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년 미국에서 돌아오면서 어떻게 하면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만 생각했다. 김성수, 이재용, 박헌수, 장기철 감독과 나 이렇게 다섯이 혜화동에 작은 사무실을 연 적이 있다. 그 건물 2층에 영화공간 1895가, 4층에는 신씨네가 있었는데 결국 몇 가지 시도 끝에 이 모임은 와해돼 버리고, 홍대 앞으로 옮겨진 2차 모임에 여균동 감독이 합세했다.

그때 신씨네로부터 '스커트 밑 극장'이라는 이름으로 다섯 명에게 옴니버스 영화 제의가 들어왔는데, 그 쪽에서는 영화의 내용이나 형식은 전적으로 연출자에게 맡긴다는 원칙을 두고 있었다. 심지어 나는 엘리엇의 시 「황무지」를 각색해서 만들어볼 생각을 했다(이건 내 꿈이기도 하다). 결국 무산됐지만(웃음).

94년까지 3년 동안은 심리적으로 매우 힘든 시기였다. 현실적으로 답이 안나온다는 절망에 사로잡혀 있었으니까. 그렇게 요구되어지는 영화로 장편영화 데뷔를 하느니 차라리 단편영화나 비디오 작업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게 시간이 갈수록 한편으로는 점점 더 영화에 대한 갈증이 절실해졌다. LA의 누아르트나 UCLA에서 보았던 영화들을 다시 볼 수는 없을까? 백두대간은 처음 그런 영화들을 소개해서 500만 원을 벌면 단편영화 한 편 찍고, 다행히 5억 정도의 수익이 난다면 35밀리 저예산 영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시작되었다.

94년 2월 베를린영화제 때 첫 구매를 시작했다. 그때 계약한 영화가 타르코프스키의 <희생>, 베르히만의 <화니와 알렉산더> 같은 영화들이다. 집에 팩스 한 대 놓고 시작해서 그해 여름 홍제동 주택가에 처음 사무실이라는 걸 차렸다. 말이 사무실이지 그냥 자그마한 셋방 정도였다. 유난히 더운 여름이었는데, 여직원 한 명은 에어컨이 없다는 이유로 3주 만에 그만뒀다(웃음). 정태성 이사와 단 둘이서, 목욕탕을 들락날락거리며 가까스로 버텼다. 정말 기록적인 더위였다.

사실 처음에는 1년 정도 세팅만 해주고 빠져 나올 생각이었다. 내 관심은 한국영화 제작에 있었으니까. 백두대간이라는 이름도 그런 뜻에서 지었다. 한국 영화를 만드는 중추 역할을 하자라는 의미에서. 95년 3월 대종상영화제에서 현대영화 베스트 7이라는 프로그램을 맡아 한 것이 첫번째 활동이었던 것 같다. 그때 수입해 놓은 영화 일곱 편을 상영하고, 11월 예술영화전용관 광장을 열었다.

<천국보다 낯선> 이후 두번째로 개봉한 <희생>이 2만 8천 명 들었고, 그 중에서도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는 가장 성공적이었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와 <올리브 나무 사이로>가 약 5만 정도가 들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숫자다(웃음).

나는 결코 계몽주의자가 아니다.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79학번인 내 세대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볼 수 있는 영화가 많지 않았다. 99퍼센트가 이런 영화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다. 프랑스 문화원 같은 곳을 자주 찾던 1퍼센트 정도의 사람들은 부르주아거나 제국주의자들로 치부되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러면서 다수가 접할 수 있는 영화는 헐리우드 영화가 거의 전부였다.

나는 영화 매니아도 아니었고, 영화를 많이 보지도 못했다. 영문학에서 영화로 뒤늦게 방향을 틀어 미국 유학을 떠났을 때도 작품을 찍겠다는 생각 같은 건 없었다. 그러다 그곳에서 정말로 좋은 영화들을 만나게 되었다. 비로소 영화가 나에게 문학작품에 대해 느꼈던 감동, 가령 엘리엇이나 조이스의 작품들을 보면서 느꼈던 그 희열을 느끼게 해준 것이다. 그 순간 영화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건 교육이 아닌 환경의 문제다. 사람들은 왜 백두대간은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포커스가 없는가를 말하는데 나는 그 자체가 우리의 색깔이라고 생각한다. <희생>을 예로 들어보자. 나 또한 이 영화를 보면서 졸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 10분의 감동은 정말로 위대하지 않은가? 나는 지금 우리의 상황 속에서 영화는 먼저 다양한 문화의 스펙트럼으로 보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예술 영화가 다 지루한 것은 아니다. '백두대간=예술 영화=재미 없고 지루하다'라는 등식이 성립돼 버린 상황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반성 중이다. 그런 영화들이 싸니까(웃음).

