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만들기 전에 주로 했던 일들이 연극, 선전 선동극, 멀티슬라이드 프로파간다 같은 주로 노동 관련 문화일 쪽이었다. 사회사진연구소와 사진통신에서 사진도 찍었는데, 현장이나 고아원에 가서 찍는 다큐멘터리 사진에는 별 매력을 못 느끼게 되었다.

그 다음에 생각한 게 포토 로망인데, 실제 배우나 실제 인물을 사진으로 찍어서 소설과 그 사진을 결합시키는 형태의 책이다. 송기원 씨의 『월문리 가는 길』이라는 소설을 가지고 만들어 볼까 하다가, 86~88년에 주로 총체극을 만드느라고 포기했다. 현장에서 파업이 생기면 달려가서 한 시간 반정도 하는 총체극을 만드는 것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웃음).

우리 배우들과 현장 사람들을 섞어서 노래와 춤을 결합해 만드는 연극 비슷한 선전물이었다. 그것 말고 또 주로 관심을 가졌던 것은, 배우의 슬라이드 사진을 포토 몽타주처럼 만들어서 멀티 프로젝트에 입력하여 슬라이드 쇼를 만드는 활동이었다. 그걸 이용하면 사람이 움직이는 모습이나 오버랩 기능까지도 가능했다. 아마 영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라면 그 작업을 해본 게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아닌가 싶다.

89년도 12월에 사진 작업을 정리할 때쯤, '눈빛'이라는 출판사를 만들어서 크리스 마커의 『북녘 사람들』과 사진집을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 하고 있는 이 작업들이 웬지 생명력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장르를 바꾸지 않으면 내가 소진해 버릴 것 같았다. 그때 영화를 한 번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 학교 선배였던 박광수 감독님에게 조언을 구하러 갔다.

첫째, 서울영상집단이나 장산곶매 같은 16밀리 영화 집단에 들어가서 원래 해왔던 작업과 연계되는 영화를 만드는 것, 둘째, 유학을 가서 영화를 공부하는 것, 셋째는 충무로 제도권 영화에 입성하는 것. 그런 3가지 길 중에 무엇을 택해야 할까 고민을 했다.

건방지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연출한다는 것에는 아무런 두려움이 없었다. 연극이나 슬라이드 제작과 많이 다를까 싶어서, 다른 사람들만큼 조심스러워하진 않았던 것 같다. 박광수 감독은 그 3가지를 다 해봤으니까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찾아간 날짜도 정확하게 기억하는데, 89년 12월 8일이었다. 당시 광수 형은 <그들도 우리처럼>을 준비 중이었는데, 자기 연출부를 해보지 않겠냐고 권유했다.

영화 속 주인공 김기영은 운동권 학생이어서 탄광촌으로 도피하는 역할이었는데, 본의 아니게 나도 1년 정도 도피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끌렸다. 괜히 유학이나 갔다가 거기서 공부 안 하고 놀다 망명할 것 같기도 하고, <그들도 우리처럼> 같은 영화를 기성 제도권에서 찍을 수 있다면 굳이 16밀리 영화 집단을 고집할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 그래서 그날 부로, 89년 12월 8일부터 연출부의 일을 시작하게 된 거다.

그때 나름대로 결심한 부분은, 데뷔하기 전에는 이전에 알던 사람들을 절대 안 만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때가 32세여서 연출부 중에서 나이도 제일 많았고(심지어 조감독이던 이현승은 나보다 2살 어린 친구였으니까), 여기서 좌절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절박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비밀인데, <그들도 우리처럼> 팀에 들어가기 이전에도 영화를 어떻게 찍는 건지 너무 궁금해서, 장선우 감독이 <우묵배미의 사랑>을 시작할 무렵 내가 스틸 사진을 찍겠다고 졸랐다. 영화를 어떻게 만드는 건지 처음부터 끝까지 구경해 보고 싶었다.

내 장점 중의 하나가 어깨 너머로 배우는 게 빠르다는 점이다(웃음). 사진도 그렇게 일주일만에 배워서 카탈로그를 제작할 정도였다. 생각해 보면 굉장히 어려운 일인데도 멋모르고 쉽게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장 감독은 그러라고 승낙을 했고 나는 영화 구경을 한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촬영 첫날, 새벽 6시에 영화사 앞으로 집합했어야 했는데, 새벽 3시에 잠이 깨긴 했는데 다시 잠이 드는 바람에 오전 11시에 눈을 떴다. 그냥 잘렸지 뭐(웃음).

그때 만일 스틸 작업을 했으면 그 다음에 영화를 안 했을지도 모르겠다. 성격상 금새 싫증을 느꼈을 거고, 스틸은 사진의 연장선상에 있으니까 언제든 돌아갈 곳을 마련해 두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박광수 감독의 연출부를 시작하면서 이제는 모든 걸 접고 독하게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사진기와 필름도 친구들에게 모두 나눠주었다.

