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리>를 찍을 때나 편집할 때까지는 흥행에 성공할 자신이 있었다. 이제까지 한국 영화계에서 못 봤던 얘기니까 주위에서도 다들 재미있어 했고. 그런데 마지막 기술 시사한 후에 갑자기 영화가 너무 재미 없게 느껴져서 불안해졌다. 한석규 씨나 다른 스탭들한테 물어보니까 그들은 재미있다고 그랬지만 솔직히 그런 말들이 귀에 안 들어왔다. <쉬리>의 예매가 다른 영화들에 비해 괜찮게 되고 있다고 코아 극장에서 얘기해 줬다. 돈도 참 많이 들인 영화라서 그냥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잘 되어야 하는데, 여전히 마음이 안 놓였다.

그런데 씨넥스에서 일반 관객 시사를 처음 했을 때에야 비로소 조금 안심이 되었다. 중요한 건 평자보다 일반 관객의 시선이니까. 관객들이 내가 의도했던 코드들을 호흡하고 느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안도했다. 홍보사 쪽에서 예매가 2만이 넘었다고 알려준 다음부터는 마음이 훨씬 놓였다. 그전까지 예매가 제일 잘 됐던 영화가 9천 몇 백 장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도 정확한 예매 숫자는 잘 모르겠는데, 서울의 22개 개봉관에서의 토털 집계가 완전히 나오지는 않았다고 들었다. 3만이 넘었다는 말도 있었는데, 어쨌든 내가 마지막으로 들은 수치는 2만 4천이 넘었다.

첫날 1회와 2회 때 박스 오피스 성적이 아주 좋았다. 그런데 예매 상황에 비해서는 좀 약한 스코어여서, 안정적인 선이겠다 라고는 짐작했지만 어느 정도로 폭발할지는 사실 미심쩍었다. 그 다음 주 주말 스코어가 전주에 비해 20퍼센트 정도 올라가고 그 다음 주 주말에 서울과 지방을 다 합해서 하루에 20만 명이 넘는 관객이 들었다. 대구에서 그 소식을 듣고 기분 좋아서 술 먹고 망가졌다(웃음). 그때 목표가 <타이타닉> 관객 수를 넘는 것이었지만 솔직히 당시에는 나도 좀 의심스러웠다.

과연 극장들이 한국 영화 한 편으로 장기 상영을 해줄까, 새로운 외화들도 많이 나왔는데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극장을 사수할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쉬리> 관객이 4백만을 넘었을 때부터는 이제 시간 문제라고 기뻐하면서 한편으로는 매일 매일 극장 하나라도 <쉬리> 간판을 내릴까봐 조마조마하면서 시간을 보냈다(웃음). 너무 고마운 게, 현실적으로 참 힘든 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극장주들이 한국 영화에 애정을 가져주고 한국 영화 기록을 세워보자 해서 <쉬리>를 밀어줬다. 그런 뒷받침이 없었다면 <타이타닉>의 기록을 깨지는 못했을 것이다.

4월 9일에 드디어 <타이타닉>의 관객 동원 수를 넘어섰고, 그날 극장에서 관객들에게 선물을 주는 행사가 있어서 거기서 시간을 보냈다. 그날 내가 어떤 기분이었던가. <쉬리> 관객이 전국 6백만 명을 넘었다는 것은 <타이타닉> 같은 헐리우드 영화에 비해 뭔가 다른 볼만한 거리, 플러스 알파가 있으니까 가능하지 않았을까. 헐리우드 영화에 비해서는 턱없이 열악한 조건으로, 우리 스탭들과 연기자들과 자본과 기술로 만들어진 영화가 헐리우드의 대작을 무너뜨렸다는 것이, 너무 뿌듯했다.

남들은 불가능하다고 한 일을 우리가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에 쾌감도 컸고. 또 앞으로의 내 영화 세계에 <쉬리>가 정말 중요한 디딤돌이자 좋은 교훈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다음 작품을 서둘러서 준비하기 이전에,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영화제도 자주 가고 여러 영화 마켓들에도 참가하려고 했다. 세계 시장에서 영화라는 매체가 가질 수 있는 기능에 대해 정확히 공부하고 내가 알아낼 수 있는 모든 노하우를 축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21세기에 한국 영화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산업적인 경쟁력을 더 향상시켜야 된다고 항상 생각해왔다. 그래서 <쉬리>를 처음 기획하고 시나리오 쓸 때, 소재나 장르를 구상할 때도 그런 부분들이 내게는 매우 중요했다. 그런데 이 정도의 완성도로 누가 해외에서 이 영화에 관심을 보이겠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영화라는 매체가 참 다양한 존재인데, 나와 다른 부분을 이해하지 않는 경직된 자세가 참 안타까웠다. 이래서 한국 영화가 좀더 다양한 지점으로 발전되지 않는구나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뭐 개인적으로 <타이타닉>이 그렇게 마음에 드는 작품은 아니었지만, 그처럼 흥행에 크게 성공하는 작품들은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정서에 호소하는 작품들이라고 생각한다. <쉬리>를 예로 들자면, 처음부터 복합장르를 선택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쓰면서 스스로 자문을 해 봤다. 내가 한국에서 액션영화를 찍는다? 아무리 잘 찍는다고 해도 일단은 헐리우드 액션물을 도저히 이길 수가 없고, 내가 액션과의 정면 승부를 걸었을 때 과연 몇 백만 명의 관객들이 올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각각의 취향을 가진 다양한 관객들을 동시다발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 토털적인 재미를 추구하기 위해 멜로나 스릴러 등 여러 가지 장치를 넣었다.

