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최고의 '명문' 영화인력시장
-개성있는 감독들 키워낸 뉴욕대 티시예술대학

뉴욕에서 영화공부를 해보겠다고 건너온 지 3년 남짓. 그동안 나를 찾아온 친구마다 뉴욕은 며칠간의 관광으로 지나치기에는 아쉬운 도시라고 한마디씩 남기고 갔다. 지그시 눌러붙어 흥청대는 문화예술을 요모조모 살펴볼 만하고 빌리지의 밤거리만 어슬렁대도 예술적인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도시라는 뜻일 게다. 그러나 막상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칫 게으름을 피웠다가는 파산하기 십상인 긴장된 뉴욕생활에 진저리를 친다. 자기 코가 깨져도 아무도 탓할 수 없는 이 묘한 '자유'와 한발짝 앞에 '성공'이 영원히 서성거리는 듯한 분위기는 아무리 미워도 뉴욕을 떠날 수 없게 만든다.

뉴욕에 대해 이런 인상을 품게 된 것은 뉴욕대(N.Y.U-New York University)를 보면 가장 잘 이해가 갈 것이다. 캠퍼스 담장도 없이 워싱턴 광장 주변의 길거리에 제멋대로 퍼져 있는 대학 건물들. 그럼에도 건물마다 꽂혀 있는 보라색 학교 깃발들은 일류 사립대의 이미지 만들기에 분주한 뉴욕대의 노력에 부응하듯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매운 바람에 쉴 새 없이 펄럭인다. 지가 뽑은 미국대학 순위에서 영화학과 1위를 차지. '마틴 스콜세지, 올리버 스톤, 짐 자무시, 스파이크 리 등을 배출한 학교.' 이른바 '최고'와 '개성있는 영화작가'는 기업홍보물처럼 잘 포장된 뉴욕대 홍보물에 등장하는 단골메뉴들이다. 최고에 대한 갈망은 뉴욕대가 내세우는 최대 상품인데 그 저변에는 집약생산의 알뜰한 정신이 깃들어 있다.

영화관련학과가 소속된 뉴욕대 티시예술학교는 영화와 관련된 모든 것을 학교 내에 제도화해 놨다고 할 만하다. 영화 및 텔레비전과 학부와 대학원, 이론을 전공하는 영화학과(학부 대학원 포함) 등의 3개 학과(영화 제작 학부와 대학원은 각각 다른 학과장 지휘 아래 분리 운영되므로 별개의 학과라고 하겠다)뿐 아니라 극작과, 쌍방향 텔레비전과(라디오, 텔레비전, 광고, 멀티미디어 제작분야)도 설치되어 있다. 이론상으로는 이들 각 분야가 수업에서 넘나들면서 전문인력의 그물망을 학교에서부터 형성하게끔 하는 환경이다. 학교게시판은 '카메라맨 구함', '배우 구함' 등 학내외에서 들어오는 각종 메모로 늘 빈틈이 없다.

'최대'의 수용규모는 뉴욕대의 '최고'전략을 지탱한다. 비좁은 건물 한채에 미로처럼 들어선 티시예술학교는 전세계 영화인력과 정보가 모여드는 브로드웨이의 영화시장이라고 할 만하다. 3개 영화관련학과의 총학생수는 2천여명, 그중 영화제작 전문인력으로 배출되는 대학원생만 3백여명에 이른다. 할리우드, 독립영화계, 혹은 공영방송의 다채로운 경력을 단 전임강사급 이상의 교수진만 1백여명, 편집실, 60여개를 포함한 제작시설 3개층, 필름으로 보관하고 있는 기성영화자료 2천여편을 비롯한 영화자료실 등이 뉴욕대의 교육자원이다.

