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대작 시나리오 작가] 시나리오 쓰기 10가지 기술
"영웅을 10분 안에 위기에 빠뜨릴 것"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각본에서 자주 발견되는 특징이란 없을까? 이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은 책이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건 없다. 그 영화들을 한번에 관통하는 불변의 진리도 없다. 그러니 믿거나 말거나 식으로 10가지 지침을 임의로 작성해본다. 하지만 이 가설이 정석은 아닐지라도 참조는 될 만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초대한 각본가들의 영화를 통해 한번 들여다보자.

1. 새로운 영웅을 영접하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는 영웅이 빠지는 일이 거의 없다. 프로프의 서사학과 조셉 캠벨의 신화학을 적절히 섞어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위한 실용적 안내서>라는 지침을 만든 뒤 할리우드 실세들에게 돌려 실제로 유행시킨 스토리 분석가 크리스토퍼 보글러는 <신화, 영웅 그리고 시나리오 쓰기>라는 책에서 “모든 스토리는 신화, 민담, 꿈, 그리고 영화에서 보편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몇 가지 구조상의 공통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그것을 영웅의 여행이라 통칭한다”고 말한다. 여행이건 아니건 한때 유행했던 근육질 덩치들(람보, 코만도)의 영웅 스토리는 오래전에 지나갔고 요즘 유행하는 스토리는 두 얼굴이며 양면적이고 어두운 영웅의 존재감에서 나온다. 그들은 돌연변이고 반(半)흡혈귀이고 스파이이며 얼굴을 바꾸거나 의복을 바꿔 겨우 세상을 지킨다. <배트맨> <스파이더 맨> <블레이드>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등이 바로 그러하지 않은가.

2. 10분 안에 흥미를 끌어라!

“나는 모든 시나리오 지망생들이 이야기를 잘 쓰건 못 쓰건 언젠가 잘해낼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시간이 없었다. 잘못된 시나리오는 쓰레기통에 던져져 재활용 종이로 사용될 것이다.” 이 독설은 <아메리칸 아이돌>의 ‘사이먼’이 아니라 저명한 시나리오 작법 강사 ‘사이드’ 필드가 <시나리오란 무엇인가>에서 한 말이다. “10분이다. 첫 10분 안에 당신은 보고 있는 영화에 관한 생각을 결정하게 된다. 다음에 당신이 영화관에 가면 얼마 뒤에 결정하는지를 시계를 보면서 검토해보라”고 그는 장담한다. 꼭 10분은 아니더라도 여하간 블록버스터 지지자들은 인내심이 그리 많지 않다. 블록버스터는 초반에 관객의 눈과 심리를 ‘낚아야’ 한다. 희대의 블록버스터 007 시리즈의 그 오랜 장수 비결이 초반 힘주기에 있다고 하면 과장일까? 사실 <디파티드>는 전체적으로 볼 때 실망스러운 플롯 투성이다. 그런데 신들린 듯한 초반 몇분의 도입부만큼은 잊기 힘들다. <미션 임파서블>의 첫신은 또 어떠한가? 그건 큰 이야기 안에 들어 있는 작은 이야기이며 거부하기 힘들 만큼 신선한 애피타이저다.

3. 흥미로운 조연과 적을 가져라!

요즘 나온 블록버스터영화 중 이 분야의 선두주자라면 <슈렉>이 아닐까? 그에게 누가 있는가? 슈렉이 사랑한 변칙 공주 피오나 그리고 말 많은 친구 동키가 있다. 낮에는 미인이고 밤에는 흉물인 반인반괴의 공주. “나 노래 불러도 돼? 노래 불러도 돼?” 하며 쫓아다니는 이 나사 빠진 당나귀. 그러고보니 2편에서는 누가 나왔던가? 악당의 눈초리로 등장하였으나 동정의 눈빛으로 관객을 휘어잡은 장화 신은 고양이.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를 놓고 슈렉과 싸우던 반 토막 영주 파콰드. “대립의 원칙-주인공과 주인공의 이야기를 지적으로 흥미진진하고 감정적으로 흡인력 있도록 만드는 것은 오로지 적대 세력의 역할이다”라고 로버트 맥기(<어댑테이션>에서 쌍둥이 각본가 형제들이 숭상해 마지않았던 바로 그 유명한 스토리 분석가)는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에서 말했는데, 여기에 흥미로운 조연의 자리를 덧붙여도 될 것 같다.

4. 주인공을 위험에 빠뜨려라!

그러니까 우리는 학창 시절 배운 바 있다.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 이 정석대로 흐를 때 주인공은 위험에 빠지고 서사는 진전한다. 물론 믿기지 않겠지만 사건이 없는 영화들도 있다. 하지만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영화는 없다. 적어도 이 계통에서 이 말은 신앙이다. 하지만 블록버스터라고 하여 다 흥미로운 사건들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고질라가 미국 한복판을 헤매고 다닐 때 우리는 단 한번도 흥분한 적이 없지 않은가. 대신 <미션 임파서블>의 주인공 이단 헌트가 모략으로 위험에 빠져 좌충우돌할 때 우리의 말초신경이 근질거린다.

5. 주제의식을 가져라!

