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영화지망생의 꿈
-유럽영화교육의 선두주자, 프랑스의 페미스

프랑스에는 이덱(IDHEC)이라는 학교가 있었다. 엄청나게 어려운 입학시험을 통과하면 감독이 되고 싶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허락해주는, 감독 지망생들에게는 꿈 같은 영화학교였다. 영화를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70년대의 우리 영화인들은 거의 예외없이 이덱이라는 학교에 동경의 눈을 보내며 살았다. 우리에게 제대로 된 영화학교가 절실했었기 때문에, 어디를 봐도 영화의 길은 충무로 땅바닥에서 구르는 것뿐이었기 때문에 이덱은 먼 나라의 꿈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덱을 두드린 사람도, 나온 사람도 없어서 그것은 하나의 떠도는, 정말 좋은지 어쩐지를 알 수 없는 풍경화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덱은 문을 닫았다. 이래서 이덱은 이제 우리에게 없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프랑스에는 여전히 이덱이 살아 있다. 영화판의 도처에, 방송가에 이 괴물 같은 영화학교 출신들이 포진하고 있으며 그것이 프랑스 영상문화의 힘이다(장 자크 아노, 테오 앙겔로풀로스, 코스타 가브라스 등등). 이런 이덱을 프랑스는 왜 없앤 것일까? 아마도 이덱이 아직 그런 대로 훌륭하긴 하지만 현대화되어가는 영화를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거나 유럽 전체를 하나의 장(plateau)으로 보고자 하는 프랑스의 야심찬 문화 전략 때문일 것이다. 이 두가지 모두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프랑스는 많은 영화인들의 동경이고 추억의 학교인 이덱을 영원히(!) 폐쇄한다. 그리고 대신에 페미스(FEMIS)를 설립한다. 이른바 이덱의 후신이라고 하는 명칭이 따라다니는 이 학교는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더이상 이덱을 꼬리에 붙이고 다니지 않는 독립국이 된다. 그리고 당연히 프랑스가 세계에 자랑하는 최고의 영화인 양성소가 되었다.

우선은 자본주의 사회의 한 산업일 수밖에 없는 영화의 성격을 감안하면 페미스에 권위를 부여하는 수많은 요소 중의 첫번째 항목은 재정일 것이다. 첨단 기자재가 나오기만 하면 그 즉시 구입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학생 한 사람이 제작하는 단편영화(일년에 두편 정도를 만듬) 한편에 천만원이 넘는 돈을 즉각 줄 만큼 학교의 재정은 풍부하다. 알랑 쥐페 현 프랑스 총리(96년 상황입니다)의 부인이 교장으로 있다고 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국립 실기학교로서 페미스를 설립한 것 자체가 이미 재정을 보장하겠다는 뜻이었다.

두번째로는 강사진과 교육 프로그램. 현장과 이론, 기술등의 모든 분야에 당대 최고의 강사진이 포진해 있다. 이것은 그러나 최고의 영화학교에서 당연하고도 필수적인 일. 문제는 다음이다. 프랑스에서는 새 영화는 예외없이 수요일에 개봉한다. 그런 만큼 프랑스 국내의 유명감독들이 프랑스에서 자기 작품을 개봉하기 하루 전날인 화요일에 먼저 페미스에 와서 학생들과 시사회를 갖는다는 것은 페미스의 큰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알랭 카발리에, 클린트 이스트우드 등이 단골이다). 그야말로 프랑스뿐이 아니라 유럽 영화인 거의 모두가 사실상 페미스의 강사진인 셈이다.

세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당연히 학생들의 수준이다. 몇십 대 일, 그것도 영화에 대해선 누구보다 뒤지지 않는다는 수재들과의 몇십 대 일 경쟁률을 뚫고 들어오는 학생들은 지적 능력에 있어서 그리고 감각에 있어서 거의 최고 수준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삼십여명을 일곱개 분야(연출, 시나리오, 카메라, 음향, 제작, 편집, 장식)에 걸쳐 고루 뽑는다. 시험은 이덱시절과 마찬가지로 독특하다. 3차시험까지 있는데 그 안에서도 몇개의 과정으로 나뉜다.

