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 여름에 박광수 감독이 나한테 <그 섬에 가고 싶다>의 현장에 들어오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박광수 감독을 안 건 그 이전이었다. 최인석이라는 친구가 <칠수와 만수>의 시나리오를 썼는데, <칠수와 만수> 시사회의 날 뒷풀이 때 포장마차에서 박광수 감독을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영화하는 사람들은 다 소통하기 힘든,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박 감독을 만나면서 그런 선입견이 모두 깨져버렸다. 우선 옷부터가 나보다 더 후졌고(웃음).

92년 초에 박광수 감독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 섬에 가고 싶다>를 영화화하고 싶다고 임철우를 만나게 해달라는 거였는데, 내가 그 책의 발문을 썼기 때문이었을 거다. 그렇게 대학로에서 두 사람의 다리를 놓아주기 위해 또 만났다. 그 뒤 임철우의 시나리오 초고가 나왔고 그걸 다시 써보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았다. 그때 내가 30대 후반이었는데 산다는 것에 대한 회의, 밑도 끝도 없는 회의에 빠져 있을 때였다. 시대적인 상황이나 나이로 볼 때 누구에게 진지하게 호소할 분위기도 아니었지만 나에게는 절실한 문제였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는 것.

내가 보기엔 90년대 들어와서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 이미 달라졌다라고 규정돼 있었다. 이건 좀 아니라는 존재론적 회의가 생겼지만 구체적인 대책은 없던 시절이었다. 80년대에 사회적 가치나 이상에 대한 추구 같은, 공적 열정이 내 글쓰기의 주요한 추동력으로 작용했는데 90년대 들어 작가로서의 내 내면의 열정은 사라져갔다. 설명하자면 긴데 아무튼 당시에 정체성의 혼란과 함께 글쓰기도 포함하여 삶의 방식에 대해 깊은 회의를 느끼던 때였다. 그래서 내 자신을 혹사시키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늘 '파리에 간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다.

사람들이 장정일이 파리에 간다면 다 믿는데 내가 말하니까 다 웃었다. 어울리지도 않고 갈 이유도 없고. 사람들이 그럴수록 더 욕망이 꿈틀거렸다. 상계동 아파트의 전세금을 뽑아서 가려고 했지만, 사람들이 파리에 가는 것에 대한 자세한 이유를 물어보면 말문이 막혔다. 당시는 제주도도 안 가 보고 비행기도 못 타본 때였다(웃음). 딱히 파리라는 목적지에 큰 의미를 두고 싶은 것은 아니었고, 내 고민과 회의를 씻어줄 돌파구 같은 거였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말이 되는 이유는 '영화 공부'를 하러 가는 것이었다. 영화 공부가 제일 쉬울 것이라고 생각해서 였다. 사실 난 영화광과는 거리가 멀었다. 순수 관객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양철북>과 <정복자 펠레> 같은 영화를 보며 뿅 갔고 <노스탤지어>를 보면서는 네 번을 잤다(웃음).

어떻게 보면 파리로 간다고 말하는 것 자체를 즐겼는지도 모른다. 정말 허황된 현실 일탈의 방법이었는데 박광수 감독도 만류했다. 그러면서 그전에 한국 영화 현장을 경험해 보라고 권유했다. 그게 바로 시작이었다. 그런데 당시는 <그 섬에 가고 싶다>가 실현될 지 안 될지 불확실한 상태였다. 사무실도 없어서 주로 다방에서 만나던 때였고, 헌팅 다니고 박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영화 수업을 단기 속성으로 받았다. 영화도 잘 모른 채 영상적 사고도 없이 시나리오를 썼기 때문인지 첫 시나리오부터 퇴짜맞았다. 박 감독이 그려내는 회화적 이미지와 나의 문학적 감수성이 잘 안 맞았던 것일까?

사실 나는 말만 조감독이지 견학생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를 포함해서 2명의 조감독이 있었는데 그 친구가 첫날에 바로 짤려버렸다. 그래서 황당하게도 졸지에 모든 것을 처리해야 됐는데, 프리 프로덕션 단계 때도 신문에 연재를 하고 있어서 잘 참여하지 못했던 터라 많이 힘들었다. 심지어 콘티에 나오는 몇몇 용어들은 알지도 못했다. '투샷'이라는 용어도 헷갈렸을 정도니까. 모르는데 아는 척 하기도 했다.

