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 시절 상금을 타기 위해 써 내려간 <슬픔에 찬 성모는 서 있었다>가 1991년 영화진흥공사 시나리오 공모에 가작으로 입상하면서 시작된 그의 작가 생활은 그런대로 순탄했다. 두번째 시나리오 <얼음 물고기>(1999년 <송어>로 영화화)가 1994년 같은 공모전에서 당선이 되었고, 그에게 많은 작업 의뢰가 들어왔다. 연출을 하겠다는 생각을 마음 한구석에 묻어둔 채, “옛다, 이거 받아 먹어라”라는 식으로 시나리오를 쓴 지 3년째 되던 1996년, 당시 함께 일하던 김유진 감독은 그가 써온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김작가도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입에서는 자꾸 변명이 흘러나왔다. 김감독은 조용히 돌아서면서 “그거 좋은 시나리오 아니네”라고 말했는데 김작가는 그 말이 “깡패 열 명에게 두들겨 맞은 것보다 충격이었다”고 회상한다.

“정말 부끄러웠다. 나를 더 혼내셨어야 했는데. 감독님께는 너무나 중요한 시기였는데, 내가 그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한 것이 마음 아팠다. 시나리오로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그때 직업적으로 반성을 많이 했다.” 김작가는 그 이후로 ‘작가’라는 자각을 갖고 열심히, 열심히 시나리오를 썼다. 그리하여 그의 대표작 <정사>가 탄생했다.

못질 없이 짜맞춘 가구처럼 단단한 구조, 예리하게 파고들어가는 캐릭터의 심리, 장면화에 유리한 풍부한 시각적 단서, 무엇보다 영화의 호흡에 가까운 그의 시나리오는 특히 멜로드라마에서 빛을 발한다. “작가의 호흡에 꽉 갇혀 있어서 각색을 하기 어렵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하지만 자유자재로 변형 가능한 시나리오는 '강펀치'가 안 나오질 않나?” 그는 그 강펀치를 관객에게 직접 날리기 위해 신작 <유혹의 기술>을 연출할 예정이다. 이제 혼자서 지옥에 갈 필요는 없지만 모두를 천국으로 이끌어야 하는 책임이 주어졌다.

베스트 시나리오 : 르네 클레망, 폴 게파프 <태양은 가득히>(1960)

1996년 무렵 영화 교제로 쓸 영화를 찾다 다시 보게 됐다. 좋은 시나리오에 들어가야 할 모든 요소가 다 들어 있었다. 가장 좋았던 점은 주인공 리플리의 욕망이 드라마의 원동력이 된다는 점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능력이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상류층이 될 수 없는 리플리의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다. 이런 캐릭터를 만드는 게 쉽지가 않다. 재미나 구성 면에서 두루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필모그래피 <사랑하고 싶은 여자, 결혼하고 싶은 여자> <해적> <결혼 이야기 2> <용병 이반> <정사> <송어> <반칙왕>(원안) <로드무비>(각색) <스캔들> <유혹의 기술>

FILM 2.0 글-한승희 / 사진-김선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