학교에 입학했다고 해서 다 끝난 것이 아니다. 2학년 진급 때에 자기가 지망한 분야에 남아 있는다는 것이 기가 막히게 어렵다. 예를 들어 감독분야는 한 사람의 작품에 1천만원~2천만원의 지원비(모든 기자재는 학교에서 제공)가 나가기 때문에 실력없는 사람을 그대로 그 자리에 있게 하지 않는다. 2학년부터는 16mm든, 35mm든 학생 자유이기 때문이다. 1학년 기간에 12개의 작품에 참여해야 하므로 이때 실력이 드러난다.

2학년을 거치고 3학년(졸업반)이 되고 나면 이미 이들은 거의 프로에 가깝다. 재학중에 현장 일이 허용되어 있으므로 학교에 다니면서 명성을 닦는 친구들도 있다. 감독 부문의 학생들은 CNC에서 자동적으로 상업영화 연출자격증이 나오며 거의 졸업 작품으로 상업영화계에 데뷔한다. 이 대목이 사립과 국립의 현저한 차이. 사립학교 출신들이 취직난에 시달리고 기껏해야 기술진이 될 수 있는 데 반해 국립출신들은 진짜 감독이나 카메라 맨이 된다. 사실 사립학교의 재정을 충당해주는 사람들이 한국, 일본인을 비롯한 외국인들이라고 생각하면 이 수준 차를 짐작할 수 있다. 정상적인 프랑스인이라면 그 엄청난 등록비를 내며 사립을 다닐 필요없이 대학 등 국립 교육기관이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 사립을 다니는 것이다.

<글:파리-김성태 : 63년생, 한신대 국문과 졸업 파리 제3대학 박사과정 수료>

페미스 시험방식

2차시험은 1차를 통과한 사람들에 한해서 이루어진다. 여기서부터는 지망하는 분야에 따라 서로 다른 시험을 치른다. 시나리오쪽은 주어진 세 가지의 상황을 가지고 시나리오를 쓰게 된다. 영화를 실제로 만들 수 있는 완벽한 시나리오를 써야 한다. 감독분야는 주어진 상황에 대한 데쿠파주를 쓰고 자신이 직접 이유를 써야 하며 영화를 찍는 데 필요한 모든 제작 요소들을 명시해야 한다.

여기까지 통과하면 3차는 비교적 수월하다. 모든 지망생들이 있는 가운데 일반 상식과 인문과학 지식, 그리고 영화에 대한 것들을 말로 45분간 테스트 받는다. 3차에 걸친 시험과정에서 가장 유의해야 할 점은 불어가 되냐 안 되냐는 아예 고려 대상에도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약 10% 정도만 외국인을 뽑는다. 때문에 사실 이 외국인들이야말로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한국학생 인터뷰 -변혁(페미스 3학년 재학생)
(96년도 당시 인터뷰 내용입니다!)

페미스로 유학한 동기는?

프랑스 미학에 관심이 많아 유학을 준비하던 중 우연찮게 영화아카데미 7기(91년)로 입학했다. 졸업작품에 대한 반응도 좋고 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프랑스에도 좋은 학교 있다는데' 하면서 91년 가을에 유학을 왔다. 93년 가을부터 페미스에 다녔다.

프랑스로 유학을 온 계기는?

프랑스에선 영화를 많이 볼 수 있다는 주위 사람의 권유가 많았다. 영화 외적인 문화환경이 좋아서 정신적인 자양분을 많이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있었다.

어떻게 파리 제3대학을 택하게 됐나?

13개 대학에서 영화를 가르치고 있지만 영화과가 있는 곳은 제3대학과 제8대학뿐이다. 제3대학이건 제8대학이건 실기쪽 과목은 없다. 제8대학은 68년 5월혁명 때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필명을 날리던 장 나르보니 같은 교수가 포진해 있고 지금도 3세계영화나 진보적인 영화를 옹호하는 실천적인 성향이 강하다. 그러나 제3대학에 쟁쟁한 이론가들이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론에 대한 욕구를 해소시켜 줄 수 있는 곳으로 제3대학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페미스 시험은 까다롭기로 소문이 났는데?

