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년에 <남부군>을 찍기 전에 경찰서에서 UIP 직배 극장에 뱀을 풀어 넣은 혐의로 조사를 받다가 풀려났다. 그 다음 8월 13일에 직배 극장 방화사건이 터졌고 누군가의 판단에 저 사람을 족치면 방화사건 주모자도 나오겠다 싶어서 나를 찍었던 것 같다. 9월 초에, 4일경인가 그때 여름 장면을 찍어야 될 게 하나 남았고 가을, 겨울 장면 촬영이 남았는데, 거기가 보경사 계곡이었다. 300명의 남녀 빨치산들이 목욕하는 장면이었고, 내가 거기서 이현상 역을 맡아서 뒷모습으로 출연도 했었다(웃음).

목욕하는 장면 한 씬이긴 했는데, 300명을 지휘하기가 힘이 들어서 그날 해 떨어지기 전에 이걸 꼭 다 찍는다고 원칙을 세워두고, 계곡에 쫙 배치하여 찍고 있었다. 점심 시간 조금 지나서 연출부가 형사들이 왔다고 그러더라. 형사들한테 웬일이냐고 그랬더니 큰일났다고 올라가야 된다고 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까 신문을 보여주는데, 조선일보 사회면 사이드 톱으로 정지영 감독 구속이라고 돼있는 거라. 이렇게 신문에 나버렸다고, 그래서 난 여기서 촬영하고 있는데 기사가 잘못된 걸 가지고 여기까지 내려왔냐고 하니까, 자기들이 곤란해진다고 좀 봐 달라고 했다. 당신들이 나 혐의 없다고 풀어줘서 촬영하고 있는 건데 당신들이 곤란할 게 뭐 있냐고. 그래서 오늘 촬영 끝내고 내일 전투 장면 하나만 찍으면 여름 장면 끝이니까 그것만 찍고 올라가자고 그랬더니, 곤란해 했다.

내가 안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뭐가 곤란하냐고 슬슬 달래면서, 그날 촬영을 마치고 여관 가서 밥 먹고 여기서 하루 동안 촬영 구경이나 하라고 했는데, 갑자기 정복 경찰관이 나타났다. 밑에 있는 파출소에서 왔다고, 서울에서 빨리 올라오라고 연락이 왔다고 그랬다.

내가 봤을 땐 어쩐지 쇼인 것 같았다. 신문 읽는 사람들한텐 난 이미 구속되어 있는 건데 내가 현장에 있으면 모순이니까, 그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그렇게 신문에 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를 더 조사해 주길 원하는 누군가가 신문에 흘린 거겠지. 안 그러면 그렇게 조급하게 굴 이유가 없었다. 단지 지금이 9월 초인데 남아 있는 여름 전투 씬을 언제 찍나 걱정은 되었다. 그래서 서울 근교 산에서 전투 씬을 따로 찍어야겠다 싶어서, 그 다음날 영화 팀들도 철수시키고 형사들이랑 같이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부터 조사받기 시작해서, 두 달 동안 구치소에 있었다. 감옥에 있을 때는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감옥이라는 공간에서는 나이를 가리지 않고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열 아홉 살짜리부터 노인네까지, 다양한 직업과 연령과 캐릭터들을 짧은 기간 동안에 다 만나본 거다. 또 감방 입구 쪽에 독방이 있는데, 대개는 집시법 위반으로 들어온 양심범들과 학생들이었다.

이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와 주고 신문도 갖다주더라. 감방 내부에서도 대우받고 동 전체에서도 대우받고. 하지만 난 얼른 나가야 될 사람이고 마냥 재미있어 할 수 없으니까, 빨리 나가서 가을 장면을 찍어야 하는데 구치소 밖으로 보이는 청계산이 갈수록 노랗게 물들어갔다. 찍어야 할 가을 장면도 많은데 언제 할까 초조해지길래 집필허가 받아 독방으로 옮겨서 가을 장면 콘티를 다 짰다.

두 달 간의 그곳 생활이 나한테 어떤 구체적인 영향을 미쳤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 경험이 내게 소중했고, 그 이후 작품 활동에도 플러스 알파가 됐던 것 같다. 그때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그 이후 영화 속 곳곳에 그 사람들이 반영되었던 것 같다. 10월 말 11월 초에 거기서 나왔더니 초겨울이었다. 헌팅도 안 한 상태고, 무조건 거대 군단을 이끌고 남쪽으로 갔다. 최남단에 있는 큰 산이 월출산인데, 거기서 찍었다. 헌팅을 전라도에 있는 산으로 한 번 갔었는데 아직 단풍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서울 가서 빨리 준비시키고 내려왔는데 그 사이에 단풍이 다 져버렸더라.

할 수 없이 무조건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월출산에서 자리잡고 촬영했다. 지난번에 못 찍은 여름 전투 씬을 찍으려고 소나무 밭에서 배우들 입 안에 얼음 하나씩 넣고 입김 안 나게 해서 촬영했다(웃음).

