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에 연출의 꿈 걸다 - 강제규

어쩌다 감독이 됐나

1960년 마산에서 태어났다. 사남매를 자유롭게 키웠던 부모님 덕에 전혀 구속받지 않고 자랄 수 있었다. 때문에 자유로운 사고방식과 품성이 형성된 듯하다. 호기심이 강한 나에게 세상은 신기한 것들로 가득한 곳이었다. 그 어린 나이에도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가게에서 '외상'을 해서라도 꼭 먹어야했고, 보고싶은 것이 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봐야했다.

한번은 마산에 군함이 도착한다는 날이 있었는데, 군함을 보겠다고 혼자서 몇리나 되는 길을 하루종일 걸은 적이 있다. 결국 군함은 보지 못하고 그냥 돌아오긴 했지만.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던 내가 영화를 하게 된 것도 영화 역시 무궁무진한 상상이 가능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어릴적 형과 영화를 자주 보러가곤 했는데, 영화란 매체는 흥미진진해서 호기심 많은 나의 자유분방한 심성과 딱 들어맞았다. 그때부터 영화에 대한 애정이 시작된것 같다.

고등학교 가면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카메라 렌즈를 통해 세상보는 법을 배웠다. 감독이 될 생각으로 81년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갔고, 4학년 때인 84년 가을 충무로 현장에 뛰어들었다. 학교선배였던 김성홍 감독의 소개로 당시 정인엽 감독의 조감독으로 있던 강우석 감독을 만나게 됐다. 강감독의 연출부 세컨드로 잠시 지내다 85년 2월 합동영화사 공채모집에 합격해 연출부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합동영화사 사원공채는 경쟁률이 굉장했는데, 이는 월급을 받아가며 연출부 생활을 할 수 있는 귀한 기회였고 2년 뒤엔 감독 데뷔를 시켜주겠다는 장미빛 공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합동에서 지낸 1년간은 배운 것 없이 충무로에 대한 실망만 하게 된 시간들이었다.

당시 외화 수입 조건인 의무영화 제작편수를 채우기 위해 이름도 모를 영화들을 양산했기 때문이다. 그 뒤 89년까지 TV용 88올림픽 특집 프로그램, 국방부 홍보영화, CF연출 등을 하기도 했다. 당시 충무로에선 내가 충무로를 떠나 외도를 하는것이 아니냐는 수근거림이 있었다. 그러나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생계를 위해 다른일을 하긴 했지만 그때도 저녁에 집에 와서는 계속 극영화 시나리오를 썼다. 이는 합동영화사를 다닐때도 마찬가지였다. '시나리오를 쓴다는 것'은 감독에의 꿈을 키우고 있던 나의 유일한 삶의 방식이었다. 더불어 한국에서 영화감독을 평생토록 하려면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으로서의 능력을 함께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은행나무 침대>로 감독데뷔하기 전에 쓴 시나리오는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1989)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1991) <장미의 나날>(1993) <게임의 법칙>(1994) 이렇게 네편이다. 89년 시나리오 작가로 데뷔한 이래 영화 데뷔까지 7년의 시간이 흘렀는데, 이는 영화 연출을 할 때 시나리오와 기획도 내가 직접 하리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으로 93년 여름 영화발전소라는 영화기획사를 차렸고 <은행나무 침대>는 이곳의 첫작품이다.

