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는 그림을 공부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림이라는 걸 우리 나라에서 하려면 제도적인 장치들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영화에 대한 관심도 많이 있었지만 과연 영화라는게 무엇일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들에 대한 답은 정확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돌아와서 시나리오 작가협회에서 운영하는 시나리오 수업을 듣고 영화 시나리오를 시작한 게 93년에서 94년 즈음이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객관적인 평가를 들어보기 위해 영화진흥공사 시나리오 공모전에 작품을 냈다. 사실 시나리오가 뭔지도 모르면서 타자기(그때까지만 해도 타자기로 글을 썼다)로 그냥 내 이야기를 쓰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처음 몇 번은 예선 탈락을 거듭하다가 차츰 32강, 24강에 들면서 성적이 좋아졌다. 그리고 <이중노출>이라는 시나리오는 8강에 들었다. 당선이 된 작품은 <무단횡단>이었는데 그것이 여섯번째 출품작이었고 방송용 각본까지 포함해서 내가 써본 열번째 작품이었다.

<무단횡단>도 캐릭터나 반추상적인 이미지들이 가득하다는 점에서 그 느낌이 지금의 내 영화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영화는 상처받은 두 남녀에 관한 로드 무비였다. 주인공은 결핍도 많고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채 폐암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인물인데 그런 한 남자가 서서히 한 여자를 만나 처음으로 여자에게 섹스를 제공받게 되면서 광기에 가까운 사랑을 하게 되고 운명을 같이하게 되는 이야기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섬>하고도 비슷하지만 지금 준비하고 있는 <실제상황>하고도 비슷하다.

처음 공모전에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 7월 21일이었는데 사실 그날이 공식적인 발표가 있기 하루 전날이었다. 그날도 언제나처럼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는데 시나리오 심사에 들어갔던 분 중의 한명이었던 시나리오 작가 윤삼육 선생님으로부터 삐삐 호출을 받았다. 그분 말씀이, "김지흠이라는 사람이 쓴 <무단횡단>이라는 제목의 시나리오가 하나 들어왔는데 누군지 알겠냐"는 거였다.

김지흠은 내가 쓴 가명이었다. 가명을 쓴 것은, 내가 수업을 들었던 시나리오 교육원의 시나리오 작가 선생님들이 공모전 심사에 자주 들어가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 실명일 경우 심사가 공정하지 않게 될 것 같아서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또 매번 탈락되는 익숙한 이름들은 역시 비슷한 수준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대충 심사를 해버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시치미를 때고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그 시나리오가 당선됐다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 바닥이 좁아서 대충 당선자들이 다 아는 사람들이었는데 선생님께서 김지흠은 누군지 암만 추적을 해도 감이 안 온다고 하셨다. "영호는 니가 이런 거 쓰는 거 봤다고 하던데 혹시 아니냐?" 그것이 윤삼육 선생님의 질문이었다.

시나리오 작가협회에서 같이 수업을 받았었던 유영호라는 사람의 작품이 가작이 되었는데 그가 내가 이런 내용의 시나리오를 쓰는 걸 봤다고 윤삼육 선생님께 말했었던 것 같다. 윤삼육 선생님은 자신이 시나리오 작가 교육원에서 수업을 했으니 혹시 당선자가 자기 제자가 아닐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전화를 한 것이었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씀을 드렸다.

당연히 자신이 가르친 제자가 1등으로 당선이 된 것이었으니까 선생님은 기뻐하셨지만 난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전까지 공모전에 응시하고 몇 번을 떨어졌기 때문에 당선이 될 거라는 기대는 해보지도 않았고 게다가 내 시나리오가 반추상에 가까웠기 때문에 영진공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채택되기도 힘들다고 생각했었다. 기분도 이상하고 이런 시나리오도 당선이 되나? 혹시 착오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나중에 시상할 때 천 오백만 원이나 되는 상금을 받고 나니까 그제서야 실감이 났다.

그런데 사실 그때 기뻐할 수만은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 시나리오를 이미 다른 사람에게 팔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선이 취소될 수도 있다는 자포자기의 심정도 있었던 것 같다. 정확하게 말하면 <무단횡단>을 팔았던 것은 아니고 <무단횡단> 바로 직전에 썼었던 <이중노출>을 팔았던 것이기는 했지만. 그 <이중노출>이라는 시나리오를 절반 정도를 개작한 것이 <무단횡단>이었다.