비록 그 주제란 것이 대개 신통치 않은 내용들이기는 해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각본이 신중하게 주제를 모색하고 있다는 점 자체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무엇이건 주제가 있어야 등장인물과 사건과 플롯이 순조롭게 풀리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심층적인 주제의식을 들여와 마침내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린 예가 있다면 스티븐 스필버그다. 그의 영화 각본을 썼던 데이비드 코엡과 에릭 로스의 <우주전쟁>과 <뮌헨>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주전쟁>이 미국의 근과거에 대한 주석이라면, <뮌헨>은 유럽의 먼 과거에 대한 애도다.

6. 현실을 벗어나라!

이 말은 황당무계해져라, 혹은 주인공이여 기적을 행하라, 혹은 영화여 논리적 결함을 두려워마라 쯤으로 바꿔 말해도 좋겠다. 여름 시즌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찾아오는 이유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해변의 모래밭과 파도, 산의 솔바람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여름철 피서용으로 고다르의 영화를 보지는 않는다(못한다). 리얼리티 너머의 상상적 주인공과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 블록버스터의 몫이다. 슈퍼맨이 지구를 돌아 거꾸로 시간을 돌린 그 황당함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요즘은 여름철이 아니더라도 크리스마스 시즌마다 빗자루를 들고 이곳을 찾는 아이들(이라기보다는 너무 커서 좀 징그러워진 청소년들)이 있다. 아이들을 위해 써낸 소설을 어른이 영화로 만드니 어른들이 더 재미있게 본다. <해리 포터> 시리즈가 전해주는 바, 어른들이여 지금 이 순간 자신을 마술 빗자루를 탄 소년 소녀로 착각해도 괜찮다는 뜻이다.

7. 전통 장르의 규칙을 무시하지 마라!

“당신이 쓰고 있는 장르의 영화들을 봤다고 해서 그 장르를 잘 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베토벤의 교향곡을 9번까지 다 들었으니까 이제는 교향곡을 작곡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실수다”라고 맥기는 썼다. 물론 노련한 블록버스터 각본가들이라면 듣는 것으로만 교향곡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철저하게 옛 장르의 규칙을 배우고 존중하고 변주하며 써먹는다. “실제로 장르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지름길이다. 지름길을 앎으로써 작가는 자유롭게 개별 작품과 관련된 장르의 다양한 측면들을 탐구할 수 있게 된다”라고 <얼터너티브 시나리오: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들은 요즘 어떻게 쓸까?>의 저자 켄 댄시거, 제프 러시는 말한다. 그런 점에서 아무래도 <슈렉>은 스크루볼코미디의 숨겨진 외전인 것 같다. “주인공은 고독한 남성이다, 그는 자신의 고독이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여성을 찾는다, 이 장르가 보여주는 공격성은 유머의 원천이다.” 켄 댄시거와 제프 러시가 말한 스크루볼코미디 장르의 특징이다. 왠지 심하게 비튼 외전 같지 않은가.

8. 명대사를 빠뜨리지 마라!

“I’m Your Father.” 다스 베이더가 코고는 듯한 음성으로 이 한마디를 던졌을 때 <스타워즈>는 영화사의 신화가 됐다. 혹은 무표정의 전사 <터미네이터>가 던진 “I’ll Be Back”은 시대를 풍미한 유행어가 됐다. 이 한마디를 듣기 위해 극장을 내 집처럼 찾은 추종자들이 있음을 어떻게 잊겠는가(여기에 관해서는 뒷장을 참조하시기를).

9. CG는 이야기에 복속시켜라!

가장 멍청한 블록버스터가 강대한 CG에 초라한 이야기를 가진 부류다. CG의 기술이 문제가 아니라 그 기술이 어떻게 이야기에 부합하는지가 관건이다. <포레스트 검프>는 완벽하게 그에 대한 모범 선례다. 사실 <포레스트 검프>의 장면들이 우디 앨런의 <젤리그>를 본뜬 게 아닐까 의심되긴 하지만 여하간 흥겹다. <우주전쟁>은 또 어떠한가. 당신이 한밤중 심야 영화관에서 나와 인적없는 골목길을 걷는다면 금방이라도 영화 속 외계 생물체가 엄습할 것만 같은 느낌을 받을지 모른다. 그건 훌륭한 CG 때문이 아니라 그걸 떠안고 있는 이야기의 힘 때문이다.

10. 가장 오래된 법칙을 깨지 마라!

할리우드의 가장 고전적 법칙은 영화가 환영이라는 것이고 그 환영이 오락을 위한 것일 때는 즐기라는 것이다. 특히 블록버스터에서 주인공은 영원히 죽지 않고 환영의 향수로 남는 엔딩 바깥의 무엇이 된다. 블록버스터에 유독 시리즈가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시나리오를 시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결말을 아는 것이다. 당신 시나리오의 결말을 결정하라. 그리고 나서 시작을 꾸며라”라고 사이드 필드는 말한다. 함부로 주인공을 죽이겠다고 결말을 결정하는 블록버스터 각본가는 흔치 않을 것이다(<디파티드>는 원작이 있고, 마틴 스코시즈의 영화임을 고려할 때 제외하기로 하고).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의 주인공 잭이 매번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시리즈를 이어갈 때 이 오래된 법칙은 당연히 떠오른다.

글: 씨네21 정한석 mapping@cine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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