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꾼들에게는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소재다. <호로비츠를 위하여> <헨젤과 그레텔>의 김민숙 작가에게는 천재성을 가진 조카가 있었기 때문에 <호로비츠를 위하여>가 탄생할 수 있었다. 올해 대종상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가족의 탄생>의 성기영 작가는 심지어 꿈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고 한다. 좋은 이야기를 찾아 떠나는 것은 창작자인 작가들에게는 피부로 접하는 일이자 눈 만 뜨면 시작되는 가장 큰 고민이다.

작가들의 성향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다르지만, 제작사의 기획 아이템과 본인의 오리지널 시나리오 가운데 선택하는 것은 이야기꾼인 대부분의 작가들이 맞닥뜨리는 문제다. 각색 작품인 <미녀는 괴로워>와 <싱글즈>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노혜영 작가 앞에는 현재, 소설 두 편의 각색과 내년에 들어갈 기획 드라마 1편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꾼으로서 오리지널 시나리오에 대한 욕망이 없을 수는 없는 법. 그 바쁜 와중에도 60~70년대를 배경으로 역경을 딛고 성공한 여자 가수를 그리는 따뜻한 이야기를 구상 중이다. 반면 김태용 감독과 함께 <가족의 탄생>을 썼던 성기영 작가는 “일을 해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기획을 맡는 것보다 오리지널 각본 작업이 편하다”고 말한다. 일본 원작 영화 한 편과 또 다른 기획으로 이계벽 감독과 작업하고 있는 <원탁의 천사> '안녕, 프란체스카'의 신정구 작가는 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오리지널 작품보다 기획이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좋은 결과를 얻은 경우도 많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자기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경제적인 문제와 심리적인 두려움이 따르기 때문에, 좋은 이야깃감이 머릿속에 있어도 각색 제의가 들어오면 미뤄둔다”는 김민숙 작가의 말은 재밌는 이야기가 자취를 감춘 현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

모든 유행에는 일정한 흐름이 있기 마련이다. 최근 젊은 시나리오 작가들 사이에서도 어떤 경향이 엿보인다. 성기영 작가는 “<가족의 탄생> 작업할 때부터 주위를 보니까 앙상블 영화들이 많이 기획되고 있다”고 한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많은 배우들이 등장하는 이런 유의 영화는 거의 기획되지 않았다. 그 뒤를 이어 최신 떠오르고 있는 코드는 판타지다. 성 작가는 “최근 여기저기서 기획되는 영화들을 보면 판타지 기호가 들어가 있다”며 “현재 <가족의 탄생>의 김태용 감독과 함께 준비하는 작품도 서로 다른 세계와 시공간을 살아가는 남녀의 이야기”라고 밝혔다. 또 뮤지컬영화들의 활발한 기획도 눈에 띈다고 덧붙인다. 신정구 작가는 “아직 시작 단계이긴 하지만 장르마다 세분화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며 조심스레 진단했다. “이는 한국영화를 볼 때 고무적인 상황으로, 각 장르마다 전통이 굳건해야 더욱 다양한 이야깃거리들이 나올 수 있는 자양분이 생긴다”고 말했다. 최근 한 영화사와 계약을 맺은 신인 유영재 작가 역시 흥미로운 경향을 귀띔한다. 그는 “주변의 젊은 작가들이 슈퍼 히어로물이나 좀비물을 굉장히 많이 쓴다”면서, “현재 이런 작품들이 시나리오 개발 단계인 만큼 4~5년 후에는 이런 유의 영화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올 것”이라는 추측을 내놓았다.

어찌 보면 이는 지금 영화계가 어렵기 때문에 나오는 특이한 현상이다. 과거 작가들은 충무로에서 영화화가 안 될 것 같은 소재는 아예 다룰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요즘은 어차피 어려우니까 되든 말든 평소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쓴다”는 것이다. 최근 장르영화나 소설들이 점차 각광을 받고 있는 점에 비춰보면, 몇 년 후 한국산 프랜차이즈 슈퍼히어로를 만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법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런 다양한 상상력을 품은 이야기가 앞으로 지속적으로 나오고, 또 영화로 만나기 위해서는 작가 처우 개선과 시나리오 보호를 위한 제도적인 장치가 절실하다. 현재 영화계는 방송계에 비해 집필료가 적은 편이고, 작가보다는 감독 의존도가 훨씬 높은 편이다. 방송 쪽은 방송작가협회라는 권익단체가 제도화돼서 많은 혜택이 보장되는 데 반해 영화계의 경우 아직 요원하다. 뿔뿔이 흩어져 있는 영화계 이야기꾼들이 스스로의 권익을 보호할 적극적인 움직임이 요구되는 지점이다.

[Film2.0 글 김교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