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연출부로 충무로에 발을 들인 지 어언 14년. 박작가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너에게 나를 보낸다> <꼬리치는 남자> <체인지>에서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며 연출부로 일했고,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에서는 크레딧에 '각색'으로 이름을 한 번 더 올렸다. 이때 글 좀 쓴다는 평가를 받은 이후 그는 감독이 되는 길 가운데 하나로 시나리오 작가의 길을 선택했다. <마지막 방위> <키스할까요> <산책> 등을 거쳐 어깨에 힘을 빼고 쓴 <주유소 습격 사건>에서 비로소 흥행 작가가 됐다. 시나리오 작가 경력 10년 동안 그는 15편의 시나리오를 썼다. 그동안 쓰다가 엎어진 작품은 단 한편도 없고, 슬럼프로 인해 쉰 기간도 없다. 그만큼 치열하게 살았다는 뜻이다.

<주유소 습격 사건> 이후 그의 시나리오는 코미디영화 시나리오의 고유 브랜드로 자리잡았다. 주유소를 습격한 4인조, 라이터 하나에 목숨 거는 남자, 교도소를 탈옥했다가 광복절 특사로 석방되기 위해 교도소로 돌아오는 죄수 등등 박정우가 만든 인물들과 이야기는 모두 '쌈마이'의 인생과 정서를 대변한다. 그 때문에 "시나리오에 깊이가 없다, 삼류다" 라는 소리를 종종 듣지만 그는 오히려 "맞다. 내가 사는 방식이 삼류니까"라는 덤덤한 반응이다. "아는 것만 쓰고 모르는 건 안 쓴다. 최소한 모르는 걸 아는 척하며 사기 치지는 않았다"는 자신감 때문이다.

박정우 작가는 시네마서비스 이사였던 지미향 대표와 함께 2002년 영화사 '필름매니아'를 설립하고 감독 데뷔 준비를 시작했다. 데뷔작 <간다>의 시나리오를 쓰다가 잘 풀리지 않아 작업을 잠시 중단했고, 지금은 블랙 코미디 한 편의 시나리오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박작가'에서 '박감독'으로 호칭이 바뀐 후 그가 더욱 뼈저리게 느낀 것은 시나리오의 소중함이다. "제대로 된 시나리오 없이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없다"는 진리를 새삼 깨달은 것이다. 남의 것 써주던 시절보다 백배는 더 어려운 작업이지만 그래도 그는 즐겁다. "한 편을 만들고 사라지더라도 감독이 되겠다'는 열망이 결실을 맺는 날까지 방구석에서 얼마 전 태어난 아들와 함께 열심히 구르며 고민할 작정이다.

베스트 시나리오 : 구본한 <공공의 적> 초고(2001)

국내외를 막론하고 다른 사람의 시나리오를 잘 안 본다. "이그, 또 잘난 체!" 라고 해도 할 말은 없지만 하여간 그렇다. 남의 시나리오를 보고 잘 썼다고 부러워하는 일도 좀처럼 없다. 그런데 강우석 감독이 보라고 던져주었던 <공공의 적> '초고'를 읽고 충격을 받았다. 그때까지 본 시나리오 가운데에서 가장 훌륭한 '말발'을 구사하고 있었다. 뭔가 될 만하다는 걸 직감했다. 다른 사람의 작업이 부럽다고 생각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필모그래피 <마지막 방위> <키스할까요> <주유소 습격 사건> <신라의 달밤> <선물> <라이터를 켜라> <광복절 특사>

FILM 2.0 글-김혜선 / 사진-김선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