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12월 2일, 「씨네 21」의 한국 영화 제작진행표에 <여고괴담>이 나왔다. '여고에서 17년 전 죽었던 학생이 환생해 벌어지는 사건들'이라는 내용과 함께 '시나리오 수정 중'이라는 말만 있었고 감독과 배우들은 미정인 상태였다. 당시 <여고괴담>의 기획안이 11군데서 퇴짜를 맞았다가 씨네 2000의 이춘연 선생님이 파이낸싱이 되면 하자고 했던 때였다.

폴란드의 토룬영화제에 <이방인>이 초청돼서 안성기 씨와 같이 갔었는데, 귀국하기 전날 강우석 씨가 투자하겠다고 결정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강우석 씨가 시나리오도 안 보고 제작 진행표에 나온 제목과 내용만 보고 결정했던 것이다. 갑자기 나타나서 그러기에 이춘연 선생님도 믿지 못했고, 반신반의 하다가 부랴부랴 백지에 계약서를 만들고 계약을 했다.

95년 봄 LIM영화사에 있을 때 <여고괴담>, <무협고교>, <이방인>, 이렇게 3편을 구상했다. 구상한 것도 키노처럼 5주년이 된다(웃음). 옛날부터 선생님들에 대한 악감정이 있었다. 모든 선생들이 그런 건 아니지만 살의를 느끼게 하는 선생들이 있었다. 그런 걸 그려보고 싶었지만 너무 리얼하게 그리면 안 될 것 같았다. 고등학생을 위한 영화지만 고등학생이 못 보면 말이 안 되니까.

그래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귀신이 선생을 죽이면 말이 될 것 같았다. 시비를 걸어와도 싸울 여지도 있을 것 같고. 장산곶매 시절에 를 보았는데 굉장히 재밌었지만 우리가 만들긴 힘들 것 같았다. 사이코나 악마도 우리의 정서에 맞지 않아 어색한 것 같고 한이 서린 귀신, 특히 학교에 등장하는 귀신이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리저리 괴담들을 구하다가 미술반에서 갇혀 죽은 귀신 이야기를 듣고 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과거에 겪었던 상황이 현재에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기엔 귀신 이야기가 제격이었다. 특히 당시에 유행했던 엘리베이터 귀신 이야기 같은 건 재미있었다. 과거에는 공포의 대상이라는 게 불가지한 것들이나 근원을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이었는데, 여기선 느닷없이 어머니가 공포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어머니조차도 보호자가 아닌 억압자나 강제자로 군림하고 있는 현실이 된 것이다.

전반적인 사회의 억압 문제, 청소년들의 입시 문제를 다루고 싶었다. 물론 과거에도 청춘물이나 입시 문제를 다룬 영화들이 있었지만 과거 청춘물들의 컨벤션은 답습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바깥으로 카메라가 빠져 나오지 않고 오직 학교에만 있어보자는 생각을 했다. 공포 영화로 만들고 싶진 않았다.

사실 난 공포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끝까지 다 본 공포 영화도 <캐리>밖에 없고 <13일의 금요일>도 앞의 5분밖에 못 봤다. 박기형 감독과 제작을 합의하고 <킹덤>을 같이 보긴 했지만 공포물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여고괴담>과 <이방인>을 마음에 두고 있었을 때, 먼저 오기를 가지고 <여고괴담>으로 딱 두 군데 접촉해 보았는데 안 됐다. 아니 어쩜 이런 유치한 영화를 하려고 하느냐, 갑자기 무슨 여고냐, 요즘에 무슨 귀신 이야기냐,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하지 마라 등 <여고괴담>을 재밌어 하는 사람은 없었다. <무협고교> 이야기를 해도 다들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이방인>을 먼저 만들게 됐다.

