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영화 부흥의 기수
-자립적 '영화작가' 키워내는 베를린영화아카데미

1995년 11월1일 베를린의 한 야외무대에서는 영화사 1백주년 기념행사가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1895년 12월28일, 그랑카페의 인디언 살롱에서 있었던 뤼미에르의 첫번째 영화상영을 영화의 탄생으로 보는 프랑스를 비롯한 전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1백주년 행사를 12월 말로 준비하고 있을 때, 독일은 그 행사를 두달이나 앞당겨 개최한 것이다. 독일인들은 스크라단노브스키 형제가 뤼미에르보다 두달 앞선 1895년 11월1일, 빈터가르텐이라는 베를린의 한 유흥장에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영화를 상영한 날을 영화의 탄생으로 보기 때문이다.

독일 전역에 TV로 중계되고 전세계에서 활동하는 독일출신 영화인들이 함께 모인 이날의 행사는 독일의 상처받은 자존심과 과거의 자부심을 스스로에게 환기시키려는 목적에 의해 시위적으로 거행된 것이다. 독일영화는 그때의 영광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12년간의 나치 지배와 패전에 의해 세계영화의 변두리로 내몰렸던, 또한 분단의 상처를 받아야 했던 독일영화는 영화재능의 결핍이라는 만성적 휴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서독 정부는 새로운 인재의 육성을 위한 엄청난 정치적, 재정적 투자를 결정하였다. 1966년, 독일 국립 베를린영화아카데미는 히틀러의 선전상 괴벨스에 의해 모스크바와 로마에 이어 세계에서 세번째로 창립되었다.

"구태의연한 영화는 죽었고 우리는 새로운 영화의 탄생을 믿는다"라고 선언하며 오버하우젠을 중심으로 시작된 독일영화부흥운동의 기운과, 프랑스의 누벨바그운동의 영향하에서 탄생한 이 대학은 영화산업을 이끌어 나갈 산어인력의 양성이라는 과거 영화학교의 설립목적과 상반된, 산업으로부터 독립된 자립적 작가를 양성한다는 방침 아래 세워졌다.

다른 한편으로 베를린영화아카데미는 금세기 초 독일의 바이마르에 의해 설립되고, 베를린을 거쳐 전세계로 전파되었던 현대 예술의 산실 '바우하우스' 예술학교의 이념을 표방하며 설립되었다. "전인적 예술인의 양성"을 도모하기 위해 소수의 학생만을 입학시키고 이들을 대상으로 한 연출가가 가지는 기술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훈련을 학습의 기본으로 하였다.

이런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연출, 카메라, 편집, 제작 등의 분야가 각기 다른 전공 분야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이 대학 학제의 특징이다. 즉 모든 학생은 2년간의 예과 과정을 통해 영화의 모든 분야의 기술을 의무적으로 습득하게 되고, 다음 2년간의 본과 과정에서 자율적으로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전문화가 이루어 진다. 학습은 강의가 아닌 실기 위주로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워크숍은 영화의 각 기술분야와 관련하여 개최되고, 단편영화들 또한 이러한 워크숍을 통해 제작된다. 워크숍의 지도는 전세계에서 활동하는 각 분야의 현역 전문가가 맡게 되는데, 연출분야는 마이크 리, 이스트반 자보, 빔 벤더스, 장 마리 스트라웁, 리처드 리콕 등, 연기분야는 틸다 스윈톤, 마가레트 폰트로타 등, 그리고 촬영은 마이클 볼하우스, 라울 쿠타, 로비 뮐러, 월터 라실리 등이 "교수진"이다.

각각의 학생들은 매학년마다 이러한 워크숍을 통해 두세편의 영화를 제작하고, 그 밖에 졸업을 위해 의무적으로 예과 과정 중 2편, 본과 과정 중 졸업영하를 포함해서 4편의 영화를 제작해야 한다. 이 작품들은 개봉관 또는 TV를 통해 상영된다. 이렇게 하여 베를린영화아카데미는 매년 수백편의 영화를 제작하는데, 이때 학교에 고용된 네명의 제작자가 영화의 제작을 담당하고 학생들은 영화제작에 필요한 모든 최신 장비를 학교에서 제공받는다. 모든 학생에게 생활보조비로 주어지는 장학금 등을 포함하여 독일 정부는 일년에 한 학생당 약 5만마르크 (약 2천만원)을 투자하는 셈이다. 학비는 무료이다.

올해로 창립 30년이 되는 베를린 영화아카데미에 대한 이러한 엄청난 투자의 결과를 보는 눈은 상반되어 나타난다. 현재 독일영화의 방송을 이끌어가는 인재의 대다수가 베를린영화아카데미 출신이라는 것은 접어두고서도 할리우드에서 중견감독으로 활동하는 볼프강 페터슨, 데틀레프 북은 독일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에서 활동하는 이 대학 졸업생들 중 대표적으로 성공한 예이다. 베를린영화아카데미의 영화들이 학생아카데미상 등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 참가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것도 베를린영화아카데미의 성공사례에 속한다. 그러나 이 대학은 다른 영화학교에서는 볼 수 없는 적극적인 사회참여와 진보적 성향으로 독일 보수언론의 공격의 표적이 되었고, 독일 사회가 이 대학 졸업생을 바라보는 특별한 시각을 만들었다. 68년 독일 학생운동의 핵심으로 영화의 사회참여에 앞장섰던 많은 학생들 중 일부는 독일 다큐영화의 대표적 작가가 되었다. 반면 1970년 중반 도시게릴라운동에 가담하다 체포되어 단식투쟁중 세상을 뜨게 된, 즉 70년대 후반 독일 사회를 뒤흔든 독일 붉은군단 게릴라 투쟁의 기폭제가 된 홀가 마인츠는 볼프강 페터슨과 마찬가지로 이 대학을 나와 다른 길을 갔던 베를린영화아카데미의 또다른 많은 졸업생들을 대표한다. 학교의 정책과 학사일정에 대한 모든 의결에 학교, 교수, 학생이 각각 동등한 의결권을 가지고 참여하게 된 것도 당시 학생운동의 투쟁의 성과이다.

