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날짜나 계절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차라리 정일성 촬영감독에게 물어보면 잘 알 것 같은데 아마 봄부터 겨울까지였던 것 같다(그러나 안성기 씨가 「월간 영화」에 기고한 일기에 의하면 81년 4월 29일 한창 촬영 중인 것으로 되어 있으며, 그해 7월에 본심의를 통과했으므로 81년 초겨울부터 초여름까지가 맞다).

어쨌든 내가 했으면 좋겠다고 원작을 꼭 좀 잡아달라고 한 작품은 이것이 내 평생의 처음이다. 그만큼 내 스스로 욕심을 낸 작품은 없었고, 그 전에는 영화사에서 하자고 하면 대충 따라서 해주었다. 그때 화천공사에서 기획을 맡았던 사람이 황기성 씨다. 소설로서 굉장히 인기가 있었는데 내가 매력을 느꼈던 점은 크게 두 가지 정도다.

하나는 사회적 이유인데 군인들이 계속 집권을 하면서 굉장히 암울한 시기가 계속되었다.그러면서 뭔가 개인적 성취, 승려 사회에서 소승적 수행을 통해 개인적인 자기 완성, 또는 자기 형성을 이루어가는 인물들의 치열한 삶에 대해서 굉장한 호감을 가졌다. 또 하나는 불교적인 관심인데 우리가 신자든 아니든 아주 긴 세월 불교적인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승려 사회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잘 모르는데 이 소설 속에는 비리를 포함한 많은 정보가 담겨 있었다.

난 신바람이 나서 이 절, 저 절로 장소 헌팅을 다녔는데 조계종 산하의 전 사찰이 영화를 거부하고 심지어 원작자인 김성동 씨를 고소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분위기가 나빴다. 방방곡곡의 절을 돌고 돌아도 거절뿐이었다. 하루는 전라북도에 있는 금산사에 들렀는데, 젊은 중이 하나 있었다. 사찰의 행정 계통의 일을 맡고 있었는데, 아주 잘 생기고 진보적인 중이었다. 내가 찾아온 사유를 이야기하니 그이는 뭐가 어렵겠냐고. 하지만 어렵지, 자기 힘으로 안 되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다.

금산사도 조계종 산하였으니까. 그래서 이젠 일본에 가서 찍을까 생각했지만 건축 양식이 다른데 어떡하는가? 내가 그만큼 그 작품에 미쳐 있었다. 그런데 그 중이 옛스러운 절이 딱 하나 있는데 태고종 계통의 선암사라면서 거기 가서 교섭해 보고 안 되면 영화를 덮어야 될 거라고 일러주었다. 속으로는 포기한 상태에서 그때가 추워질 무렵인데 제작부장 하나만 달고 선암사로 갔다. 막 들어서는데 그렌저 구형이 한 대 서 있고 어떤 스님과 한 50대를 바라보는 신사가 건축된 기와집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좀 지켜보다가 말이 뜸해진 중에 그 스님한테 이만저만한 영화를 찍으려고 왔다고 했더니 단번에 못 빌려준다는 거다.

절간의 비리를 너무 많이 담고 있어서 태고종에서도 고소할까 생각 중이라면서. 그런데 옆에 서 계시던 분이 나를 유심히 보더니, 그렇게 나쁜 영화를 찍을 분이 아닌 것 같은데 좀 빌려주면 안 되느냐고 거드는데, 그이가 바로 「뿌리 깊은 나무」의 한창기 사장이었다. 나와는 전혀 면식이 없는데, 영화 좀 찍게 하고, 여기까지 오셨으니까 절밥도 대접하라고 일방적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선암사 구경거리를 소개시켜주겠다고 나를 데리고 다니며 일일이 설명해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꼭 무엇엔가 씌운 것 같다. 그 스님은 지금도 가깝게 지내는 지허 스님으로 상당히 유명한 분인데 결국은 허가를 내주었다. 다시 금산사의 젊은 중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이가 <만다라>에서 퍽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승려 사회의 개혁을 주도하는 굉장히 진취적인 사람이지만 술도 개판으로 잘 마셨다. 완전히 <만다라>의 주인공 같다고 할까. 마침 잘된 게 나에겐 고증해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이 젊은 중이 잘 걸려든 거다(웃음).

하지만 그이가 우스운 것은, 조계종 전체가 반대하는데 저가 고증한다고 맨날 현장을 따라다니면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니 땡땡이 중일 수밖에(웃음). 하여튼 그이를 데리고 선암사로 들어갔는데 그때의 불가가 또 굉장히 복잡했다. 대처승과 비구승 사이에 깡패를 앞세우고 절을 돌아다니면서 비구승 쪽에서 절들을 접수할 때였다. 이유인즉, 일제시대에는 대처승들이 절의 정권을 쥐었는데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면서 비구승 쪽 손을 들어주었다.

