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는 영화의 모태다. 최근 몇 년간 한국영화의 장르와 소재가 다양해졌고 완성도 또한 높아졌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 것은 일정 부분 시나리오 작가들의 역량과 충무로 시나리오 시스템의 발전에 힘입은 바 크다. 빠르게 변화하는 관객들의 기호와 감각을 포착해서 아이디어로 발전시키고 그것에 영양가 있는 살을 붙일 줄 아는 작가들이 그만큼 늘어났다는 얘기다. 실제로 지금 충무로의 주류 영화들을 생산해내는 영화사에는 중견작가들과 함께 3-5년 경력의 젊고 싱싱한 작가들이 아이디어 테이블을 주도하고 있다. 충무로는 지금, 시나리오 생산 시스템의 변화기에 놓여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직은 조짐에 불과할 뿐이며 시스템이 안착하기까지 갈길은 멀다.

지난해 대기업들이 구조조정을 거치며 줄줄이 충무로를 빠져나갈 때 충무로는 두 가지 고민에 휩싸였다. 한 가지는 대기업의 공백을 메울 대안을 찾는 것이었고, 또 한 가지는 시나리오가 없다는 것이었다. 첫번째 고민은 어렵지 않게 돌파구를 찾았다. 대기업이 빠져나간 무주공산을 금융자본이 앞다퉈 채웠고 정부 역시 대대적인 영화 산업 진흥책을 쏟아놓았다. '충무로에는 눈 먼 돈이 굴러다닌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자본은 풍성했다. 그러나 시나리오는 아무리 덩치가 큰 뭉칫돈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지난해 <쉬리> 신화가 무르익을 무렵 삼성영상사업단의 한국영화 제작팀장이었던 노종윤 과장은 당시 상황을 한 마디로 요약했다. '돈은 넘치는데 시나리오가 없다'는 것이다. 충무로에서 가장 많은 시나리오를 받아본다는 시네마서비스의 강우석 감독조차 걱정하는 소리를 했다. '없다. 정말 시나리오가 없다'는 것이 그의 푸념이다. 한해에 제작되는 한국영화의 제작 편수가 줄어드는 이유 가운데는 마땅한 시나리오가 없는 현실도 한가지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현장과 유리된 공모전

현재 충무로에서 시나리오가 생산되는 경로는 크게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은 각종 공모전이다. 영화진흥위원회 (이하 영진위)에서 1년에 두차례 실시하는 시나리오 공모전을 비롯해 (주)유니코리아 문예투자(대표 염태순)에서 실시하는 아이찜 시나리오 공모전, 막동이 시나리오 공모전, 청룡영화상 시나리오 공모전, SBS와 중앙일보가 공동 주관하는 시나리오 공모전등이 대표적인 공모전이다. 이외 각종 영화사에서 비정기적으로 실시하는 공모전과 <동아일보>와 <스포츠서울> 신춘문예까지 합하면 적지 않은 공모전이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모전에서 당선된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지는 경우는 매우 드물 뿐만 아니라 시간도 오래 걸린다. 근 몇 년간 공모전을 통해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은 <조용한 가족> <건축무한 육면각체의 비밀> <송어> <얼굴> <자귀모> 정도에 불과하다.

지난해 아이찜 시나리오 공모전에 참여한 작품수가 714편, 영진위 공모전에 출품된 작품이 601편인 것에 비하면 결코 많은 숫자가 아니다. <링> <텔 미 썸딩>을 쓴 공수창 작가는 "후배들이 영진위 공모전에 응모한다고 하면 말린다.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어렵고 간혹 저작권을 보호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지적했다. <접속> <텔 미 썸딩>의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한 김은정 작가는 "대부분은 함량 미달인 작품이 많다. 현실적으로 공모전을 통해 충무로에 입문하는 경우보다 아는 사람을 통해 데뷔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공모전에서 당선된 작품들이 영화 제작 현장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다는 데 있다.

작가와 영화 제작사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대부분의 공모전을 통해 당선된 작품의 저작권이 공모전을 주최한 기관에 귀속된다는 데 있다. 공모전을 주최한 기관이 작품을 뽑아놓고 사후 관리에 소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영진위는 다음 공모전부터 당선작의 저작권을 작가가 소유하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중이다.

영진위의 김혜준 영화정책 실장은 "당선작의 저작권을 작가에게 줌으로써 작가 스스로 마음에 드는 감독이나 프로듀서를 찾아다닐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을 계획이다. 당선작들을 책으로 만들어 충무로와 당선작들의 접촉 빈도도 높일 계획이다"라고 설명했다.

최근 영상시나리오작가협회(이하 작가협회)는 '시나리오 뱅크제도'를 추진중이다. 이 제도의 취지는 역량있는 작가들의 시나리오를 발굴해 축적시키고 작가협회가 저작권을 위탁받아 작품 또는 작가와 영화사를 적극적으로 연결시켜 주겠다는 것이다. 이 제도가 실행돼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지는 미지수지만 전문 에이전트를 통해 시나리오와 스튜디오를 적극적으로 연결시켜주는 할리우드의 시나리오 수습 시스템을 감안하면 작가협회의 구상은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안정적인 작가료 정착 시급

현업에서 일하고 있는 작가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충무로에서 좋은 시나리오 작가가 나올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시나리오 작가들에 대한 대우가 개선되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현재 충무로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나리오 작가는 줄잡아 50-60명선, 이 가운데 시나리오 전업작가는 고작 10명도 채 되지 않는다.

