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란> <블루>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라이방> <굳세어라 금순아> <블루> 등에 출연한 단골 조연 배우인 김해곤 작가는 지금 충무로에 만연한 시나리오에 대한 편견과 아집을 맹공중이다. "좋은 시나리오가 꼭 지문도 많고 화려한 건 아니다. 하지만 요즘은 꼭 시나리오를 투자자들한테 보여줄 포트폴리오처럼 취급하는 거다. 그러니 영상에서 볼 때 하나도 필요 없는 과잉 친절을 시나리오 작가들한테 요구하고, 결국 시나리오 작가들은 관객이 아니라 마케팅 담당자나 투자자를 상대로 글을 쓰게 되는 거죠." 그의 울분은 대단히 논리적이다. "한 해 망하는 영화가 전체 영화의 79%라고 한다. 그럼 그 79%가 왜 망했나? 시나리오가 못나서? 아니다. 두 가지 요인이 있다. 못 쓰고, 못 읽고. 그런데 내가 보면 못 읽은 게 더 커. <친구> 시나리오를 봐. 그렇게 좋은 시나리오가 2년이나 투자자를 못 잡았어. 못난 시나리오도 투자자와 배만 맞으면 영화로 만들어졌다가 수억 원 까먹는 게 지금 프로세스야. 어떨 때는 다 알면서도 망하는 영화가 나오는 게 그래서라니까."

사실 이건, 남 얘기가 아니다. 김해곤 작가 자신이 직접 겪은 이야기인 것이다. "작업하면서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시나리오는 벽돌 쌓기 같다. 하나라도 빼면 무너지지.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 요즘 자주 느끼는 건데 시나리오 작가를 건전지처럼 본다. 소모되면 다시 갈아 끼우면 된다고 보거든." 김해곤 작가는 요즘 자주 <파이란>을 기억한다. "시나리오 작가인 나와 송해성 감독, 안상훈 프로듀서, 주연배우 최민식씨까지 혼혈 일체가 됐던 작업이었다. 시나리오는 자기 팔자를 타고 나는데, 쓰여진 뒤 누구를 만나고 어떻게 발전돼 나가는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파이란>은 기가 막혔지."

그는 지금 <조선의 주먹>과 <바람의 파이터> 시나리오 작업에 한창이다. 그러나 김작가는 내심 다른 꿍꿍이가 있다. "솔직히 요즘, 시나리오 쓰는 데 흥미를 많이 잃었다. 이젠 관객을 직접 만나고 싶다. 꼭 연출해 보고 싶은 자작 시나리오가 한 편 있다. <보고 싶은 얼굴>이란 건데, 웃기면서도 살아가는 진심이 있는 시나리오야. 늘 하고 싶고 쓰고 싶고 만들고 싶은 게 그런 영화다. 한번 만들어볼까?” 정말 만들지 두고 볼일이다.

베스트 시나리오 : 로베르토 베니니 <인생은 아름다워>(1998)

이런 게 늘 내가 하고 싶은 영화다. 웃음이 먼저가 아니다. 삶에 배어 있는 진심 어린 웃음이 있어야 한다. 게다가 웃음은 타이밍이다. 1초 먼저냐, 늦느냐에 따라 관객은 웃기도 하고 무표정하기도 하다. 그게 참 재미있다. 난 코미디가 체질이다. 배우까지 겸하니까 그 호흡이 몸으로 느껴진다.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나 우디 앨런의 코미디를 보면 그 기가 막힌 타이밍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필모그래피 <파이란> <블루> <이것이 법이다>(각색), <청풍명월>(각색), <조선의 주먹>

FILM 2.0 글-신기주 / 사진-이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