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집에서도 대사 쓰는 감독 - 최동훈

[이동진닷컴] (이 기사는 "이동진의 영화풍경"에 게재된 오늘의 한국영화 대표 감독들을 만나는 '부메랑 인터뷰' 타짜의 최동훈 감독 인터뷰 기사입니다.)

[이동진닷컴] 재능에도 색깔이 있다. 최동훈 감독의 재능은 한국영화계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색깔을 지녔기에 더욱 빛난다. 기계적으로 감동을 직조해내느라 따뜻하다 못해 쉰내까지 풍기고 있는 충무로 온난화 현실 속에서 그의 영화들은 냉각수의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

그의 영화에는 이야기에 대한 욕망이 넘쳐난다. 비슷해 보이는 이야기라도 다르게 말할 줄 아는 화술도 지녔다. 그가 배우에 대한 감식안이 탁월한 연출자라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백윤식에서 염정아와 김혜수까지, 우리가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연기자들 내면의 깊은 구석에서 새로운 인물을 건져올림으로써 관객들에게 짜릿한 발견의 쾌감을 선사했다.

충무로가 장르 영화에 대한 오랜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는데 큰 역할을 한 그는 ‘범죄의 재구성’ ‘타짜’ 등 단 2편의 장편영화를 내놓은 신인급 감독. 그러나 위기에 처한 2007년의 한국영화계가 손꼽아 차기작을 기다리고 있는 가장 믿을만한 구원투수 중의 하나다.

광화문의 한 오피스텔에서 차기작 구상에 여념이 없는 최동훈 감독을 찾아갔다. 컴퓨터와 포스트잇을 쑥과 마늘 삼아 탈고의 날을 위해 동굴처럼 작은 공간에 틀어박힌 그였지만, 자신의 영화들만큼이나 재치 있는 답변으로 방문자를 시종 즐겁게 만들었다.

“뭐, 아이, 가만 있어봐. 바쁘다 지금..”(‘범죄의 재구성’에서 하던 이야기를 마저 끝내려는 천호진이 끼어들던 동료 형사를 제지하면서.)

- 요즘 신작 시나리오 작업 때문에 바쁘시죠? 단편영화제 심사도 하셨다구요.

“미장센 단편영화제였어요. 작품들이 좋은 게 많아서 개인적으로도 상당히 자극을 받았죠. 우리나라 단편영화의 캐릭터들이 점점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장편영화에서 없었던 캐릭터들인데, 실험성은 좀 적어졌지만 여유가 생겼더라구요. 사회적인 주제를 가진 영화들을 모아놓은 ‘비정성시’ 부문에 출품된 영화는 전부 좋던데요.”

- 그렇게 능력 있는 후배들의 단편을 보면 한편으론 ‘앗, 뜨거라’ 싶으실 수도 있겠네요.(웃음)

“좋은 신인 감독은 아무리 영화계가 어려워도 계속 나오기 마련이구나 싶더라구요. 두 편 밖에 안 했으니 저는 아직 신인감독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데 그런 후배들을 보면 무섭기도 하고 자극도 되고 그래요.”

“가만 있어봐, 내가 근사한 거 하나 메이킹 중이거든? 이거 되면, 우리가 사기로 한 그 땅 있잖아? 그거 사자, 한 방에.”(‘범죄의 재구성’에서 박신양이 크게 한 탕 할 것을 염두에 두고 형에게 큰소리치며.)

- 지금 근사한 거 하나 메이킹 중이시죠?(웃음) 감독님의 세번째 영화 기다리시는 분들이 참 많은데 어떤 거 쓰고 계십니까.

“지난 두 달간 슬픈 스릴러를 쓰려고 준비했었어요. 그런데 머리 속에서 구상중일 땐 위대한 작품이었는데, 이게 전혀 위대하지 않다는 걸 시나리오 2장째 쓰면서 깨달았어요.(웃음) 그리곤 8장째 쓰다가 바로 엎었죠. 흥이 안 나더라구요. 내가 나를 배신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품의 질적인 상승을 원하느라 제가 지닌 3류 정신의 근본을 버리고 있지 않나 싶었던 거죠.(웃음) 이 이야기는 제 나이에 할 영화는 아닌 것 같아요.”

- 어떤 내용이었는데요?

“최근 여배우들의 자살이 크게 문제가 됐잖아요? 그 모티브를 중심으로 협박 음모 배신 표절이 얽히는 이야기였는데, 풀어내기가 너무 어렵더라구요.”

- 중단하신 게 언제였습니까.

“3일 전이죠.”

- 그럼 지금 패닉 상태이시겠네요.(웃음)

“마음은 한참 아쉬웠는데, 그 시나리오 쓰는 걸 중단하니까 어깨가 아픈 게 사라지는 등 그동안 괴로웠던 온 몸의 병이 다 한 순간에 물러가더라구요.(웃음)”

- 왠지 지난 3일 동안 그 대신 쓰실 새 작품을 구상하셨을 것 같은데요.(웃음)

“SF 코미디라고 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아직 막 생각하고 있어서 자세한 내용은 저도 몰라요.”

- 슬픈 스릴러와 SF 코미디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요.”

“제가 아직 슬픈 게 감당이 안 되는 거죠.”

“워낙 유명하신 분이라서 이거 어떻게 해야할지, 아이 참.”(‘범죄의 재구성’에서 박신양이 사기꾼 사이에서 전설적인 존재인 백윤식을 처음 만나서.)

- 단 두 편의 영화로 정말 많은 관객들이 좋아하는 감독이 되셨습니다. 서강대 출신으로 학교 광고 모델로까지 나오셨죠?(웃음) 사인해달라는 분들도 많으실텐데요.

