한다. 재미와 의미, 감동을 황금비율로 배분한 '기막힌 이야기'를 찾는 게 여간 힘들지 않다는 볼멘소리다. 충무로 주요 투자사나 제작사엔 수십 편의 시나리오가 쌓여 있지만 그중 당장 영화로 만들고 싶은 군침 도는 '물건'을 찾기란 힘들다는 것이다. 백 중 구십은 자질이 의심스러운 조야한 이야기들이고 괜찮은 시나리오는 영화화하기 난망한 경우가 많더라는 한탄도 들린다.

지금은 영화 만들 돈도 없다 하지만, 돈이 있다 한들 '이야깃감'이 없다면 이 또한 지질한 일이다. 한국의 영화감독 중에는 영화가 서사예술의 적자라는 오래도록 신성시돼온 가정을 부정하는 이들도 있지만 여전히 '이야기의 재미'는 관객들이 영화를 선택하는 첫 번째 요건이다. 이 대목에서 한국영화계가 새로운 이야기와 이야기꾼 발굴에 게으르지 않았나를 돌아보게 된다. 유행에 따라 널뛰기를 하는 제작 트렌드와 '착취'의 지경에 이른 장르 우려먹기, 모험을 꺼리는 안전 위주 제작 등이 걸림돌이 된 것이다. 실험과 모색은 줄고 뒤탈 없는 결과를 보증할 감흥 없는 '보통 이야기'들이 넘쳐나게 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그러나 탈 없는 ‘안전빵’이라고 생각했던 영화들이 나자빠지게 되면 대책은 없어진다. 빈 탄창을 채울 만한 새 총알을 예비하지 않은 탓이다. 한쪽에선 날로 빈약해져가는 '이야기 기근'을 호소하는 와중에 각종 영화사, 단체들이 주최하는 시나리오 공모전은 끊이지 않고 열린다. 상금이 많은 공모전에는 수백 편의 시나리오가 몰리기도 한단다. 얘깃거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많으나 쓸 만한 이야기꾼은 찾기 힘든 시대, 지금 한국영화의 위기는 어쩌면 '이야기의 위기'와 통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이야기의 힘'을 증거하는 또 다른 이야기 중에 천일야화가 있다. 일명, '왕의 여자-세헤라자데의 귀환'이다. 페르시아의 왕이 아내로부터 배신당한 후 세상의 모든 여자들을 죽이기로 했다는, 그래서 여자와 결혼한 다음날 신부를 죽이는 방식으로 복수(?)를 했다는 이야기. 여자의 씨가 말라갈 무렵, 세헤라자데라는 대신의 딸이 왕의 여자가 됐는데, 그녀가 바로 메시아였다. 밤마다 재미있는 이야기로 왕을 홀려 하루하루 생명을 연장한 세헤라자데는 급기야 천 하루 동안 쉼 없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아 왕을 다스린다. 세헤라자데의 기막힌 이야기 솜씨에 감탄한 왕은 그녀를 죽이기는커녕 아내로 맞이한다. 이야기의 힘이 세상을 구한 것이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어디에 있을까? 지금 한국영화계엔 세헤라자데 같은 이야기꾼, 왕의 복수심마저 스르르 녹여줄 기막힌 이야기가 필요하다. 어떤 이유에서건 한국영화에서 멀어진 관객들의 마음을 홀릴 '이야기의 천재들' 말이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매일 밤 왕의 마음에 들 만한 이야기를 지어내기 위해 세헤라자데는 소재와 자료를 열심히 모았다는 것이다. '준비된 이야기꾼'이었던 셈이다. 좋은 이야기, 오래가는 이야기꾼은 거저 얻어지는 법이 없다. 어디서 본 것 같은 반듯한 이야기 말고 허다한 전형과 관습을 발가벗기는 그런 이야기를 지어내는 사람 말이다. 그런 이야기가 있다면 얼어붙은 관객들의 마음도 페르시아 왕처럼 살살 녹아내릴 것이다. 그러니 부디, 뭘 봐도 덤덤한 이 팍팍한 가슴을 금즉 놀라게 할 황홀한 이야기를 누군가 좀 들려다

Film 2.0 장병원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