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까지 10년 넘게 백수 생활을 해왔다. 그러다가 2년 반 동안 사귄 여자 친구와 헤어지게 되었다. 남아 도는 시간을 어떻게 죽여야 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 차를 몰고 가던 중 영국의 펑크 록 그룹인 클래쉬의 음악을 틀고 볼륨을 올리다가 앞차를 클래쉬하게 됐다(웃음).

터널을 빠져 나올 때쯤 클래쉬의 음악을 틀고 앞을 봤더니 앞차가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었다. 비가 와서 길이 미끄러운 상태였는데 앞차가 커브를 틀다가 미끄러져 빙빙 돌았던 거다.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틀었는데 옆에 가던 차가 놀라 서는 바람에 받았다. 견적이 6백만원 정도 나왔는데 삼십 평생 번 돈보다 더 많은 목돈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 일로 인해 10년간의 백수 생활을 청산하게 되었다.

시간을 죽이고 한 번에 목돈을 만들 수 있는 방법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시나리오밖에 없었다. 목돈을 어디서 구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우연히 「프리미어」에서 시나리오 공모를 보게 됐다. 그래서 처음으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마감일까지 보름 정도 남아 있었는데 그때부터 쓰기 시작한 시나리오가 「좋은 시절」이었다.

교내 폭력 서클 간의 암투를 그린 것으로, 80년대 신군부의 정권 찬탈 과정이 양아치들의 헤게모니 싸움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데서 착안했다. 80년대의 정치적 기상도를 고등학교 안에 축소시켜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과 인물들을 옮겨놨다. 삶에 있어 가장 빛나는 시기인 십대 시절을 정치 사회적으로 가장 암울한 시대에 보낼 수밖에 없었던 마지막 교복 세대인 80년대 학번의 비가 같은 이야기였다.

보통 성장하면서 세계를 의식하게 됨에 따라 어떤 매체를 통해 자기를 찾는 과정을 겪게 되지 않는가. 내 경우 워낙 어려서부터 영화를 좋아했는데 그래서 오히려 영화 현장에 가는 것이 더 더디었던 것 같다. 그러던 차에 처음 쓴 시나리오가 당선되어 너무 기뻤다. 또 뭐가 없나 하던 차에 「씨네21」의 시나리오 공모를 알게 됐는데 7, 8일밖에 안 남았었다. 그때도 우연히 가게에서 라면을 먹다가 기사를 보게 되었고, 그때부터 쓰기 시작한 게 <조용한 가족>이었다.

<조용한 가족>은 너무나 급히 쓰는 바람에 마감도 2시간 정도 지나서 갔다 냈다. 부랴부랴 내고 집에 돌아왔는데 두 페이지가 빠져 있더라(웃음). 이름도 '김운'으로 냈었다. 급해서 '지'자를 빼먹은 거다. 그럴 정도로 급하게 갔다 냈다. 빠진 두 장 때문에 전화를 했더니 모두 퇴근했다며 다음에 오라고 해서 이틀 뒤인 월요일날 「씨네21」에 갔는데 똑같은 봉투에 담긴 시나리오가 5백여 권이 쌓여 있었다(편집자주-당시 응모 시나리오는 3백 59권이다). 그걸 일일이 뒤져서 찾아내고는 기자에게 스카치 테이프를 빌려 빼먹은 두 장을 같다 붙인 기억이 있다.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도 당선됐다.

잘은 모르겠지만 영화사에서도 처음에는 기존의 감독을 찾았을 것이다. 그런데 시나리오가 좀 이상하다보니 이건 쓴 사람이 감독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웃음). 또 나도 워낙 시나리오보다는 연출에 의욕을 갖고 있었다. 맡겨주면 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장편 시나리오를 쓸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연극 연출을 두 편 했었던 경력이 감안됐던 것 같다.

결정적으로 이 작품은 쓴 사람이 그 뉘앙스를 잘 뽑아 낼 것이라는 믿음과 기대가 작용했던 것 같다. 드라마틱한 결심 같은 것이 있었던 건 아니다. 시켜주면 재미있게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연극 연출을 할 때도 나는 평론가나 기자가 작품에 대해 하는 이야기는 별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친구들이 연극을 보고 좋아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이를 테면 김만중이 『구운몽』을 어머니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썼다는 이야기가 감동적이었다. 마찬가지로 나도 「좋은 시절」이나 <조용한 가족>을 썼을 때 친구들을 즐겁게 해 줘야겠다 라는 욕심으로 쓰기 시작했다. 만드는 과정 하나하나에 즐거움이 배어 있지 않으면 나한테는 별 의미가 없다.

