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기억력이 굉장히 없는 편이다. 우연히 사람들과 마주치게 될 때 그 전에 만난 것 같은데도 그 사람의 이름이나 전화번호, 그를 어디서 만났는지 하는 것들을 전혀 기억을 못 해 당황할 때가 많다. 주로 일상에서 필요한 실용적인 정보들에 대해서 그런 경우가 많은데, 물건을 사고 나서 이틀 정도밖에 안 됐는데도 가격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영화를 찍을 때의 장면과 느낌들은 신기하게도 모두 기억한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경우도 그때 영한 장면의 분위기 느낌 같은 것들은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처음에 동아수출공사에서 영화를 하려고 몇 개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끄적거려 보았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도 이것을 가지고 영화화하겠다고 말하면 영화사에 안 통할 것 같았다(결국 그때 메모해 놓은 것들 중 큰 덩어리 두 개는 나중에 <강원도의 힘>을 할 때 쓰였다). 혼자 생각하고 있었던 것들은 그것이 어떤 식의 그릇에 담길지 나 역시 모르기 때문에 주저하게 되었고 영화사에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을 내밀었다가는 괜히 신뢰만 잃을 것 같은 생각도 있었다. 남들이 이미 인정했거나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요소가 있는 것을 가지고 와서 영화를 하겠다고 해야만 받아들여질 것 같았다.

그때 누군가로부터 구효서 씨의 『낯선 여름』을 추천받았다. 읽어봤더니 남들이 좋아할 만한 매력적인 부분들이 있었다. 그래서 이 소설을 가지고 영화를 하면 어떨까 하고 영화사에 제안을 해보았다. 영화사에서도 승낙이 떨어져 그 소설의 판권을 사게 되었고 구체적인 작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맨 처음에는 원작을 극사실적으로 과장 없이 톤 다운시켜 그려보려고 했다. 그런데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내가 알 수 없는 영역에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얻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네 명의 시나리오 작가를 모았다. 세 명은 초년생으로 습작은 했지만 아직 영화화된 시나리오는 없었고 여혜영이라는 사람만이 그 전에 한편 정도 영화화된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네 명과 함께 지방에 내려가서 두 달을 끙끙대 봤는데 결국은 재미도 없었고 내 마음에도 안 들었다. 그래서 거의 포기한 채로 서울로 올라왔다. 그런데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면 갑자기 길이 보이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다음날 문뜩 '그렇다면 『낯선 여름』이라는 원작은 아예 생각하지 말자. 그 동안 우리가 각색을 하겠다고 이야기하면서 공유한 인물에 대한 막연한 느낌들이 있으니까, 그것만 이용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같이 각색을 하던 네 명의 친구들에게 "우리가 작업을 하면서 풀어놓은 이야기의 느낌과 인물들에 관한 컨셉이 있으니까, 그것으로 하나의 방향을 잡고 각자가 한 인물들의 하루씩만 써보라"라고 주문했다.

네가 한 남자와 불륜의 관계인데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그런데 못 만난다, 만약에 그게 너라면 하루를 어떻게 보내겠는가? 이런 것들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눈 다음에 각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들은 며칠 만에 다 써왔다. 아마 한 3, 4일 정도밖에 안 걸린 것 같다. 마치 일기같이 그렇게 써온 글들로 단순한 4일의 기록이 만들어졌고 그것을 내가 하나로 통합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날것'을 어떻게 즉물적으로 카메라가 포획할 수 있을까에 많은 관심이 있었고, 영화 전체가 어떤 느낌을 주어야 된다 라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것을 풀어서 어디다 넣어 보여줄지는 영화를 처음하는 사람이니까 몰랐던 것 같다. 일반적인 영화는 안전망과도 같은 틀을 가지고 있고 각각의 묘사들이 그 틀에 봉사하는 식으로 왜곡되어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묘사들은 날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러한 날 것으로서의 묘사를 어떤 틀에 담을 것인가가 문제였는데, 그냥 극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충격적이기는 하지만 어딘지 나와는 안 맞았다. 너무 뻔했다.

그래서 시간을 가지고 장난을 쳐보자는 생각을 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형식은 생각한 지 반나절 정도 만에 떠올랐다. 어디서 본 것도 아니고 그래서 전혀 안전함이 없었지만 내가 사람들에게 말하면서도 '이건 말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4일의 기록을 여기저기서 옮겨오고 붙이고 그 안에 관계가 생길 것 같은 것은 찾아내고 해서 금방 하나의 틀로 완성했다.

그 다음에는 시나리오 형식이라는 것을 내가 잘 모르니까 네 사람과 함께 마무리를 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시나리오를 영화사에 보여주었다. 시나리오를 보고 밀어준 사람들도 있고 반대한 사람들도 물론 있었다. 그게 영화사에서 통과된 것은 정말 운이 좋았다.

드디어 촬영이 시작되었다. 첫 촬영은 이틀 동안 전주에서 있었다. 촬영을 마치고 서울에 올라왔더니 회사에서 반대하던 분들을 중심으로 이 영화, 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다시 나왔다는데 영화사 회장님이 '이왕 시작한 거 끝까지 믿어보자'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영화가 계속해서 만들어질 수 있었다. 현장에서 촬영할 때 곁눈질로 보면 가끔씩 스탭들이나 배우들이 뜨악해 하거나 '저 사람 왜 저래?' 하는 식으로 바라본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그냥 모른 척하고 따라주기를 기대하면서 간 것 같다. 그래서 큰 문제는 없었다.

사실 그런 반응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전에 영화를 만들지 않았으니까 또 그 사람들이 익숙해 하는 영화와는 다르기도 하니까 당연히 이해를 못 하고 이해를 못 하는 상태에서 따라가다보면 약간 불만 같은 게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걸 인정하니까 그들을 이해했다. 그런 게 나에게 크게 불편함을 주거나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나쁜 짓을 한 경우는 없었으니까.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영화가 상영되고 사람들이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렇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영화의 시작은 개인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더라도 그 목표는 사람들과 무언가를 함께 공유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의 가치나 의미도 결국 그렇게 사람들과 공유한 그것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 대해서 사람들이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도 나는 한참이 지나야 내가 정말로 무엇을 만들었구나 하는 것을 내 스스로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얼마나 오래 살지는 잘 모르겠지만 좀더 나이가 들고 이 영화가 완전히 딴 세상 이야기처럼 진짜 멀리 있을 때 그때는 보이겠지.

아직도 나는 바쁘게 자기를 찾아가는 사람인 것 같고 다만 어떤 부분에서 조금 더 안정된 토대에서 일하고 있다는 느낌이 전보다는 더 있을 뿐이다. 내 작업방식에 익숙해지고 여유가 생기니까 조금 더 빨리 그걸 보게 되는 것뿐이다. 예전 같으면 지금 정도를 보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이제는 믹싱 정도만 끝났는데도 <오! 수정>이 어떤 느낌인지 알겠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때였다면 만들고 나서 한두 달 걸려야 보였을 것이 보인다. 나는 확실히 잡을 수 없는 느낌, 그것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한다. 완전히 내가 알고 있고 관객들이 어떻게 느낄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면 그건 너무 재미없다. 그건 진짜 호기심이 아니다. 그게 어떻게 보일지는 나도 모르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호기심이 생기겠는가.

<글:키노-장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