내 자신을 바닥에 굴리며 혹사시키고 싶다는 생각과 삶에 대한 회의는 현장에서 작업을 시작하며 깨끗이 해소되었다. 아주 충분히. 당시 <그 섬에 가고 싶다>의 현장을 취재왔던 한 후배는, 늦은 나이에 현장에 뛰어들어서 얼굴 시꺼멓게 그을린 채 빨간 메가폰 들고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고 힘든 일을 하는 나를 보고 '삶의 비애'를 느꼈다고 했다. 그런데 기술적 용어도 잘 모르면서 현장에선 웬지 늘 신이 났다. 당시엔 마음도 편했고 특별한 목표도 없이 아무런 생각 없이 열중할 수 있었다.

조감독 하면서 영화 찍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봤다. 실현 가능성도 없다고 생각했었고. 단지 현실적 고민에서 탈출하기 위한 방편으로 조감독 생활에 충실했을 뿐이다. 난 '아니면 말고 주의자'인데 내 영화를 찍고 싶다는 생각은 정말 하지 못했다. <초록 물고기> 때서야 내 작품을 한다는 '실감' 정도만 났을 뿐이다. 내가 처음에 하고자 했던 작품은 제목도 정하지 않은 채 그저 '시간이 거꾸로 가는 영화'였다. 후에 <박하사탕>이 되었던. 그러나 주위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내 영화를 제작해 주기로 약속했던 오랜 친구 명계남 씨도 나의 영화 설명을 들으며 졸고 있었다(웃음).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오죽했을까. 그래서 <초록 물고기>의 시나리오를 쓰게 되었다. 명계남은 82년에 처음 대학로에서 연극하는 친구들과 함께 만났다. 믿기 어렵겠지만 '동안'이었다.

내가 신일고 선생할 땐데 집은 과천이었다. 그때 명계남 씨의 첫사랑 이야기를 1박 2일 동안 들으면서 가까워졌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촬영 때 자개도라는 섬에서 명계남 씨와 술 마시고 선창에 가로누워 하늘의 별을 보았다. 그때 명계남 씨가 이 다음에 내 영화를 제작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쥐뿔도 없는 그였지만 나름대로 진정성은 있었던 것 같다.

<초록 물고기>의 시나리오를 80퍼센트 정도 완성했을 때 말이 안 된다고 절망했다. <그 섬에 가고 싶다>에서 열심히 했기 때문에 1차로 동정심 때문인지 문성근, 심혜진 등이 출연해 주기로 했고, 유영길 촬영감독님도 다음 작품은 이창동으로 하겠다고 못 박았던 때였다. 다들 바깥 사람이 외도하는 기분으로 영화를 하는 것은 아닐 거라고 믿어줬던 것 같다. 그래도 그때까지만 해도 현실성은 없었다.

오는 시나리오마다 거절한다던 한석규에게 무작정 시나리오를 넣었다가 '할 것처럼 연락'이 와서 갑자기 현실감이 생겨났다. 졸지에 빅 캐스팅이 되고 그러면서 난관 없이 진행되었다. 내가 연출에 들어가면서 세웠던 원칙은 '테크놀로지는 좆도 아니다'라는 거였다. 거기에 매이고 개념에 매이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감각과 미학적 기준, 그리고 자신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아닐까. 그 외의 것들은 부차적인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가진 것으로밖에 할 수 없다는 그런 생각들이 나를 자유롭게 만들었다. 말하자면 '무대포'였다.

요즘엔 주로 책 읽고 음악 듣고 색다른 구상을 하고 있는데 다시 소설을 쓰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이거 위험 신호인 것 같다. 난 내 무의식 속에서 영화에 대한 것들이 꿈틀거렸다고 굳게 믿고 있다. 소설가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내가 영화 현장에 들어온 걸 다들 궁금해 하는데 오히려 내가 묻고 싶다. 내가 글 쓰다가 막노동판에 들어갔다면 믿지 않을까?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치 않을까?

영화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어렸을 적부터 연극과는 친숙했다. 형을 통해 몸담았던 대구의 극단에서 포스터도 붙이고 전단도 붙이고 배우도 하고 연출도 하고. 오히려 소설보다 연극에 몸담았던 시기가 더 길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그런 예술 장르에 대한 것들이 무의식적으로 체질화되었던 것 같다. 이것저것 다 합친 종합 예술이 영화 아닌가? 그래서 처음에 영화라는 게, 영화 작업이라는 게 무섭지는 않았다. 뒤늦은 나이이긴 하지만 난 영화를 통하여 작가로서의 열정이 다시금 불붙은 것이다.

<글:키노-주성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