<여고괴담>은 섭외했던 기존 감독들에게 수도 없이 거절당했다. 그러던 중 제3회 서울 단편영화제에서 <과대망상>을 봤는데 느낌이 괜찮았다. 딱히 박기형 감독과 인사를 한 건 아니었다. 회사나 강우석 씨는 다른 감독을 추천했지만 뜯어말리면서 박기형 감독을 고집했다. 그리고 박기형 감독을 직접 만나 시나리오를 보여주며 제안했다. 근데 나중에 그가 오기민이 어떤 사람이냐고 사방에 문의하고 다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시나리오를 검토한 박기형은 보름 동안 일본에 갔다오겠다고 했다. 일본 영화 냄새가 많이 나서 베낀 건지 어떤 건지 알아보고 오겠다는 거였다. 좋은 생각인 것 같아서 그러라고 했다. 대신에 자기 돈으로 갔다오라고 했다(웃음). 제목도 바꾸고 싶다고 해서 동의했는데 그때 나온 제목이 <아카시아> 였다. 사실 촬영 장소로 학교를 빌리려는데 학교에다 <여고괴담> 이라 그러면 누가 빌려주기나 할까. 제목은 <아카시아>, 내용은 '소녀들의 사랑과 우정에 관한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98년 2월 마지막 주에 촬영에 들어갔다. 봄방학때 일주일 찍고 개학 이후에는 토요일 오후에 들어가서 토, 일요일 밤을 새서 찍고 월요일 아침 5시에 끝냈다. 학생들 등교 시간 전에 1시간 정도 청소해야 되니까. 개봉일을 5월 30일로 못박아 놓았기 때문에 007작전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완성도를 위해 촬영, 조명 등에 신경 쓸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박기형 감독은 장편영화 데뷔이고 사실 나도 <이방인> 이후 한국에서의 첫 데뷔라고 할 수 있었는데, 순제작비 6억 5천만원에서 2천만원을 남겼다. 원래 시나리오에는 고 김기영 감독님이 수위 아저씨로 등장하는 수위실 씬이 있었다. 수위실에 TV가 치지직 거리고 수위가 선반에 발을 딱 얹고 조는 씬인데 그걸 도입부나 살인씬 등의 전후에 인서트로 넣고 싶었다. 감독이랑 나랑 정말 재미있을 거라고 좋아했었는데 김기영 감독님에 대한 오마쥬 같은 의미였다. 김기영 감독님께 전화도 드린 상황이었는데 98년 2월 5일에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셔서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폴란드에서의 <이방인> 작업은 프로듀서로서 배우는 과정이었다. 헐리우드가 백화점이라면 우리는 구멍가게니까 그 경영 방식은 틀릴 수밖에 없다. 시스템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폴란드에서의 경험은 아주 신선했다.

현장 사람들 중에 거의 안성기 씨가 중간 나이일 정도였고, 정말 스탭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감독이 고민하면 다들 쉬는 거고 감독만 준비되면 언제든지 슛에 들어가는 거다. 토요일까지 하고 일요일은 쉬고 또 매일 정해진 시간만 하고 일찍 끝나고. 그런 게 우리에겐 없는 문화인데 너무 좋았다. 스크립터도 촬영 전날 만났을 정도다.

영화라는 것이 감독에겐 나름대로 다른 의미가 있지만 스탭들에겐 생계의 의미가 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다음 작품이 언제 들어갈지 명확하게 인식하고 분명한 계약을 한다. 하지만 우린 그게 불가능하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여고괴담> 때 그걸 살려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자신감이 있었다. 그건 앞으로도 많이 반영될 것 같다.

구로자와 기요시 감독의 영화 <도레미파 소녀의 피가 끓는다>란 제목을 보면 참 신선하고 좋다. 그래서 장난처럼 <스티카 소녀의 피가 끓는다>라는 가제를 떠올리기도 한다. <여고괴담>이 소재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당대 한국 영화계의 스펙트럼 확장에 한 몫 했다고 생각한다. 사실 <여고괴담> 3편은 안 하려고 했는데 대종상에도 떨어지고 그러니까 오기도 생긴다. 해외에서의 반응이 좋다니 자극이 되고 직접 확인도 하고 싶다. 그리고 역시 신인 감독으로 가고 싶다.

처음으로 구상했던 <여고괴담>, <무협고교>, <이방인>, 이 세 작품으로 100만을 돌파할 거라고 장담했고 <여고괴담>도 40만을 돌파할 거라고 했다. 물론 거기에는 교총의 혁혁한 공로가 있었기에 전국 200만을 돌파할 수 있었다(웃음). 처음부터 <여고괴담>은 시리즈로 갈려고 마음먹었다. 누구나 고교 때 정말 다양한 체험을 하고, 고교처럼 힘과 권위만 존재하는 무법천지의 세계에 얼마든지 충분히 많은 소재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초등학생 같은 놈부터 늙은이처럼 보이는 놈까지, 가난한 애부터 부자인 애까지 다채로운 계층이 마지못해 공존하는 정말 특이한 공간 아닌가?

<글:키노-주성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