현재 대표적인 시나리오 작가로 불리는 공수창 김대우 김은정 박계옥 박정우 심산 심혜원 육상효 오시욱 조명주 지상학 등의 작가들 가운데서도 생활이 어렵다고 고충을 토로하는 작가들이 있는 형편이고보면 작가들의 생활고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더구나 김수현 서영명 문영남 노희경 송지나 김운경 등 이른바 특A급으로 분류되는 방송 작가들이 60회 정도의 주말극을 쓰는 대가로 받는 작가료가 최고 수억원을 호가하는 현실에서 시나리오 작가들의 상대적인 박탈감과 자괴감은 심각하다.

현재 신인 작가가 초고를 완성했을 때 받는 작가료는 대략 1000만원-1500만원 수준. 그나마 이 정도면 잘 받는 것이고 이보다 못 받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보통 시나리오 작업이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2년이 걸리는 상황을 감안하면 매우 열악한 수준이다. 일례로 모두 6명의 작가가 투입된 <텔 미 썸딩>의 시나리오가 완성되는 데 영화사가 작가들에게 지출한 비용은 진행비를 포함해 5-6천만원에 불과하다.배우의 개런티가 3억원(러닝 개런티는 별도)과 비교하면 초라한 수준이다. 그나마 <텔 미 썸딩>의 제작사는 제 때 작가료를 지불했지만 영세한 영화사 가운데는 지불을 미루는 경우도 허다하다.

97년에 데뷔해 히트작도 내고 이제 충무로에서는 꽤 알려진 한 작가는 자조 섞인 말로 "올해의 목표는 입에 풀칠하는 거다. 감독들의 개런티나 기술 분야의 스태프들에 대한 대우가 꾸준히 좋아지고 있지만 아직도 작가들에 대한 대우는 제자리걸음이다. 신인 작가들은 방송을 기웃거리거나 다른 일을 하지 않으면 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라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작가들의 경제적인 지위 향상을 위해서는 초기 작가료를 낮춰 작품에 대한 위험부담을 공유하되 영화가 흥행에 성공할 경우 성과금을 주는 러닝 계약 방식도 고려해볼 만하다. 시나리오 작가들이 영화에 전념하려면 작가료를 현실화하고 안정적인 작가료 지급 시스템을 정착시켜야 한다는 것이 대체적인 지적이다. 안정적인 작가료 시스템을 위해서는 영화사와 작가 사이에 전속 개념의 유대관계를 확립하고 장기적으로 전속 작가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 유력한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범적인 사례를 강제규 필름, 우노 필름, 명필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는 "신인 작가들을 발탁하고 키우는 데 인색한 영화사들의 태도는 문제가 있다. 작가에 대한 투자는 장기적으로 긍정적인 결과를 낳는다"고 지적했다.


전속 작가 시스템 장점 많아

강제규 필름은 '드림팀 구성'을 기치로 지난해 말 공채 형식을 통해 6명의 시나리오 작가를 뽑았다. 이들 작가들은 전속 개념은 아니지만 강제규 필름에서 진행하는 모든 프로젝트에 공동 또는 분업으로 참여한다. 연봉이나 월급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한 프로젝트에 참여할 때마다 다른 영화사에 비해 높은 수준의 계약금을 받는다. 자신의 작품이 영화화돼 흥행에 성공할 경우 성과금을 받는 인센티브 제도도 도입하고 있다. 작가들의 아이디어에 철저한 저작권 개념을 적용해 권리를 보장하는 것도 특기할만하다.

영화사에서는 일종의 작가실을 만들어 작가들에게 컴퓨터를 제공해 편안하게 일할 수 있는 쾌적한 공간을 마련해줬다. 강제규 필름의 김선미 작가는 "전속 개념은 아니지만 거의 식구 개념으로 함께 일하고 있다. 대우도 다른데 비해 상대적으로 좋은 편이다. 무엇보다 안정적으로 일에 전념할 수 있어서 좋다"라고 말했다.

우노필름(대표 차승재)도 좋은 사례로 꼽힌다. 주변에 사람이 많이 몰리기로 유명한 차승재 대표는 신인 작가들을 발굴해 우노 필름에서 만드는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에 공동으로 참여시킨다. 이러한 현장 경험을 통해 작가들은 실질적인 시나리오 수업을 쌓을 수 있다. 우노필름 역시 계약서 상으로 전속 계약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구두 형태로나마 한 식구 개념으로 작가들을 육성하며 이들에게 연출의 기회도 주고 있다. 김상진 장문일 장준환 봉준호 박계옥 등이 우노필름에서 활동한 작가들이고 이들 가운데 김상진 장문일 봉준호는 감독으로 데뷔했다.

