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년 <칠수와 만수>를 끝낸 직후 탄광촌에 들어갔다. 그때 고민을 많이 했다. <칠수와 만수>에서 내가 생각한 건 건강한 대중 영화였다. 그런데 흥행이 되지 않았다. 그런 것 때문에 영화적 완성도나 미학적 측면을 버린 게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관객을 나로 설정해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영화 매니아도 아닌데 나 같은 사람이 재미있다고 만들면 다른 사람들도 재미있어 하지 않을까(웃음)? <그들도 우리처럼>은 그런 점에서 일종의 기점이다.

속초에서 살던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통리로 전근을 가신 적이 있었다. 3학년 방학 때였던가? 어머니와 함께 그곳에 갔었는데 보자기를 들고 이고, 자갈 깔린 언덕을 한밤중에 걸어 올라가던 그 때의 기분은 마치 피난가는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 기억이 참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또 한 번은 얄라성 시절의 일인데, 당시 김민기 선배가 충청도 탄광에 있었다. 그와는 연우무대 때부터 함께 연극을 해서 잘 알고 있는 사이였는데 나는 탄광촌 다큐멘터리를 생각하고 그를 찾아갔다.

밥집에서 두부 부침 하나를 앞에 두고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시고 있을 때였다. 한 광부가 들어와서 물컵에 소주를 가득 부어 한 번에 쭈욱 들이키는 거다. 그 손톱 밑이 참 시커멓던 게 생생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때 든 생각이 탄광촌 이야기는 그곳에 사는 인부나 찍을 수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는 그냥 돌아왔는데, 그렇게 와서 찍은 영화가 소매치기 이야기를 다룬 단편 <그들도 우리처럼>이었다.

그런 기억들 때문에 나에게는 탄광촌이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도둑 이야기를 할까 했었다. 그러면서 대략적인 시나리오 구상 중에 우연히 최인석의 『새떼』를 읽게 되었다. 80년대 초 간첩단 사건을 다룬 소설이었는데 거기에서 인물을 가져왔다. 탄광촌이란 폐쇄된 공간이다. 그것이 당시 한국 사회의 알레고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때는 막 광업소 합리화 정책이 발표, 시행 단계에 이른 때였다.

80년대 말부터 동서 해빙 무대, 북방 외교가 등장하면서 중국, 러시아와의 무역이 시작되었다. 그러면서 정부 에너지 정책이 바뀌었다. 채탄성 없는 광업소들을 정부에서 문을 닫으라고 종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탄광촌의 문제는 그 전의 노동 문제의 차원과는 좀 성격이 달랐다. 기업주들은 일방적으로 문을 닫고 정부 보상을 받았다. 광부들만이 어느날 아침 갑자기 일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 연일 데모가 일어났다. 말하자면 당시는 한국의 전반적인 경제나 앞으로의 사회적 시스템의 변화를 예고하는 시대였다.

<칠수와 만수>를 하면서 두번째 계약을 했는데, 이 시나리오를 회사에서는 계속 흥행성이 없다고 봤다. 탄광촌과 운동권이 나오니까. 당시만 해도 검열이 있었는데다가 이런 소재가 재미가 있겠냐고 생각한 거다. 그래도 다방 레지가 나오니까 혹시 했었는데...(웃음).

완고만 12번 회사에 가져다 줬다. 처음부터 빨리 통과 안 되리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끈기로 밀어붙여보자는 생각이었다. 중간에는 시나리오만 갖다주니까 저쪽도 자꾸 둔해진다. 또 가져왔냐는 식으로. 그래서 헌팅 다니면서 찍은 사진으로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맞춰 사진첩으로 보여줬다. 몇 번의 헌팅에서는 문성근을 같이 데리고 가서 영화처럼 거기에 세워두고 찍었다. 카메라를 들고 처음 탄광촌에 들어갔을 때, 헌팅 며칠째인가 데모가 일어났다.

카메라를 들이대니까 반응들이 갑자기 험악해졌다. 신문기자인 줄 알고... 연출부 스탭 중에 그곳 출신의 스님 한 명이 있었는데 나서서 무마된 일도 있다. 그때는 아직 시드머니라고 준비 예산이 책정되지 않았을 때여서 헌팅은 자비로 다녀야 했다. 연출부로 같이 다녔던 친구들이 이현승, 김성수, 여균동, 박경희 등이었는데, 매번 전부는 못 데려가고 며칠 함께 지내다 올라가고 또 다른 친구들이 한 명씩 합류하는 식이었다.

강원도 전체 지도를 놓고 정선, 삼척, 영월, 사북, 태백 지역을 고스란히 걸어 다녔다. 카메라를 앞뒤로 다 비춰도 검은색이 보이는 곳을 찾아야 했으니까. 그러다가 고한이라는 곳을 찾았다. <아제아제 바라아제>도 거기에서 촬영한 걸로 알고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 제일 높은 기차역이 있는 곳이다. 앞에는 광업소가 있고 뒤편으로는 그 기차역을 끼고 계곡 어귀에 마을이 놓여 있다.