이 영화가 단순히 액션적인 장점만 있는 영화였으면 이렇게 큰 성공을 못 거뒀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방면의 재미있는 요소들을 복합적으로 섞었을 때 우리 나라의 수많은 관객들을 만족시킬 수 있고 또 어떤 나라에서 상영되더라도 두리뭉실하게 잘 박힐 수 있다고 믿었다. 만드는 입장에서 난 프로페셔널이니까, 개인적으로는 영화의 어떤 부분들이 유치하다고 느껴도 이 영화를 통해 내가 뭘 최종적으로 얻고자 하는가에 따라 내 생각을 많이 버리는 편이었다. 본격적인 상업 영화를 찍을 수 있는지 없는지가 거기서 갈린다고 본다.

처음 해외 배급을 시작할 때, 미국이나 유럽의 메이저 배급사들은 <쉬리>가 참 괜찮은 영화인데 흥행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것 같은 몇몇 요소들이 있다고 말했다. 그 말에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그러니까 먼저 아시아 중심으로 영화를 배급해서 일단 영향력을 보여준 다음에 다시 그 쪽 배급업자들과 이야기하기로 계획을 바꿨다. 그래서 홍콩과 일본 쪽을 먼저 타진했다.

일본 같은 경우, 한국에 대해 관심 없고 한국 영화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다. 한국 사람들이 무슨 액션 영화 만들었다는데 <타이타닉>의 흥행 기록을 깼다더라, 그렇게 그냥 극장에 걸어만 두면 아무도 보러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일본 배급업자들의 고정관념을 깬 게, 무료 시사로 5만 명에게 이 영화를 보여줬다. 그 5만 명이 지금 백 몇 십만이 되었다.

한국 영화계에는 그런 식의 해외 배급의 메커니즘이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고 그런 일에 정통한 인력도 없어서 우리가 일일이 발로 뛰면서 일을 해결해나가야 했다. 가만히 앉아서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만 찍고 싶어도 그러기에는 우리가 해 놓은 것이 너무 없다. 누군가 해외에 우리 영화를 알려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런 걸 해줘야 하는데, 그래서 내가 요즘 그런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사인 체결하고 나서 공식 발표도 하겠지만 이번에 홍콩과 깐느영화제에 가서 미국 배급도 성사시킬 예정이다. 이제 그때부터 다음 작품 준비해야지(웃음).

요즘 아시아 영화계는 전반적으로 침체기이다. 홍콩에서 4~5년 전에는 영화 제작이 그렇게 활발했는데 지금은 다운된 상태다. 대만도 6~7년 전에는 한 해에 200편인가 만들었는데 작년에는 6편 정도 만들었다. 유일하게 한국 영화가 세계 시장에서 조금씩 위상을 높여가고 있는데, 이 기회를 발판 삼아 21세기에 새로운 경쟁력을 키워가야 하지 않을까, 방법이 뭐 없을까, 그런 부분들이 내가 요즘 고민하는 점들이다.

홍콩이나 대만, 일본의 영화계가 침체되어 가는 원인들을 우리가 정확하게 알고 공부해야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을 테니까. 일단 적어도 아시아의 힘을 모아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예를 들어 홍콩이 우리보다 해외 진출을 많이 했으니까 그런 면에서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는 영화 인력들이 풍부하니까 좋은 아이템 있으면 제공해 주는 식으로. 그래서 올해 안에 아시아의 영화계 연맹체를 하나 만들려고 한다.

홍콩이나 일본도 함께 참여해서 아시아 영화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작업을 진행시키고 있는 중이다. 아직까지 헐리우드가 영화 산업적 측면에서 제일 잘하고 있고 한국 영화계는 아직 너무 조야하니까 이렇게 노력 안 하면 미국 영화에 침몰할 거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아시아 영화와 문화에 문을 여는 작업이 진행되면 문을 연 만큼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을 것 같고, 그러면 세계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도 그만큼 늘어나지 않겠는가.

<글:키노-김용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