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김현씨는 어려운 집안형편 때문에 중학교를 다니다 그만두고 말았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바람에 4형제 중 둘째인 그는 어릴 때부터 홀로 서는 법을 배워야 했다. 영화를 하고 싶다는 소망을 이루기 위해 그는 19살 무렵 가족 몰래 서울로 올라왔다.

대책 없이 무작정 상경한 그가 찾은 곳은 당시 충무로에서 가장 큰 영화사 중 하나인 신필름. 신상옥 감독이 운영한 신필름에서 그는 10년간 일했다. 당시엔 그저 밥먹고 잠잘 수 있는 곳이 생겼다는 사실에 감지덕지 했다. 처음 3년 동안은 막일하는 노동자나 다를 게 없었다. 당시 신필름은 자체 스튜디오와 편집실을 갖춘 이를테면 메이저급 영화사였기에 그는 아무 일이나 닥치는 대로 했다. 감독을 하겠다고 연출부에 입문했으나 어쩌다 편집실에 들어가게 됐고 조금씩 편집의 매력에 빠져갔다. 78년에 신필름이 해체되면서 그는 졸지에 실업자가 됐다. 2년 이상을 무직 상태로 있다가 84년 배창호 감독과 만나면서 다시 한번 편집 일에 손을 대게 됐다. 편집실 대신 남의 집에 방 하나 빌려 편집을 시작했다. 다행히 이렇게 만든 <고래사냥>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편집자 김현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게 된다. 그 뒤 <안개기둥> <칠수와 만수> <우묵배미의 사랑> <남부군> 등 80년대 대표적 감독의 영화들이 김현의 손매에서 완성됐다. 지난해 국내서 제작된 영화 60여편 가운데 10편 정도가 김현 편집실 출신이다.

충무로의 편집비는 편당 평균 1천2백만원선.

편집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영화예술의 기본은 편집”이라는 푸도프킨의 말을 인용한다. 편집기사라는 호칭이 달갑지 않은 이유도 이것과 관련된다. 영화예술의 기본이 편집인데 기사라는 말은 기술자를 부르는 말로 들린다는 것이다. 물론 영화의 모든 부분이 중요하지만 편집은 오랜 경험이 아니면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늘 반복하는 작업 이지만 감각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항상 신중하고 때론 과감해야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편집 일을 배워 보겠다고 찾아오는 이들이 많지만 한 일주일 해보고 포기하는 사람들도 많다. 최소한 3년은 해야 기본적인 기술을 습득하는 데다 그 이후는 자기 하기 나름이라 쉽게 생각하고 온 사람들은 감히 엄두를 못 낸다는 것이다.

편집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언제나 이미 찍힌 필름으로 작업한다는 점이다. 때문에 감독이 얼마나 편집에 대해 계산하고 찍었는가에 따라 결과물은 천차만별이 된다. 때로 감독이 제대로 찍지 않고 이런저런 요구를 하면 난감해지기도 한다. 한국 영화의 관행상 개봉일을 미리 잡아놓는 경우가 많아 촉박한 작업시간도 큰 부담이다. 80년대 이후엔 작업 여건이 좀 나아졌지만 같은 일을 방송국에서 하는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가 난다. 김현씨의 후배들 중에도 영화계에 남아 있는 이보다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 더 많다. 경제적 여건만 보자면 25년간 영화계에 남았다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을 정도지만 김현씨는 그래도 오직 영화를 향한 길을 걸었다. “정말 배고프고 힘들 때 방송에 대한 유혹도 만만치 않았죠. 하지만 어릴 적 해변가 유랑극장에서 봤던 영화의 기억이 발목을 잡았죠.”

그는 편집을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좋은 영화를 많이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대부> 같은 영화는 30번 이상 봤다. 처음엔 그냥 보고 다음은 조명에 집중하고 그다음엔 소리에 집중하는 식으로. 그렇게 보다 보면 어떻게 하면 장면연결이 부드러워지고 훌륭한 효과를 낼 수 있는지 감을 잡게 된다. 물론 공부도 많이 해야 한다. 그는 컴퓨터를 이용하는 디지털 편집을 배워볼 생각도 했다. 하지만 최근 고전적 필름편집이 디지털 편집 보다 더 낫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추세라 현재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기계,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에 따라가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건 요즘 영화의 문법에 정통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얼핏 편집작업이 다 똑같아 보이지만 매 영화마다 다른 감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김현씨는 “요즘 젊은 감독들에게 기대를 걸며 내가 편집한 영화가 세계적인 영화제에 나가 수상했으면 좋겠다”고 소망하기도 한다.

그는 평생의 꿈이 영화연출이었는데 어쩌다 25년동안 편집자로 일했다며 2~3년 후에 자신의 영화를 연출할 계획이라고 밝힌다. 우연히 살인을 저지르고 쫓기는 젊은이의 심상에 주목한 영화가 될 것이며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 “문제는 얼마나 열정을 갖고 있는가죠. 편집 배우겠다고 찾아오면 일단 그것부터 봐요.” 열정 하나만으로 지켜온 지난 세월을 후회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영화계에 입문하는 모든 이의 귀감이다.

<씨네21 : 남동철 기자>

대표작 연보
84년 <고래사냥>
85년 <어미>
86년 <안개기둥>
87년 <기쁜 우리 젊은 날>
88년 <칠수와 만수>
90년 <우묵배미의 사랑> <남부군> <그들도 우리처럼>
91년 <경마장 가는 길>
92년 <하얀 전쟁>
93년 <화엄경> <그 섬에 가고 싶다>
94년 <투캅스>
96년 <투캅스 2> <지독한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