3차에 걸쳐 치른다. 나라, 만남 등의 주제를 주고 두달 동안 작품을 만들어 제출하기, 15분 가량 작품을 본 뒤 서너 시간에 걸쳐 분석하기, 상황을 하나 주고 시나리오 만들기 등이 포함된다. 1차 시험은 3~5월에 치르고, 2차 시험은 부문별로 치르는데 점점 복잡해진다. 촬영 부문은 전기, 광학, 화학 같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어 나는 엄두도 못냈다. 3차시험은 9월에 구두로 치른다.

합격은 쉽게 됐는가? 국제영화제 수상 경력이 도움이 됐을 것 같은데?

3번만에 합격했다. 세번 도전해서 안되면 그냥 집에 와야 되는 제도다. 그런데 알고 보니 외국인에게는 해마다 3명으로 허용인원을 제한하고 동양권에서는 그중 한명 정도 뽑는다. 그나마 대부분 베이징 아카데미 출신이다. 내가 있는 동안 한국인 유학생이 들어오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교과과정은 어떤가?

총 40개월 과정이고 1학년은 1년미만, 2학년은 20개월, 3학년은 1년과정으로 되어 있다. 응시자격은 대학 2년 재학 이상이고 졸업하면 고졸+5년의 자격증을 받는다. 1학년 과정은 전공과 상관없이 전반적으로 공부하여 이론의 비중이 높다. 2학년 때는 다큐멘터리를 4개나 만들었다. 국립이니까 작품을 공짜로 만든다.

프랑스 정부가 전통적인 명문 이덱을 페미스로 바꾼 이유는?

이덱(IDHEC:고등영화연구소)은 기술 파트가 없는 완전한 연출학교로 30년대에 생겨 40여년간 존속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기술과 뉴미디어 없이는 프랑스영화를 살릴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페미스(FEMIS)로 바꾼 것이다. 이덱 출신은 비평가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70~80년대 프랑스영화가 빛을 못 보던 시기에는 그런 이덱에 대한 회의가 일었다. 예컨대 빔 벤더스가 이덱에 세번 떨어졌지만 훌륭한 감독이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다 <포지티프>의 새로운 이론이 가세해서 40년 이상의 체제가 격변한 것이다. 페미스는 지금 11기를 선발하는 중이다. 현재 프랑스의 국립영화학교는 페미스와 뤼미에르 두 군데인데 뤼미에르는 연출 부문 없이 기술, 즉 촬영, 사운드, 편집 등을 교육한다.

이덱과 페미스의 명성은 어디서부터 비롯되나?

이덱 이후 페미스의 활동이 좀 덜하기는 하나 여전히 로카르노 영화제를 거쳐 칸으로 가는 엘리트 코스다. <카이에 뒤 시네마>와 하나가 되어 일종의 학벌을 형성하고 있다. 이덱만큼은 아니지만 아직도 페미스 출신이 입봉하려 하면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최소한 두 페이지는 내준다. 트란 안 홍이 첫 영화를 가지고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간 것도 그런 지원 덕이다.

프랑스 유학이 주는 특별한 장점은?

4년간 프랑스에 있다 보니 무엇이 선진영화인지 감이 온다. 첫 영화는 여기서 연출한 생각이다. 외국에 나와 있으면 문화적 정체성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나는 전형적인 한국인인데 판소리보다 클래식, 팝송에 더 익숙하다.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이것이 한국적인 것'이라고 무작정 내세우면 심한 괴리감을 일으키고 결국은 이국적인 상품으로만 남게 된다. 현실을 제대로 인식한 리얼리즘영화가 징검다리로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2월 베를린영화제에서 본 <개같은 날의 오후>가 너무나 좋았다.

당신의 이름을 좋아하는가? 무엇을 '변혁'시키고 싶은가?

내 이름을 좋아한다. <호모 비디오쿠스>가 칭찬을 받은 이유도 정형화된 영화언어를 깨트렸다는 점이다. 무얼 알아서 그랬다기보다는 영화아카데미 이전에 정상적인 드라마를 만들어본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영화와 여타의 시각적 스펙터클을 보는 데에 시간을 반반씩 투자하고 있다.

<씨네21-김소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