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에 영화아카데미 9기로 입학했다. 졸업하고 대우전자 홍보실을 1년 반 정도 다니다가 그만두었는데, 당시에 영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회사를 박차고 나온 건 아니었다. 사실 그 전에 취직도 우연한 기회에 하게 됐던 거고, 그저 전공을 살려 철학 공부를 더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 이었다. 사실 그 당시는 내 삶을 꾸려가기가 막막하고 답답하다고 느끼던 시절이었다.

대학원에 진학하고자 했던 이유도 딱히 어떤 사상이나 철학자를 깊이 연구해 보고 싶다는 순수한 학문적 열정이라기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내 존재에 대한 질문들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정작 시험 시기가 되어서는 대학원에 원서도 넣어보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다시 취직하려고 공부도 하고 이리저리 이력서도 많이 넣었는데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그런 현실적 고민을 하고 있을 때쯤 사촌동생과 선후배 사이였던, 영화아카데미 8기 박은영 씨가 나의 이런저런 고민들을 가만히 듣고 있더니 영화 아카데미라는 곳에 시험보길 권했다. 영화 아카데미라는 곳은 그때 처음 들었다. 딱히 영화라는 세계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던 마니아는 아니었지만, 들어가면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평소 방송국 PD 등 영상 분야에 대해 가지고 있던 소박한 관심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착실히 준비를 한 것도 아니어서 큰 기대는 가지지 않았다.

겨우 일주일 정도 준비하고 시험을 봤는데 문제에 나온 영화감독들 중에 모르는 감독도 있고 그래서 공백으로 남겨둔 부분도 제법 있었다. 그렇게 아무 생각없이 응시한거나 마찬가지인데도 운이 좋았는지 덜커덕 합격해 버렸다. 그때 내 나이 서른 살이었고 백수로 지낸 지 1년 여 지난 시점이었다. 그해가 아니었으면 나이 제한에 걸려 영화아카데미에 재도전 할 수도 없는 입장이니까 나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던 셈이다.

사실 영화아카데미에 합격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영화과나 영화 동아리 출신도 아니었고 주위에 그런 관심을 가진 친구들도 없었다. 게다가 나는 무언가에 푹 빠져서 깊이 파고드는 체질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난 이전까지 영화광이나 마니아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오히려 보통 사람들보다도 더 영화를 안 보고 살았던 것 같다.

당시에 인기 있었던 <지옥의 묵시록>도 못 봤을 정도니까. 특별히 기억나는 영화는 제대하고 나서 친구와 함께 우연한 기회에 보았던 장윤현 감독의 단편 <인재를 위하여>(87)다. 관람을 하고 난 뒤 나도 저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영화라는 세계는 아직 나와는 먼 곳에 있다는 생각을 버리진 못했다. 영화 아카데미에 들어가서는 언제나 공부를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제일 많아서인지 반장도 했는데 동기들이 타르코프스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잘 끼지도 못했다. 그렇게 늘 공부를 많이 해야겠다고 다짐은 했는데 게을러서 그런지 그것도 잘 안 됐다(웃음).

처음에 했던 작업이 다섯 컷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이었는데 참 재미있었다. 찍으면서 창피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영화라는 것이 이제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 번은 팀을 짜서 <사랑이 죄인가>라는 35밀리 작품의 연출을 맡았던 적이 있다. 춘천에서 로케를 하는데 유영길 촬영감독님도 오셔서 지도해 주셨고 다들 의욕에 넘쳐 있었다.

하지만 콘티를 치밀하게 짜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연출에는 별로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다른 친구에게 연출을 맡기고는 스탭들을 위해 햄버거를 사왔는데(웃음), 그 친구가 연출을 잘 하니까 옆에서 지켜보자니, 은근히 부럽기도 하고 영화에 대한 강한 의욕도 생겨났다. 졸업작품 준비할 때가 가장 재미있었던 것 같다. 서로 연출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일단 시나리오를 써와서 결정하자고 합의를 봤다.

당시에는 컴퓨터가 대중화되어 있을 때가 아니라서 연필로 일단 썼는데 내 시나리오가 행여 채택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불안했다. 그래서 급한 일이 있어 그러니 돈을 좀 달라고 아버지를 졸라서 워드프로세서 전용기를 샀다. 급하게 썼지만 재미있고 유익한 시간이었고 꼭 내 시나리오가 채택됐으면 하는 은근한 욕심이 생겼다.

그렇게 해서 나온 작품이 <고철을 위하여>다. 영화 작업을 하면서는 동료들과 며칠 밤을 새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런 과정에서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93년에 첫 상영회를 가졌다. 졸업 작품들 중에서 <고철을 위하여>가 마지막에 상영되었는데, 내 작품이 남들에게 보여지고 관객들과 교감을 나눈다는 사실이 너무 기분 좋았다.

코믹한 부분이 많은 영화이긴 했지만, 먼저 내가 재미있었고 당시 상영장의 분위기나 기억들은 <8월의 크리스마스>의 첫 시사회때보다도 더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들을 살피고 내 영화가 큰 화면으로 상영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앞으로 영화를 계속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게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 뒤 <그 섬에 가고 싶다>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연출부 일을 했다. 장편이 단편과 그렇게 다른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연출부 생활이 기억에 남을 만큼 재미있지도 않았고, 현장에서 능숙하게 일을 잘 하지도 못한 것 같아서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단편 시절에는 어떤 '재미'의 차원으로 작품에 접근했는데, 박광수 감독님 밑에서 일하면서 영화를 대하는 어떤 자세와 정신을 배운 것 같다.

주위에서도 그런 말들을 많이 하지만 박 감독님 연출부 출신들은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기질이나 몸짓, 디렉팅하는 방식 등 알게 모르게 닮아갔다. 나도 마찬가지고, 후배인 박흥식 감독의 경우는 전화받는 모습도 똑같다(웃음). 연출부 생활을 하면서 느낀 것은, 앞으로 자기 작품을 하는 데 있어서 확실한 세계관이나 주제의식이 없으면 하기 힘들 거라는 점이었다.

그때부터 영화에 대한 새로운 고민이 시작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꼭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당시에는 영화사에서 준비하는 일련의 기획 영화들에 대한 반감이 알게 모르게 있었다. 그 시스템 속에서 잘하지 못할 거란 생각도 했고. 그런 식으로 접근해 온 영화사들이 몇 있었는데, 그 중에서 다행히 우노필름이 내가 원하는 영화를 존중해 주었기에 <8월의 크리스마스>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내가 어떤 할 이야기가 많은 사람이라고는 생각치 않는다. 내가 무엇을 이야기하기 위해 영화라는 방식을 택했다기보다, 우연한 기회에 영화를 배우고 만들게 되면서 그 과정 속에서 재미를 느끼고 미학적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불현듯 나에게 찾아왔다. 영화아카데미에 가지 않았으면 난 지금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런 곳이 있다는 것도 주위에서 처음 얘기를 듣게 되었고 그래서 우연히 시험을 치게 된 것이니까. 합격하지 못했다면 다른 경로를 통하여 영화계에 진입했을 가능성도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나에게 있어 전혀 동떨어진 세계의 것이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됐던 정보와 시험 응시, 그에 따른 합격과 불합격의 발표 한 번이 나에게 있어서는 인생의 확실한 전환점이 된 것이다. 사람의 미래는 나이를 떠나서, 그 누구도 함부로 짐작해선 안 되는 일인 것 같다.

<글:키노-주성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