그렇게 1년 넘게 돌아다니다 보니까 촬영에 들어가서는 여러 모로 편했다. 내가 거지 같아 보이는지 무슨 영화감독이 그런 몰골이냐며 술까지 사줄 정도였으니까. 갱 속으로 두 번을 들어갔는데, 그곳은 정말 지옥 같은 곳이다. 광부들은 3교대 근무를 한다. 내려가고 올라오는 시간을 빼면 실제 일하는 시간은 한 4시간 정도가 되는 셈이다. 근데 그게 딱 한계다. 겨울에도 그 밑으로 내려가면 35도가 넘는다.

시각과 청각, 후각, 촉각이 모두 괴롭다. 물은 계속해서 떨어지고 밑은 질퍽거리고 무거운 장화를 신고 다녀야 하는데 잘못 들어가면 산소 공급이 안 되는 곳이 태반이다. 게다가 그 속은 먼지 구덩이다. 헬맷에 있는 불빛이 먼지가 꽉 찬 길을 만들어낸다. 좁고 시끄러운 소리들, 땀, 시큼한 냄새… 그런 경험과 함께 영화에서 시각 개념으로 설정한 것이 바로 그 희뿌연한 먼지다. 그리고나서 바다는 그 반대 개념으로 들어섰다.

처음 영화 제목을 정할 때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생각했다(웃음). 그 외에도 제목을 6개 정도 생각했는데 100명한테 전화를 걸어서 일일이 의견을 물어봤다. 근데 그 중 반 정도가 '그들도 우리처럼'이라는 제목이라면 보고 싶다고 대답하는 거다(웃음).

처음 생각한 건 검은색이 흰색으로 바뀌는 이미지였다. 가을에 촬영이 시작되어 김기영이 마을을 떠날 때쯤에는 이 검은 탄광촌이 하얗게 눈에 뒤덮이는 걸로. 그런데 촬영이 미뤄지면서 계절을 놓쳤다. 90년 4월에 촬영이 시작됐으니까 처음 설정의 반대가 된 셈이다. 한 달 만에 70퍼센트를 끝냈다. 사실 이 영화로 끝장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죽일 테면 죽여라 하는 기분으로 밀어부쳤다.

근데 그때가 분위기가 묘할 때였다. 검열에서 잘리긴 잘렸는데 협상이 가능했던 것이다. 김기영의 회상 장면에 광주가 있었다. 유영길 촬영감독이 CBS에 있을 시절 찍어 놓은 당시 필름인데 200만 원을 주고 사서 넣었는데 몽땅 잘려나갔다. 문성근의 경우도 그 전에 연우무대 때부터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는데 사실 <칠수와 만수>에서 캐스팅하려고 한 경우다.

당시는 그가 연기를 그만 둔 때여서 결국 두번째 영화에서 만나게 되었다. 김기영 역은 처음부터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가 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다. 그리고 도망가는 지식인의 이미지가 있어야 했고. 회사에서는 반대가 심했다. 지금은 그런 일이 없지만 당시만 해도 문익환 목사의 아들이라는 게 문제가 됐으니까.

반면 박중훈이 맡은 역으로 내정해두었던 건 최재성이었다. 미남 배우가 필요해서(웃음). 그런데 최재성이 「여명의 눈동자」를 한다고 텔레비전으로 가는 바람에 박중훈으로 바뀌었다. 심혜진을 캐스팅한 건 의외의 변수이긴 했다. 코카콜라 CF로 한창 인기를 끌 때였으니까. 요즘의 전지현 같은 이미지라고나 할까? 그런 여자를 인생 막장의 탄광촌 다방 레지로 캐스팅한다는 게 재미있을 것 같았다.

김기영이라는 인물이 탄광촌에 들어오는 걸로 시작해서 떠나면서 끝난다는 건 처음부터 생각해 놓은 건데, 마지막 장면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영화의 시간이 87년 대선 이후라는 건 중요한 코드다. 김기영이라는 인물이 87년 대선 이후 한국 사회를 다시 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다가 들어온 곳이 탄광촌이니까. 그 이야기는 다시 말해 그가 이곳을 떠나 또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게 원안이었는데, 촬영을 하면서 계속 어떻게 끝내야 한다는 데 대한 확신이 없었다. 라스트를 열어놓고 세 가지의 버전으로 찍었다. 다시 떠나는 것, 기차 역에서 끝나는 것,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연일 회의가 계속되었는데 결국 떠나는 것과 기차역에서 끝내는 것이 각각 3대 3이 되었다. 결과는? 마지막 순간 내가 결정한 건 떠나는 쪽이었다. 기차역에서 기다리는 건 너무 멜로적이지 않은가 싶었다. 그리고 6월에 촬영이 끝났다. 2년을 준비해서 2개월 동안의 촬영이 끝난 것이다.

<글:키노-이영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