<조용한 가족>을 만들 때까지 캠코더 한 번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영화를 볼 줄만 알았지 실제 후반 작업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었다. 나는 영화를 만들어 나가면서 영화에 관한 실제적인 것들을 배운 것 같다. 무수히 많은 영화 용어들이 너무나 생소했지만 그것들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작품을 두 편이나 감독했지만 아직도 너무나 순진무구한 얼굴로 영화의 제작방식에 대해 물어봐서 사람들이 벙찐 표정으로 쳐다보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것들을 소홀히했던 데에는 이전에 기술은 미학에 열등하며 미학이 결정되면 나머지 것들은 저절로 서포트한다는 생각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현장에 가려고 안간힘을 안 썼던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제작 메커니즘에 무지해서 힘든 적은 없었다. 영화배우나 감독, 내용 같은 것에 대해서는 사실 누구보다 꿰뚫고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정작 힘들었던 건 말이 별로 없는 편이어서 감각을 자꾸 말로 표현해야 한다는 점이 당혹스러웠다. 내가 대인 관계가 원만하지만, 원활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40명이 넘는 스탭을 어떻게 통솔하고 지휘할 것인가가 현장에 가기 전에 개인적으로 두려웠던 것이지 다른 것은 없었다.

실제로 해보니 헤매지 않고 잘 했다. 현장에서 순발력이 강하다고 하는데 사실은 순발력이 강하기보다는 준비를 안 해와서 그럴 수밖에 없는 거다(웃음). <반칙왕> 때도 그랬지만 나는 준비를 안 해간다. 현장에 가서 '오늘, 뭐 찍니'라고 물어본다. 현장에서 오늘 뭐 찍을 것인지 내 스스로도 궁금해야지 주눅들게 고민하면 재미도 없을 뿐더러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스타일이고 방법인데 나는 오늘 이 장면이 어떻게 갈 것인가 라는 궁금증과 기대감이 강하다.

어렸을 때 그림을 그렸었는데 그림을 공부한 건 아니고 세 살 때부터 펜으로 만화를 그렸다. 엄마가 시장에 가거나 마당에서 펌프질하는 모습을 마치 원시 벽화처럼 그리곤 했다. 그러다가 인물에 캐릭터를 부여하고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3, 4년 동안 미친 듯이 만화를 그렸던 시기가 있었다. 거의 식음을 전폐하고 인간 관계를 끊은 채 만화 그리는 것에 몰두했었다.

지나치게 감수성이 예민해지다보니 TV를 시청하다가 기절한 적도 있었다. 병원에 갔더니 허구의 세계에 지나치게 예민한 감성을 가진 아이 같다고 이야기했었다. 그 뒤에 가족들이 조직적으로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했다. 그림을 그리려고 하면 불을 다 꺼버리는 거다. 그러면 나는 일어나 밖으로 나가서 달빛에 그림을 그렸다(웃음). 아버지가 찢어버린 그림 조각들을 울면서 스토리대로 이어 붙이기도 했다. 아마 그때 편집 감각이 생기지 않았나 라는 생각도 든다.

아버님이 장교이셨는데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서 군복무를 하셨다. 그 일대를 미군이 점령했을 당시니까 미국 문화, 헐리우드 영화를 빨리 받아들이신 편이었다. 아버지가 동네 극장의 상영 포스터를 집에 붙여 놓고 초대권을 놓고 가시곤 했다. 서너 장 놔두시면 내가 항상 한 장 꼬불쳐서 그때 무수히 많은 외국 성인 영화들을 보았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 건 카사인 블락, 난도브잔카 같은 배우들이 나오는 이탈리아 소프트 포르노 영화, 공포 영화, 샘 페킨파의 <가르시아>, 한국 영화로는 반공 영화를 가장한 에로 영화였던 <표적> 등이다. 모든 삼류, B급, 잡동사니 영화들을 다 섭렵했다. 그러던 나의 영화관을 바꿨던 게 브루스 리 영화였다. 황당한 권격물이 주류를 이뤘던 당시에 처음으로 액션의 리얼리티가 느껴졌다. 그러다가 또 한 번 청천 벽력 같은 계기가 된 것이 고등학교 때 본 <택시 드라이버>였다.

그때 거의 실신 지경까지 갈 정도였다. 공교롭게도 다시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었는데 내용이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폭발적인 테러에 관한 것이었다. <택시 드라이버>와 느낌이 매우 흡사한 것이었다. 그래서 더 쇼킹했던 것 같다. 그래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로버트 드니로에 대해 무지하던 시절에 로버트 드니로를 입에 달고 다녔다. 고등학교 때부터 동숭동이나 신촌에서 연극하던 언더그라운드 배우들을 알고 지냈는데 그때 명계남 씨가 나를 운지 도사라고 불렀다. 워낙 말을 안 하는 애가 말만 꺼냈다 하면 영화 이야기를 하니까.

그러다가 또 한 번 영화에 대한 사고 전환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 91년에 유럽 여행을 떠나면서 5개월 동안 무전 여행을 다녔는데 파리에 3개월 체류했던 것이다. 마침 「까이에 뒤 시네마」가 40주년이어서 시네마떼끄에서 세계 영화사를 총정리하는 상영회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영화를 많이 하는 파리에서도 이제껏 그런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때 2달 동안 100편을 봤다. 그 기간이 아마 어렸을 때 영화관을 미친 듯이 드나들던 때 이후로 가장 영화에 빠져 있었던 때였던 것 같다. 시나리오 이전에 글을 쓴 적도 영화를 찍어 본 적도 없지만 어렸을 때 3, 4년 동안 만화를 그린 기억과 10년 간의 백수 생활로부터 모든 게 나온 것 같다.

<글:키노-홍지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