1990년 12월 30일에 전두환이 백담사에서 내려오던 날, 전주 감옥소 탈옥 사건이 터졌고, 방송사상 최초로 사람이 총격당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실제로 <세상 밖으로>에 나오는 총격 장면도 필름에 남아 있는 그 사건과 똑같이 찍었다. 내가 봤을 때 그 사건에는 미스터리한 구석이 몇 가지 있었는데, 예를 들어 탈옥했던 세 명 중에 2명은 무기수였고 한 명은 복역 기간이 6개월 남은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탈옥할 이유가 없는데 왜 탈옥했을까? 게다가 나중에 그 사람만 자수를 하고 나머지 2명은 죽었다. 그렇다면 그의 정체는 프락치였을까? 그런데 또 그가 자수한 다음에 잡혀가면서 2명을 돌아보는 장면을 찍은 방송사 필름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눈에 진심이 있더라. 프락치였다가 그런 진심이 생긴 걸까? 프락치가 아닌가? 하는 의문에서 출발하여 코스타 가브라스 같은 음흉한 정치 폭로극을 만들어볼까 하고 문성근과 술 마시면서 이야기했다(웃음).

처음에 구상했던 것은, 무기수 중 한 명이 윗사람에게 불려가서 술도 먹고 고기도 먹고 여자와 자게 되고, 그런 식으로 세상 맛을 조금씩 보여주면서 조용히 사는 사람을 망가뜨리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을 밖으로 부르는 기간을 늘였다 줄였다 하면서 이 무기수는 거의 미치기 직전이 된다.

실제로 사형수 같은 사람을 특수 부대에 데려가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는데, 이제 이 사람을 그렇게 이용하는 거다. 탈옥하는 방법은 도와줄 테니 서울까지는 알아서 와라, 그리고 김 씨를 찾으면 넌 자유의 몸이고, 오다가 잡히거나 그러면 그건 네 책임이니까 한 번 해보라는 지령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 사람이 겨우겨우 서울에 도착하는 순간 죽여버린다. 군사 정권에서는 시선 돌리기용 여론 조작 시나리오가 많으니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노태우 정권이었으면 찍었을 텐데, 갑자기 문민정부라는 김영삼 정부가 되어버려서 재미가 없어졌다. 그래서 걔들은 도망가게 놔두고, 얼결에 따라나온 멍청한 죄수들 이야기를 해보자(웃음), 그렇게 <세상 밖으로>가 시작되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70년대 이전에 문화로 운동할 수 있다는 개념은 대단히 생소한 것이어서 기껏 중국의 문화혁명 정도를 떠올리는 정도였다. 하지만 70년대 후반부터 문화운동이 활발해졌고, 각 예술 장르의 사람들이 문화운동이라는 개념하에 뭉쳐서 초장르적인 활동을 펼쳤다. 내가 80년대 초에 연우무대 들어갔을 때도, 연우는 화가나 춤꾼과 연극인들이 다 합쳐진 총체적인 문화 집단이었다.

하나의 연극을 만들더라도 각 장르의 사람들이 어울려서 일을 했다. 내게는 참 훌륭한 경험이었는데, 그렇게 넘나드는 사람들을 다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또 있을까. 김민기부터 이상우까지 다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시대마다 각 장르의 헤게모니가 연극, 미술, 춤, 이미지 쪽으로 주도권이 넘어갔던 것 같다. 나 역시 뭔가 가장 영향력 있고 설득력 있고 파워풀한 것으로 계속 옮겨다녔던 것 같은데, 그것이 마지막에는 영화로 귀착되었다.

어릴 때부터 영화를 해야지 했던 게 아니라, 그냥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그 흐름에 따라갔던 셈이다. 아직까지 영화는 유효한 장르인 것 같고, 옮겨온 장르 중에 가장 오래하기도 했다. 대중적, 산업적, 예술적으로 아직까지 해볼 게 많고 중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장르인 것 같다. 그런데 다른 중심적인 뭔가가 또 생기면 배반하고 도망가지 않을까?(웃음)

내가 영화를 찍으면서 뭘 말하고 싶었을까. 처음엔 세상과 사람에 대한 관심, 그 다음엔 내가 왜 영화를 할까 하는 고민, 이번엔 사랑이 뭘까 하는 궁금증으로 영화를 만든 것 같다. 관심 생기는 대로 옮겨다니는 편이다.

아직도 머리 속으로 구상 중인 몇 개의 그림이 있다. 춤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있다. 내가 영화를 잘 못 만들긴 하지만, 만들고 싶은 걸 다 만들라고 누군가가 돈을 줬으면 좋겠다(웃음). 한 30개는 되는데 말이야. 나처럼 별 깊이 없이 그냥 좋아서 영화 만드는 사람도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세상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웃음).

<글:키노-김용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