<다이하드 3>이나 <나 홀로 집에> 같은 대작영화에서 밀레니움,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의 실험영화에 이르기까지 뉴욕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영상활동도 이 브로드웨이 인력시장을 손짓한다. 뉴욕대는 도시의 문화적 환경을 활용, 마틴 스콜세지, 알렉 볼드윈 등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기성 감독과 연기인들을 초청해서 학생들을 지도하게 하는 특별강좌도 열고 있다. 학생들이 만드는 영화가 연간 2천5백편이 넘고 이들 작품들은 뉴욕대가 개최하는 연례 견본시장인 '퍼스트 필름 페스티벌'에 전시된다. 여기에서 수상한 학생들은 할리우드를 비롯한 미국 내 대소 영화사들과 연결되기 쉽다. 기회가 없어서 영화를 못 만든다는 말은 뉴욕대의 이런 윤기 흐르는 이미지 앞에 초라해진다.

'풍부한 기회'는 미국의 국가적 이념이자 뉴욕의 이미지이기도 하지만 뉴욕대가 제공하는 기회가 통념처럼 자유와 평등으로 넘치기만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은 이민자와 소수인종에 대한 혜택을 대폭 삭감하고 저소득층을 위한 공립대학 예산도 싹둑 잘라 뉴욕시립대 임직원 전원이 가두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시립대와 주립대들은 아직까지는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열어놓는 편이지만 뉴욕대와 같은 사립대는 경제적 특권층 지대이다. 영화(제작)과 등록금은 1년에 약 1천6백만원으로 공립대 등록금의 4~5배에 이르므로 타지에서 온 유학생 한 사람이 4년제 학부 또는 3년제 영화제작 대학원을 졸업하려면 바퀴벌레와 머리를 맞대고 궁핍하게 살아도 생활비를 포함해 최저 1억2천만원은 들여야 한다.

자유의 이미지도 그렇다. 분업화, 체계화된 기업구조에서 사회적 통념을 담아내는 견고한 할리우드의 제도적 통제에서 벗어나 창작자의 감수성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이를 유통시킨다는 뜻이 미국 독립영화제도에 스며 있다고 할 때, 독립영화의 산실로서 뉴욕대를 취재하겠다며 서울에서 문의해올 때마다 나는 적이 당황하곤 한다. 뉴욕대와 독립영화를 연관짓는 증거로 뉴욕대를 졸업한 영화감독 스파이크 리나 짐 자무시를 들곤 하지만 이들은 티시예술학교 30년사에서 배출한 몇만명의 영화과 졸업생 중에 불과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사람들이고 독립영화를 발판삼아 이미 할리우드로 옮겨간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전문기술인으로 키워내는 것은 '명문' 뉴욕대가 보장하는 바이지만 시대를 읽어내는 예민한 작가를 꿈꾼다면 그건 당사자들이 전적으로 감당해내야 할 고통스러운 몫이다.

<글:뉴욕-남인영>

커리큘럼

티시예술대학의 교육기본 방침 7항목은 전문 예술인의 육성을 강조한다. 영화 및 텔레비전 학부의 경우, 현장감각을 쌓게 한다는 실제적인 교육방침은 경쟁과 협력, 치밀한 시간설계의 요령을 요구하는 교과구조에서 드러난다.

학생들이 단기간 내에 독립적으로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을 습득, 배양하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촬영과의 졸업생이 현장에 투입됐을 경우 곧 수석 조수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교육시킨다.

학부에서는 총128학점을 이수해야 하는데 이중 교양과목 48학점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영화 제작전공으로 채운다. 전공과목은 다시 영화사 및 이로 3과목 9학점 이상, 제작 20학점 이상, 시나리오 작성 8학점 이상 이수를 필수로 요구한다. 과목마다 학점이 다르지만 보통 한 과목이 3~4학점으로 구성된다.