라이브러리 구축을 지금도 신경 쓰고 있는데, 만약 이 시스템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앞으로 10년, 20년 후에 시중에서 <피아노>나 <인생은 아름다워> 같은 영화를 보기는 힘들 것이다. 우리 나라 영화사 중 필름을 보관할 수 있는 곳이 거의 없다. 예전에 제인 캠피온 영화제를 할 때, <피아노> 상영시 관객들에게 전액 환불해 주는 사고가 일어난 적이 있다. <피아노>를 샀던 영화사로부터 바로 필름을 받아와서 틀었는데 이건 너무나 상해 있어서 도저히 볼 수 없는 지경이었던 거다.

우리 같은 경우는 영상 자료원에 기탁을 한다. 몇 백이든, 몇 천이든 그런 작품들은 사놓고 싶다는 게 개인적인 욕심이다. 남의 영화라도 사서 기증하고 보관해 놓고… 작년 11월 파리에서 「파리스코프」를 꺼내들었는데 그 도시에서 동시에 하고 있는 영화가 거의 300편이라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1910년대의 영화부터 현재의 영화까지, 지금 이 순간 한꺼번에 돌아간다고 생각했을 때 그네들의 문화, 한 명의 프랑스인이 가질 수 있는 감수성의 다양성과 상업영화만 개봉되거나 그나마 '지루하다'는 꼬리표가 붙은 예술 영화 한두 편이 개봉되는 서울에서 현재 살고 있는 사람의 감수성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는가.

백두대간의 기준은 하나다. 무조건 다양하게 소화하고 많이 보여주자. 그리고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측면에서 계속 영화를 볼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자. 올 가을쯤에 열, 태광에서 만드는 광화문의 극장에 백두대간의 영화가 계속 상영될 예정이다. 태광과 함께 일하기로 하면서 그 쪽에 제한한 게 1년에 10편씩 영화를 사고, 거기에 다른 영화사들의 10편의 영화까지 합쳐서 매년 20편 정도 보관을 해두자는 것이다. 앞으로 백년 후를 생각해보라. 그러면 2천 편의 라이브러리 구축이 되지 않겠는가? 그때가 되면 문화환경이 전혀 달라질 수 있다.

현재는 예산 문제로 힘들다는 입장인데, 향후 극장에 수익이 생기면 가능하다는 쪽으로 결론을 냈다. 지금 그 극장 지하에 항온 항습되는 보관실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라이브러리 구축은 장기적인 비전이 필요하다. 아무도 그런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처음부터 백두대간을 내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반으로 삼자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건 어떻게 일이 되어가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건데, <아름다운 시절>의 시나리오는 한국에 돌아온 직후부터 몇 군데 이야기를 했다가 성사되지 않았고 삼성과도 이야기가 있었으나 메리트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기회가 역전된 건 95년 여름 하틀리메릴 시나리오 콘테스트에서 상을 받으면서부터였다.

SKC가 제작을 한다고 나서고, 그러면서 내부에 기획, 홍보팀이 있으니까 함께 해보자고 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아름다운 시절>은 그런 방식이 아니었으면 완전 사장될 수도 있는 영화였다. 감독이자 프로듀서로서 개봉 시기 등 많은 걸 내 뜻대로 조절할 수 있었으니까. 그 방식이 좋을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되었든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이 큰 장점이 되었으니까.

백두대간은 내 영화만을 제작하는 회사는 아니다. 처음부터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 지금의 급선무는 다음 영화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이곳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한국 영화에서 제일 취약한 부분이 시나리오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한국 영화들은 시나리오를 쓸 줄 모른다. 물론 좋은 시나리오를 연출이 망칠 수도 있고, 모든 영화가 시나리오에 좌우되는 건 아니지만 그건 시나리오 자체가 어느 정도의 수준에 오른 이후의 문제다.

충무로 상업 영화들의 경우에도 대개의 드라마트루기가 아주 고답적이고 상투적이기 일쑤다. 현재 영화계에 7, 80퍼센트의 시나리오는 기본적인 훈련이 되지 않은 것들이다. 이를 문화 전반, 문학이나 연극계 등과 연계해서 그 아이디어를 흡수, 글쓰기의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과 영화적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까지 하나로 이어 시나리오가 쓰여질 수 있는 그런 창작 시스템을 만들자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1년에 10편 정도의 시나리오가 나온다면, 그 중 3, 4편은 영화화할 수 있도록.

내 자신의 영화는 좀 다른 방향으로 접근해 보아야 하지 않는가 생각 중이다. <아름다운 시간>을 만들면서 문학적 감수성과 영화적 감수성이 충돌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이번에는 철저히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몰두해보자는 생각이다. 아무 것도 준비된 것 없이 시작하려고 한다. 시나리오도 없고, 어떠한 패러다임으로부터도 벗어나. 촬영만 3년을 잡고 있는데 나는 이것이 마치 매일 아침 신문을 읽듯, 그 속에서 세상의 사건들을 보고 받아들이듯, 일종의 세상의 창과 같은 영화가 되기를 바란다.

<글:키노-이영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