우노필름 외에도 명필름이 김현석 작가와 5년 넘게 일하며 <공동경비구역 JSA>집필 이후 김작가의 감독 데뷔작을 준비중이다. 또한 영진위 시나리오 공모전을 통해 이영종 작가를 발굴, 함께 일하고 있다. 씨 엔 필름(대표 장윤현)도 김은정, 인은아 작가와 가전속 개념으로 함께 작업하고 있다. 씨 엔 필름 기획실의 최기덕 실장은 "한 작가와 오랜 기간 함께 일하면 많은 장점이 있다. 아이디어를 공유하기도 쉽고 호흡도 맞추기 쉽다.

몇몇 큰 영화사를 중심으로 작가들과 전속 개념으로 일하는 추세가 늘고 있다. 이런 시스템이 정착되면 영화사와 작가에게 서로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인은아 작가는 "더 나아가 연봉 계약 형식으로 영화사와 작가가 함께 공존하는 시스템이 정착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작가에 대한 인식 바꿔야

무엇보다 한국영화의 시나리오가 발전하려면 시나리오 작가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많은 작가들은 영화사와의 계약조건에 불만을 갖고 있다. 작가들이 지적하는 불공정 사례는 '갑(고용자)이 만족할 때까지 을(피고용자)은 작품을 쓴다'는 조항이나 작가측의 사유로 계약이 파기되었을 경우 3배의 위약금을 물도록 하면서 영화사측의 사유로 계약이 파기될 경우 작가에게 아무런 보상 조건도 명시하지 않는 등의 경우다. 한정된 계약금 안에서 작가의 노동력을 최대한 뽑아내겠다는 속셈인 것이다.

시나리오 작업 단계를 철저하게 나누고 각 단계의 프로젝트마다 작가들과 정확하게 계약하는 할리우드 시스템과 대조되는 대목이다. 작가들은 이러한 계약 관행을 두고 '불평등 계약', 심하게는 '노비 문서'라고까지 얘기한다. 한 작가는 "심할 경우 모멸감을 느낀다. 계약 조건도 불평등하지만 작가는 감독, 프로듀서, 제작자 등 여러 사람에게 치이면서도 작품이 잘 될 경우 인정도 못 받고 묻혀버린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와 관련해 작가협회는 작가들이 합리적이고 공정한 룰에 따라 영화사와 계약을 맺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표준각본 계약서'를 만들고 있다. 이 계약서는 극영화 각본료의 최저 수준을 보장하고 작가의 저작권을 보호함으로써, 영화의 비디오 판권 계약이나 TV판권 계약시, 작가에게 일정 비율의 저작권료를 보장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공동작가 시스템, 시나리오 경쟁력 강화

시나리오로 영화에 데뷔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궁극적으로 감독을 지망하는 사람이 많다. 영화 제작 시스템을 아는 것이 시나리오 작가의 중요한 덕목이듯, 시나리오 생산 능력은 감독의 중요한 미덕이다. 이런 점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데뷔해 감독이 되는 것은 긍정적인 측면을 갖는다.

그러나 한국 영화의 산업적 의미를 생각한다면 경쟁력을 갖춘 장르영화, 이른바 기획영화들이 나와야 하고 그럴수록 시나리오의 중요성은 더욱 커질 수 밖에 없다. 이를 위해서는 시나리오 생산을 철저하게 시스템화할 필요가 있고 이런 점에서 공동 작가 시스템은 많은 장점을 갖고 있다.

영화 기획자 김익상씨는 "한국영화가 산업적인 초대를 갖추기 위해서는 장르전략을 철저히 활용한 상업영화가 많이 나와야 한다. 상업영화를 만드는데 핵심은 대중의 기호를 파악하는 것이고 공동 작가 시스템은 이것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충무로 신화를 창조한 <쉬리>는 좋은 본보기다. <쉬리>는 충무로에서 '공동 작가 시스템'을 활용한 거의 최초의 사례로 꼽힌다. <쉬리>가 유사 헐리우드 전략을 택한 것은 공동 작가 시스템의 활용과 무관하지 않다. 국내 관객들이 <쉬리>를 보며 헐리우드 영화에서 느끼는 짜릿한 재미와 쾌감을 느낀 것은 다분히 공동 작가 시스템이 만들어낸 시나리오 덕분이다.

물론 모든 장르의 영화가 공동 작가 시스템에 적합한 것은 아니다. 멜로 영화는 작가의 일관된 호흡과 정서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장르 전략을 활용한 대부분의 상업영화는 대중의 입맛에 민감할 수 밖에 없고 그럴수록 시스템화 된 검증작업을 거칠 필요가 있다.

공동 작가 시스템은 빠르게 변하는 대중의 기호를 정확히 포착하고 다양한 작가들의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각각의 작가들이 지닌 장점을 활용해 작품의 리스크를 최소화한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아울러 앞에서 지적한 전업 작가 시스템과 공동 작가 시스템은 서로의 발전을 촉진하고 견인하는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 시나리오 기근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충무로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스크린 정기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