나의 첫작품

<은행나무 침대>를 하게 된 것은 갑자기 그와 같은 얘기에 대한 '갈증'이 생겼기 때문이다. 기획 아이템을 잡은 다음 8~9번의 시나리오 수정뒤 완고가 나왔다. 데뷔작 <은행나무 침대>는 서울 개봉관에서 66만의 관객을 동원해 흥행에 성공했지만, 시작할 때 부담이 만만치 않은 시나리오였다. '천년에 걸친 사랑'이란 주제를 제대로 그리려면 제작비와 기술이 튼튼하게 뒷받침해주어야 하는데 이 둘 다가 예측불허였다. 특히 컴퓨터 그래픽의 경우 제대로 처리 안 됐을 경우 영화의 완성도를 급격히 떨어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부담과 불안속에서 신씨네와 만났다. 신씨네와 알게 된것은 94년 김성홍 감독이 연출하고 내가 시나리오를 쓰기로 한 <깽판>으로 인해서였다. <은행나무 침대>의 기획부터 관심을 가져온 신씨네는 시나리오 완고가 나오자 이내 같이 일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신씨네의 재무구조는 어려운 편이었지만, 서로에게 신의가 있었기 때문에 함께 일하기로 결정했다. <구미호>때부터 제2금융권의 돈을 끌어오려고 시도했던 신씨네는 이번에 일신창업투자 주식회사에서 제작비 전액 투자를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신인 감독이 기본적으로 안고 있는 어려움은 역시 있었다. 감독으로서 능력을 검증할 만한 작품이 없기 때문에 캐스팅할 배우와 제작자, 스텝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가가 문제였다. 제작자들과는 대학시절부터 알고 지내던터였고, 배우 캐스팅 역시 크게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당시 주인공 한석규의 경우 작품섭외가 쇄도했었는데, <은행나무 침대> 시나리오를 읽고 바로 하겠다고 결정했다. 시나리오가 완성도가 있으면 캐스팅은 문제되지 않는다. 현장 스탭의 경우 처음엔 좀 서먹했으나 몇회의 촬영을 마친 뒤엔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데뷔작을 하면서 가장 어려움을 느낀 것은 개봉시기에 대한 압박이었다. 후반부 촬영을 하면서 제작예산이 초과되고 촬영이 예상보다 지연됐는데, 예정대로 개봉하려면 후반작업 시간이 축소될 수 밖에 없었다. '시간'에 대한 압박은 '돈'에 대한 압박보다 참기 힘든 것이다. 이는 바로 작품의 '질'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호주에서의 후반작업은 시간을 반으로 단축시켜 여러가지 공정을 동시진행했고, 편집하는 16일 동안 감독 이하 전 스탭은 모두 합해 20시간도 채 자지 못한채로 정신없이 작업을 해냈다. 제작자를 설득해 2월10일 개봉예정이었던 것을 일주일 뒤인 17일로 연기했다. 개봉시기보다 중요한 것이 작품의 완성도이기 때문이다.

감독이 되려는 이들에게

무엇보다 '자유로운 사고'를 하라고 말하고 싶다. 자기 틀을 짜놓고 그 속에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은 영화와는 생리가 맞지 않는 사람들이다. 사고가 자유로워야 편견에 사로 잡히지 않고 사고의 폭이 넓어진다. 많이 듣고, 많이 보고, 다양한 방면으로 많이 알아야 한다. 그래야 자기만의 가치관과 철학이 생긴다. 무슨 일이든지 마찬가지겠지만 감독 역시 이러한 기본기가 있어야 한다.

또한 영화 메커니즘을 친숙하게 알 필요가 있다. 이 '메커니즘'을 알기 위해 우선 '카메라'와 친할 필요가 있다. 스필버그 역시 8mm카메라로 사물을 찍기 시작하면서 영화를 접했다. 카메라를 접하면서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나를 익히는 것이다. 카메라의 파인더를 통해 들여다보는 세상의 재미를 알면서 영화인이 되는 것이다. 이러면서 컷과 편집개념도 생긴다.

나는 스틸카메라를 먼저 접했다. 파인더를 통해 들여다 본 세상이 곧 영화가 되고, 이러면서 사고가 영화적으로 발전한다. 파인더를 보면서 화면을 '선택'하게 되고, 자신의 영화적 빛깔도 생기게 되는 것이다.

시나리오란 파인더를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면서 생기는 자기만의 관심을 글로 구체화한 것이다. 15초짜리 CF를 잘 만드는 사람은 극영화 또한 잘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15초짜리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그 무엇'이 있는 사람이라면 극영화에서도 이를 잘 표현할 것이다. 요는 그 15초짜리 시나리오에 잘 훈련된 사람이라면 극영화에서도 핵심을 잃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혹자는 시나리오를 쓰는데 문학적 역량이 필요하다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적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문학적 역량이 부족해도 궁극적으로는 이를 잘 표현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영화적 상상력이다. 감독이 되려 한다면 시나리오를 창출하고 분석하는 능력을 갖추라고 말하고 싶다.

<글 : 씨네21-김재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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