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전8기 8전9기
아픔없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없을 것이다. 진통시간이 너무 길어 지켜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민용 감독과 임종재 감독이 대표적인 예. 95년 <개같은 날의 오후>로 데뷔한 이민용 감독은 88년 말부터 데뷔를 준비했다. 한 여자가 강간당할 위기에서 가해자의 혀를 물어 뜯은 사건을 소재로 시나리오를 준비했으나 곧 개봉할 쥬디 포스터 주연의 <피고인>이 비슷한 내용이어서 포기했다. 89년엔 성일시네마트에서 청소년용 영화를 준비했으나 제작사가 돈을 마련하지 못해 그만뒀고 94년까지 몇차례 이런 과정을 더 겪은 뒤 94년 후배로부터 <개같은 날의 오후>의 아이디어를 얻게됐다.

영화아카데미 1기 출신인 임종재 감독도 90년 삼호필름에서 해직교사의 이야기를 다룬 <지금은 묻어둔 그리움>을 준비했지만 91년 초 첫 촬영을 끝내자마자 제작사 사정으로 그만뒀다. 송능한 감독이 시나리오를 쓴 <58년 개띠>도 돈줄을 잡지 못해 포기했다가 96년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었다.

<넘버.3>의 송능한 감독과 <초록물고기>의 이창동 감독은 충무로 경력만 보면 쉽게 데뷔한 셈이지만 만만찮은 어려움을 겪었다. 송능한 감독은 시나리오 작가를 인정하지 않는 풍토를 참을 수 없어 감독의 길로 나섰고 이창동 감독은 소설가에서 전업했다. 두사람 모두 대기업으로부터 찬밥대접을 받았지만 시나리오를 인정한 프로듀서, 배우, 스텝이 의기투합해 영화를 완성했다.

따지고 보면 우여곡절없이 나온 영화란 없다. 흔히 영화를 완성하느냐 못하느냐가 제작비 문제로 결정된다고 생각하지만 배우를 구하지 못해 중도하차하거나 때를 놓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육상효 감독의 <연애편지>가 송승헌 캐스팅 불발로 그쳐 무산된 것이나 <처녀들의 저녁식사>를 만든 임상수 감독이 <나쁜 잠>이란 영화를 기획했다가 <나쁜 영화>가 먼저 나오는 바람에 포기한 것이 예.

감독에겐 재능과 함께 운도 따라줘야 하며 무엇보다 한두번의 실패에 굴하지 않는 뚝심이 필요한 법이다.

<글 : 씨네21-조종국 기자>




시나리오 공동작업


시나리오 공동작업 <쉬리> <해변으로 가다>

<쉬리> 강제규 감독은 <은행나무 침대>를 끝내고, 남성들의 총격전을 중심으로 한 액션물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 컨셉의 상태로도 발전하지 못한 강 감독의 생각은 할리우드 액션 장르에 대한 야심이었다. 강제규 감독과 박제현 전윤수 백운학(당시 영화발전소팀)은 1년 반에 걸쳐 <대국전>이라는 시나리오를 썼다. 남북의 특공대와 첩보원이 충돌한다는 내용이었고, 이 구도는 이후 <쉬리>의 모태가 된다. 1년반동안 만든 시나리오였지만, 내부 모니터링 결과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그래서 1년 6개월의 성과물을 그 자리에서 엎었고, 다시 처음의 생각 (남성 액션을 만들겠다는 강제규 감독의 생각)으로 돌아갔다.

다시 시나리오 작업이 시작되었고, <쉬리>의 시나리오가 나오기까지 1년의 시간이 더 걸렸다.(98년 초 탈고) <대국전>까지 합치면 2년 6개월이란 시간을 시나리오 작업에 투자한 셈이다. 이 시나리오를 갖고 강제규 감독이 촬영 전까지 수정을 계속했다.

팀 작업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처음 몇 달은 모여서 계속 말로 아이디어를 내는 작업을 한다. 여성 공작원 캐릭터를 만들면 어떨까? 그 여자가 성형수술을 하고 남파된다면 어떨까? 등등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어느 정도 합의에 이르렀을 때, 강제규 감독을 제외한 나머지 세명의 팀원이 각자 시나리오를 썼다. 구두로 합의했다고는 하지만, 같은 내용으로 시나리오를 써도 각자의 개성과 자기 생각들이 많이 묻어나기 마련이다. 강제규 감독은 세 개의 시나리오를 취합해 각 시나리오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하나의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이런 과정의 장점은 각자의 생각을 합칠 수 있다는 거지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다. 시나리오 사전 조사 기간에는 미국이나 러시아에 가서 자료를 모았다. 캐스팅이나 투자자 물색은, 세 편의 시나리오를 취합한 후 모니터링을 거쳐 퇴고할 당시, 이루어졌다.

<스크린 : 김형석 기자>


<해변으로 가다> 쿠 앤 필름의 차기작 <해변으로 가다>(김인수 감독)는 전형적인 공동 작가 시스템의 사례를 잘 보여준다. 컨셉은 쿠 앤 필름의 구본한 대표가 내놓았다. 구본한 대표는 한 초상집에서 강우석 감독에게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스플레터 무비'라는 컨셉을 애기했고 강우석 감독은 재미있겠다며 시나리오 작업을 추진하라고 했다.

영화사는 5명의 작가(심혜원 박미영 손광수 백승재 노진수)를 모아놓고 컨셉을 던져줬다. 다섯명의 작가들은 이 컨셉을 갖고 각종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작업을 거쳐 각자 시놉시스를 내놓았다. 작가들은 영화의 배경을 병원, 섬, 결혼식장 등으로 설정하는 등 다양한 시놉시스를 내놓았고 토론 끝에 '해변을 배경으로 한 섹시하고 무서운 스플래터 무비'라는 최종안을 확정했다. 초고는 거의 메인 작가인 심혜원 작가가 썼는데 장면에 따라 다른 작가들이 참여해 각자의 장기를 발휘하기도 했다. 5개월만에 초고가 나온 후 2고부터는 김인수 감독과 심혜원 작가가 수정 작업을 했다.

쿠 앤 필름이 공동 작업을 하기로 한 결정적인 이유는 장르 때문이었다. 충무로에는 아직까지 이런 류의 영화가 없었고 검증된 작가도 없었기 때문에 젊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가진 다양한 작가들이 필요했다. 작가들의 나이는 26-31세까지 다양했다. 출신도 다양했다. 심혜원 작가를 제외하곤 정식으로 시나리오 작업을 했던 사람이 없었다. <텔 미 썸딩>때 무작정 시나리오를 들고 영화사를 찾아왔던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마추어 뮤직비디오를 찍던 사람, 쿠 앤 필름에서 허드랫일을 했던 사람 등 다양했다. 초고를 쓴 심혜원 작가는 "서로 모르는 많은 사람이 작업하다 보니 처음에는 시행착오를 격었지만 젊은 사람들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모으고 시나리오의 결함은 줄인다는 점에서 장점이 많았다. 결과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스크린 : 정기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