이론과목들로는 주로 영화언어의 문법, 할리우드영화사, 다큐멘터리사, 미국텔레비전사 등이 개설돼 있다. 주로 '정통' 영화이론, 영화/텔레비전사들이고 수업시간은 보통 3~4시간으로 영화상영과 강의로 구성된다. 초기 영화언어의 성립을 볼 수 있는 '무성영화 스크린'의 경우 한학기에 유럽과 미국의 영화 50여편을 보기도 한다. 제작과정 과목들은 세심하게 단계별로 짜여있다. 가장 먼저 제공되는 필수과목은 '프레임과 시퀀스', '사운드 이미지'등이다. '프레임과 시퀀스'는 강의를 통해 카메라의 기본원리, 심도, 노출, 색깔, 구성 등을 강의하고 학생들은 스틸 카메라로 과제를 제작한다. '사운드 이미지'에서는 이미지에 걸맞은 소리를 만드는 법을 배운다. 소리의 채집에서부터 다중 트랙을 이용한 녹음기술 습득, 최종적으로 라디오극의 구성으로 끝나는 이 과목은 녹음기술과 효과에 따른 강의, 학생들의 과제물발표와 평가 등으로 구성된다. 단계별로 모두 9개의 과제물을 제출하니 거의 매주 하나씩 만들어야 하는 셈이다.

이미지와 사운드라는 영화의 재질에 익숙해지면 초보제작 과정으로 들어간다. 교수마다 수업 운영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인기높은 배스킨 교수의 '사이트 앤드 사운드 필름' 과목에서는 16mm 흑백필름을 사용하여 한 학기에 학생당 5개의 영화를 만든다. 다른 학생들의 영화촬영이나 조명, 배우도 맡아야 하므로 한 학기에 참여하는 영화로 치면 수십편이다.

기본 제작과정뿐 아니라 연출, 연기, 촬영, 조명, 편집, 각본 등 영화와 텔레비전 제작의 각 분야와 실험영화, 다큐멘타리, 또는 퍼블릭 엑세스(public access) 프로그램 제작 등 특정 장르를 과목으로 만들어 놓기도 한다. 한 학기에 개설되는 과목수는 학부만 70여개.

3년제 대학원도 108학점을 이수하고 졸업작품을 내야 예술학석사(MFA)를 따게 되므로 학점수에 있어서는 학부만큼 고되고 학비도 많이 든다. 학년에 따라 흑백무성영화에서 색채유성영화까지 만들어보도록 되어 있다. 졸업작품 제작까지 포함하면 학위를 따는데 보통 4~5년 걸린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작과목도 개설하고 있는 학부와 달리 대학원은 영화제작에 집중한다.

한국학생 인터뷰 : -이건동(영화/TV과 학부생) (96년도 당시 인터뷰 내용입니다!)

학교에서 가장 힘든 점은?

수업이 너무 벅차다. 일주일에 하나씩 만들어야 하니까 프로젝트도 너무 많다. 무거운 과제와 경쟁 부담은 10여명의 다른 유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래도 이번 학기에는 신이 난다.

뉴욕대가 마음에 드는 이유는?

김:중국영화의 제작환경은 열악하다. 이런 조건에서 왜 세계적인 것이 나오는가를 배운다면 좋은 것을 배우는 거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제5세대는 세계영화계의 선두에 와 있고, 좋은 시기에 이곳에 와 있는 것 같다. 다만 너무 규격화되지 않아서...

교과과정에 체계가 없다는 의미인가?

이론보다는 실제 제작에 치중하기 때문이다. 지금 듣는 수업에서는 기본적인 표현력을 중요시한다. 필름을 많이 소비하기보다는 사전에 스토리보드를 치밀하게 짜 경제적으로 만드는 것도 평가한다. 학교제도에서 누리는 자유는 이것저것 실험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엄연히 성적표가 찍혀나오는 수업인 한 자연히 교수가 좋아하는 쪽으로 작품을 구성하게 마련이다. 내가 듣는 과목의 교수는 재미있게 만드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자꾸 그쪽으로 하게 된다. 수업에서도 스스로 터득해야 하는 일이 많다. 수업에 몰두하는 주중을 벗어나도 혼자서 영화나 책을 보며 다음 프로젝트에 써먹을 아이디어를 궁리하는 데 주말을 반납한다.

뉴욕대는 독립영화의 산실이라는 이미지가 강한데?

독립영화를 만들겠다는 학생들이 많다. 학생 개개인 모두 각본에서 촬영, 연출까지 다 거치도록 교과가 짜여 있어, 적은 예산으로 여러 역할을 제작자가 맡게 되는 독립영화를 할 준비가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