<이중노출>은 그 전해 영진공 시나리오 공모전에 출품했었던 것인데 최야성 감독이 시나리오를 보고 자신이 감독하겠다고 나서서 꼭 영화화하겠다는 조건을 걸고 50만 원에 판권을 넘겼었었다. 그런데 4, 5개월이 넘도록 나는 그로부터 20만 원 정도의 잔금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잔금도 받지 못한데다가 곧 제작에 들어간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 그 시나리오가 언제 영화로 제작될 지 알 수 없는 상태이고 해서 나는 답답한 마음에 다시 다듬어서 공모전에 냈던 것이다. 그런데 50만 원에 팔았던 시나리오를 개작한 작품이 덜컥 천 오백만 원짜리 대상에 당선이 되어버린 거다.

다행히도 내가 당선이 되었다는 결과를 알게 된 것은 공식적인 발표가 있기 하루 전이었다. 다음날이 되면 신문지상에 발표가 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사실을 알게 된 최야성 감독이 시나리오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소송까지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도 인간인 이상 천 오백 만원을 좀처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상금의 문제가 아니라 당선이라는 명예의 문제이기도 했다.

사실 최야성 감독이 그럴 사람은 아니지만 아무튼 당선이 취소될 수도 있는 문제였으니까. 혹시나 그럴수도 있는 상황을 방지해보자 라는 생각에서 최야성 감독에게 전화를 해서 선수를 쳤다. <이중노출> 시나리오의 잔금은 어떻게 할거냐, 영화 안 할거면 판권을 돌려받고 싶다고 최야성 감독에게 이야기했다. 그 대신에 위약금조로 100만 원을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당선 소식을 들은 날 나는 부랴부랴 100만 원을 빌리기 위해 돌아다녔다. 어렵사리 돈을 마련한 나는 그날 시나리오 판권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최야성 감독이 꼭 그 시나리오를 영화화하겠다고 하는 것을 굳이 내가 더 고쳐서 하겠다고 설득해서 말이다(웃음).

나중에 최야성 감독도 사실을 알게 되고 그래서 전화를 해서는 그럴 수 있느냐 라고 반 농담식으로 말을 했지만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작품에 대한 욕심이 있었지만 최야성 감독도 제작에 들어가는데 지지부진하게 시간만 흘러갔기 때문에 나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었고 또 영진공 당선이 나에게 더 좋은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집착하지 않은 것이다. 그게 너무 고맙다. 아무튼 그날은 당선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기분은 떨떠름한 날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무단횡단>도 예선 탈락했다가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박철수 감독이 나중에서야 내 작품을 보고 '이거 왜 탈락시켰냐 우리 다시 한 번 검토해보자'고 제안을 해서 결국엔 당선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무단횡단>은 정말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무단횡단>의 당선이 없었으면 <악어>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그런 배경 덕분에 시나리오를 들고 영화사에 직접 어필할 수도 있었고 나도 되는구나 라는 자신감도 얻을 수 있었으니까. 다만 아쉬운 점은 <무단횡단>이 아직까지도 영화화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영화진흥공사 시나리오 공모전에 당선이 되면 영화사에서 그 작품을 서로 가져가려고 재비뽑기를 했었다. <무단횡단>은 그 중에서도 경쟁률이 굉장히 높았는데 운 나쁘게도 가장 열악한 영화사에 낙찰이 된 것이었다. 역량이 되는 영화사가 가져갔으면 제작되었을 텐데 말이다.

여담이지만 지금은 입봉을 한 이상인 감독과 변혁 감독이 그 당시 데뷔작으로 <무단횡단>의 연출을 제안받았다. 이상인 감독은 이야기가 압축되어 있어서 자신은 이 시나리오 하나로 세 편의 영화를 만들 수 있겠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영화사와 맞지 않아서 제작하지 못했다. 변혁 감독은 그때 프랑스에 유학 중이었는데 역시 할까말까 망설이다가 조건이 안 좋아서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때 변혁 감독을 알게 되었고, <야생동물보호구역>을 찍을 때 프랑스에서 만날 수 있었다. 지금도 아주 친한 사이다. 그를 알게 된 것도 <무단횡단>을 통해 얻은 조그만 선물이다.

<글:키노-장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