매년 1월 말과 5월 중순은 베를린영화아카데미의 입시철이다. 그해의 재정에 따라 12명에서 18명의 학생을 뽑는데 매년 전세계에서 5백여명이 지원을 한다. 이들 중 40명이 1월 말의 필기시험을 거쳐 추려지고, 이들은 5월 중순에 있는 1주일간의 실기시험을 치르게 된다. 필기시험의 내용은 영화비평쓰기, 주어진 테마에 대한 리포트, 주어진 테마를 영상매체를 통해 이야기하기, 자기소개등이다. 특이한 것은 필기시험의 방식인데, 이 대학 응시자들은 한자리에 모여 필기시험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그해의 테마를 그 전해 11월에 베를린영화아카데미에 문의하여 작성한 뒤 우편을 통해 대학으로 발송한다는 것이다. 4월 중순의 본시험은 학교에서 진행된다. 시험과목은 시나리오 쓰기, 8mm 무성영화제작, 영화비평, 연출시험 그리고 면담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모든 시험은 독일어로 실시되고 나이 제한은 30세로 되어 있다. 매년 최종적으로 입학이 허가된 그 해의 신입생 중 반은 외국인이고 반은 여학생들이 뽑히는 것 또한 68년 학생 운동이 남긴 베를린영화아카데미의 입시전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학에 재학중인 아시아인은 한국계 재미동포 한명과 필자 등 2인이며, 현재까지의 아시아인 학생은 중국 북경영화아카데미에서 편입해왔던 중국인 졸업생 한명을 포함한 세명이 전부이다.

독일은 과거 독일영화의 영광을 되찾고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노력을 쏟았고 이러한 모습은 베를린영화아카데미를 통한 영화 재능육성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열매는 만족할 만하지 않다. 풍년은 토양의 질과 때맞춰 내리는 비와 쨍쨍 내려쬐는 태양 등 운이 따라주어야 한다. 예술적 재능이 교육을 통해 과연 육성될 수 있을까? 2백년 전 독일인 칸트는 이 질문에 부정적인 대답을 했다.

아무튼 베를린 영화아카데미는 2000년대 베를린 중심부에 자리잡은 소니센터의 독일필름하우스에 독일영상자료원과 함께 입주할 예정이다.

<글:베를린-황철민 : 60년생. 중대 독문과 중퇴. 동서영화연구회 동인. 10편의 중단편 극 다큐멘터리 제작. 베를린자유대학 영화학 박사과정 수료. 1990년 독일 베를린영화아카데미 입학. 96년 현재 졸업영화 제작중>

학교장 인터뷰 -베를린영화아카데미 라인하르트 하우프 교수
(96년도 당시 인터뷰 내용입니다!)

라인하르크 하우프씨는 독일영화의 주요 감독으로서 89년에 독일 도시게릴라운동을 다룬 영화 <슈탐하임>으로 베를린영화제에서 금상을 받은 바 있다. 현재 한국에서 공연되고 있는 <지하철1호선>을 영화하였다.

베를린영화아카데미의 자랑이 있다면?

베를린영화아카데미에서는 많은 외국인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으며 교수진 또한 세계 각국의 영화전문인들로 되어 있어 국제대학의 성격을 띠고 있다. 때문에 서로 다른 여러 문화가 영향을 주고받음으로써 세계를 향해 열린 시각을 추구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우리 대학은 학생들이 세계 어디서나 이해할 수 있는 영화언어를 습득하되, 그들만이 가진 문화의 특성을 보존하기를 바란다.

베를린영화아카데미를 이끄는 교육철학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 학교의 모토는 저자본 대에너지이다. 학생들에게 과감한 실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과 함께 전문기술의 기본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또한 영화를 보고, 분석하고, 구성할 수 있는 의식화된 시각을 가르친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우리 대학이 테크닉과 예술성 추구의 올바른 균형을 이루는 장소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감정을 움직이고 사고를 야기시키며,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정열적인, 그런 영화를 만드는 영화인들을 양성하는 것을 이상으로 한다.

훌륭한 영화감독이 학교를 통해 육성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영화감독이 날 때부터 감독인 것은 아니다. 대학에서든 현장에서든 배웠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를 배우기 위해 필요한 가장 중요한 것은 호기심이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 배우려는 열성이 있고 추진력이 있어야 한다. 물론 재능은 전제조건이다.

이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독일어와 영어를 할 줄 알아야 하고, 또 모험을 하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다가오는 20세기의 영상혁명을 학생들에게 어떻게 준비시키는가?

영화가 수행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감성과 정열을 통해 재치있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을 잃지 않는 한도에서 테크닉의 변화를 학생들에게 준비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