그래서 해방 이후 대처승들이 집단 이혼식을 가질 정도로 난리가 났는데 우리가 알만한 큰 스님들도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무렵이 깡패를 앞세우고 비구승들이 거의 장악했을 때인데 선암사도 걸려 있었다. 그러니 동원된 승려들이 몽둥이를 들고 나서는 삼엄한 시기에 비구승 하나가 촬영한답시고 대처승 절에 달라붙어 있으니 태고종에서 보면 영낙 없이 조계종이 보낸 첩자가 아닌가. 난 또 나대로 여러 절이 필요한데 선암사 하나로 찍으려니 미칠 노릇이고. 이런 아슬아슬한 분위기 속에서 지허 스님이 젊은 중의 마음을 헤아려 협조를 잘 해주긴 했지만 마음 고생은 말도 못했다.

선암사에서 대부분을 찍고, 그래도 안 되는 건 내소사에는 문화 영화를 찍는다고 속이고, 월정사에는 지켜보다가 아무도 없다싶으면 얼른 안성기 보고 겨울 만행 떠나기 위해 걸어 나오라고 해서 후다닥 찍고 도망쳤다. 완전히 도둑 촬영이었다(웃음). 그런데도 젊은 중이 계속 따라붙으니까 어떤 때는 고맙지만 어떤 때는 귀찮기도 하고(웃음). 한번은 설악산에서 촬영이 일찍 끝난 날 술을 굉장히 많이 마셨다. 나도 엄청 취했는데 그때는 작은 방이라도 늘 그 중이 내 방에서 잠을 잤다.

그 중 이름이 평상(平常)인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평상심을 찾아야 될 만큼 성격이 얼마나 개지랄 같으면 법명을 그렇게 지었겠는가?(웃음) 그날 밤 내가 너무 취해 자다가 일어나 벽에다 오줌을 누려고 한 적이 있다. 평상 스님은 젊으니까 나를 부추겨 마당에 있는 변소로 데려갔는데, 다음 날 난 무료하기도 하고 짓궂은 마음이 발동해서 이 사건을 그 중한테 뒤집어 씌웠다(웃음).

스탭들이 모인 자리에서 수행한다는 중이 맨날 술이나 먹고 기어코 사고를 냈다고. 그런데 이 중이 젊으니까 그 농을 삭혀내지를 못하는 거다. 아니라고 펄펄 뛰면 난 심지어 우리집 안방 구조와 금산사의 방 구조를 비교하면서 절대적인 알리바이를 논리적으로 댔으니까(웃음).

사실 정일성 감독은 새벽에 평상이 나를 끌고 나가는 걸 보았는데도 입을 딱 다물었고, 난 심심할 때마다 그걸 꺼내 놀렸다. 어떤 때는 평상이 울기까지 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내 논리가 워낙 정밀하니까(웃음). 그런데도 이 중이 안 가고 따라 붙는 거다. 이 땡초가 왜 이럴까,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새벽에 잠이 깬 내가 옆에서 자고 있는 그이를 보는데 처음으로 어떤 깨달음이 있었다.

이제 촬영이 다 끝나 가는데 이 중이 그런 수모와 놀림을 당하면서도 버티고 있었던 건, 만에 하나 어떤 실수로 인해 불교나 절에 누를 기치는 일이 있으면 절대로 안 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못할 짓을 한 것 같은데 <만다라>는 암수술 후 아직 회복도 안 된 정일성 촬영감독을 추운 겨울에 끌어내 찍은 영화다. 그이와의 첫인연은 <신궁>이라는 천승세 원작을 영화화하면서 맺어졌지만 결과가 워낙 안 좋았다.

시나리오도 없이 섬에 들어가 스탭들이 곤욕을 치루었는데 안 되려니까 촬영한 분량이 전부 '핀 포캐'(핀이 안 맞음)였다. 그래서 <깃발 없는 기수>에서는 제대로 해보려고 하다가 스케줄이 안 맞아 못했는데 그이가 암수술을 받은 거다. 난 <만다라>를 정말 제대로 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입원실로 찾아갔다. 촬영 내내 등 뒤에서 곧 죽을 사람 데리고 찍는다는 말이 들려왔다.

정일성 감독은 제2의 생명을 얻었다며 좋은 영화를 찍어서 보답하겠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정말 무섭게 일했다. 그 몸으로 겨울에 기와장에 올라가 미끄러지면서도 필사적으로 촬영을 했다. 늘 마음이 조마조마하지만 도리가 없었다. 다른 사람하고는 거의 일할 생각이 없었고, <족보>부터 구사하기 시작한 롱 테이크를 제대로 해보겠다는 생각이 워낙 강했으니까.

나는 그때 롱 쇼트와 풀 쇼트, 시네마스코프의 펼쳐진 그림에서 그 그림이 암시하거나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를 함축적으로 잡아내면서 클로즈업으로 팍 들어가서 주인공들의 감정을 그려내고 다시 튀어나가고 하는 형식을 시도했고, <만다라>를 끝내고 내 영화적 형식을 그런 쪽으로 더욱 농밀하게 구사해 보겠다는 꿈이 있었는데 결국 이루지는 못했다. 그럴만한 소재를 만났으면 다시 한 번 시도했을지도 모르는데.

<만다라>는 불교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삶의 방식을 달리 하는 두 승려의 이야기이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내는 두 승려를 통해 정말 내가 영화 인생을 철저하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반성하면서 찍었다. 그런 점에서 나로서는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글:키노-이연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