<남부군>에 참여했던 사람들한테 참 고마운 게, 언제 나올지 기약도 없는데 다른 일 안 하고 계속 기다려줬다. 내가 구속되면서 오히려 배우들과 스탭들의 결속력을 강화시켜준 것 같다. <남부군>이라는 영화가 잘 나와야 된다는 의무감을 확고하게 만들어주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됐다. 그때 처음 찍을 때부터도 말이 많았고 내가 구속됐을 때는 UIP 직배사건 때문이 아니라 <남부군>을 중단시키기 위한 시도라는 소문도 돌고 그랬다.

소문대로 부당한 압력이었다면 우리는 그걸 이겨낸 거다. 사람들이 자주 <남부군>이 내 전작들하고 단절된 거라고 이야기하는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80년대에 영화 찍던 사람인데, 그 10년 동안 어떤 감독도 영화를 통해서 정치적 사회적 발언을 할 수가 없었다. 87년도에 <거리의 악사>를 찍을 때 데모하는 장면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면서 표현할 수 없을까, 무허가촌을 불도저가 미는 장면을 어떻게 안 잘리면서 관객들에게 전달하느냐 이걸 고민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리고 말았다.

스토리가 말이 안 되지. 그런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하고 싶다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럼 <남부군> 찍을 땐 시대가 좋아진 건가? 중요한 건 『남부군』이라는 책이 일단 출판이 되었다는 것과 많은 식자들에게 문제작으로 읽혔다는 사실이 나한테는 고무적이었다. 나로서는 식자들뿐 아니라 이런 분단 사회의 비극을 대중들한테도 널리 알리고 싶었고. 그러니까 단순하게 책이 나왔는데 영화로 왜 못 만들겠나 하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물론 그 당시에 책으로는 나왔는데 영화로 못 만든 『붉은 방』이나 『삼청교육대』 같은 작품도 많다. 조금 민감한 부분을 영화로 만든다고 하면 회사로 정치적 압박이 오기 마련인데, 내가 영화사를 아예 하나 만들어 버리고 나니까 위에서부터 오는 정치적 압박이 없어서 그게 편했다. 또 난 원래 성격이 낙천적이라 일단 만들어서 문제가 생기면 싸우면 되지 하는 생각도 했고, 만일에 심의에서 문제가 생기면 『남부군』을 읽은 많은 지식인들이 내 편이 돼줄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 영화 만들 때까지 밀어붙였다. 내가 무슨 용공 작품을 만든 것도 아니고, 난 꽤 객관적으로 접근했으니까. 다행히 심의가 무삭제 통과되었다.

근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긴 게, 막상 극장에 걸리니까 관객들 반응이 의외였다. 빨치산이 국군 보루대 공격할 때 중고등학생들이 박수를 쳤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었는데, 그런 게 좀 문제가 되었다. 이런 작품이 어떻게 나올 수 있었나 하고 여기저기서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시작은 참 소박했던 것 같다.

87년도에 직선제를 한다고 약속했다가 다시 간접 선거를 치른다고 말을 바꾸니까 각계 각층에서 호헌 철폐 운동을 벌였다. 문화계에선 만화가나 미술가 모두 나름의 운동을 하는데 영화 쪽 사람들만 가만 있길래 답답했다. 왜 선배들이 움직이지 않나 싶어서 결국 몇 명이 모여서 사무실 차리고 전화로 연락 돌리고 시국선언을 한 거다.

엄청난 결심으로 시작했다기보다는 해보지 뭐 이런 생각이었는데, 사람들한테 설득하다보니 만만찮다는 걸 느꼈다. 거기서 정지영 감독이 앞장선다 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되었던 것 같다. 영화법 개정 문제만 해도 87년까지 영화인들은 전혀 관심이 없다가 88년도부터 현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제 미국 영화가 직배로 들어온다는데 이 사실이 영화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또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어떤 것인가를 인식하게 된 것이다. 마침 그때 민예총이 생기면서 영화인들이 부분적으로 참여하게 됐고, 그 동안의 소극적이고 피동적인 태도가 그때부터 바뀌었다.

어쩌다 보니 내가 영화 운동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어버렸는데, 나는 애초에 이기적인 생각으로 시작했다. 감독한테 표현의 자유를 확보해 주는 게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돼 있다는 지점에서 시작했다. 그렇게 소박하게 출발한 활동인데, 법개정 투쟁과 직배 반대 투쟁을 거치다 보니까 엄청난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띠고 있더라. 처음에 내가 그렇게 시작했으니 그 다음부터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던 거다(웃음).

이젠 많은 후배 전사들이 생겼으니까 서서히 벗어나서 후배한테 물려줘도 될 것 같고, 그런 문제에 대해서 영화계가 외면하진 않을 거라는 믿음도 든다.

<글:키노-김용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