“가끔 사인을 요청하시는 분들이 있으시죠. 무척 쑥스러워요. 사인해주면서 기분 좋았던 적은 딱 한 번이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였죠. 제가 사인을 하다가 잠깐 어머니를 보았는데 그 표정은 정말이지…(웃음) 어머니는 사실 감독이 뭘 하는지도 잘 모르셨거든요. 사인을 마치고 나니까 어머니가 ‘힘든 일 하는데 닭이라도 한 마리 먹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시더라구요.(웃음)”

- 유명해지신 걸 즐기시는 편입니까. 요즘은 감독이 일종의 스타가 되는 경우도 많잖습니까.

“아뇨. 저는 감독이란 숨어 지내야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예요. 스타 감독이라는 말 자체가 거짓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이 직업의 진실과는 거리가 머니까요. 전 예전엔 기자가 되고 싶었어요. 열정적으로 일하고 단번에 세계를 해석하면서 곧바로 글을 쓰고 낭만도 좀 있구요. 그러나 그게 기자라는 직업의 진실은 아니잖아요. 매일 일에 치어서 허덕이시는 거잖아요.”

- 알고 보면 진짜 불쌍한 사람들이죠.(웃음)

“감독도 마찬가지죠. 남들은 화려하게 볼지 모르지만, 그런 날은 일년에 3일 정도나 될까. 나머지는 내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시나리오를 쓰거나 촬영장에서 정신없이 휘둘려야 하죠. 그게 감독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니까, 스타 감독이란 말은 좀 이상해요.”

“그래, 그 접시는 언제부터 돌리시고?”(‘범죄의 재구성’에서 함께 한국은행을 털 계획을 세우던 박원상이 박신양의 사기 경력을 물으면서.)

- 두 영화에서 개성 넘치고 리얼한 대사들을 쓰셨습니다. 인물들의 세계를 적절히 설명하면서도 그 자체로 대단히 신선한 용어들이죠. 범행에 몇 명이 필요한지를 물을 때 “영화배우 몇 명이 필요한데?”라고 하고, 배신당한 사실을 털어놓을 때 “나 수술당했어”라고 말하는 식이죠. 탈(얼굴) 졸업(출옥) 등의 비유적인 은어들로 가득한데요, 이런 용어들은 취재의 결과입니까.

“취재의 산물인 경우도 있고 제가 만들어낸 말인 것도 있죠. 사기를 접시 돌리기에 비유하는 것은 접시를 사기로 만들기 때문이죠. 이건 사기꾼들이 실제 쓰는 말입니다. ‘타짜’에서 ‘어디서 약을 팔아?’ ‘혓바닥이 왜 그리 길어?’라는 대사 역시 도박판 취재의 결과이구요. 영화배우라는 표현은 사기꾼들이 꼭 배우들처럼 행동하는 걸 보고 제가 만든 말이예요.”

“청진기 대보니까 진단이 딱 나온다. 시추에이션이 좋아.”(‘범죄의 재구성’에서 백윤식이 범죄 성공 여부를 가늠하면서.)

- 그럼 청진기 대사는 어떻습니까. 개봉 후 인구에 회자된 명대사인데요.(웃음)

“술자리에서 어떤 아저씨가 그 말을 쓰는 걸 들었어요. 대사로 써먹어야겠다는 생각에 곧바로 화장실로 가서 메모를 했어요. 화장실에 갔다온 지 얼마되지 않았던 순간이라서, 돌아오니 그 아저씨가 ‘젊은 사람이, 전립선이 안 좋아?’라고 하더군요.(웃음)”

- 술자리에서도 취하실 수가 없겠네요. 언제 대사들이 튀어나올지 모르니까요.(웃음)

“아뇨. 취해도 그냥 무조건 써요. 현장에서 메모를 못하면 아무리 취해도 집에 들어오자마자 적어두죠. 사실 다음날 그 글씨를 못 알아보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요.(웃음) 작년에 고향 가서 술 한 잔 하는데, 친구가 ‘그 새끼가 폼은 아랑 드롱이야’라고 하더라구요. 그걸 ‘타짜’에 써먹으려고 적어놓은 것을 결국 못 넣었는데, 아마 다음 영화에 들어가게 될 겁니다.(웃음)”

“니, 제비랑 똥구멍 맞출려고 했던 놈이 제비가 어딨는 줄 모른다고?” “형님, 제가 카프카를 좀 아는데요. 부조리. 저 제비랑 친해요. 근데, 집을 모르네.”(‘범죄의 재구성’에서 형사인 천호진이 취조할 때 이문식이 비웃듯 발뺌하며.)

- 감독님 영화엔 저절로 무릎을 치게 되는 대사들이 가득합니다. ‘범죄의 재구성’의 카프카 대사도 그렇고, ‘타짜’에서 아귀가 내뱉는 “복수? 복수 같은 그런 순수한 인간적인 감정으로다가 접근하면 안 되지. 도끼로 마빡을 찍든 칼로 배때지를 쑤시든 고기 값을 번다, 뭐 그런 자본주의적인 개념으로다가 나가야지” 같은 대사도 무척이나 인상적이죠. “추위 타시나 보네”(‘겁먹으셨나 보네’의 뜻), “넌 생각하지 마. 생각은 내가 하니까”(생각 좀 해보겠다는 말에 윽박지르면서)처럼 인용하고픈 대사들이 진짜 많습니다. 영화 대사로 질문을 이끌어내는 ‘부메랑 인터뷰’ 같은 형식에 환상적인 레퍼런스를 제공해주시는 감독님이신데요(웃음), 어떻게 이런 대사를 쓸 수 있는 ‘경지’에 오르신 건가요.(웃음)

“전 사실 대사를 너무 못 써서 고민을 많이 했던 사람이예요. 저도 이전엔 “이번 계획이 끝나면 너에게 후한 보수를 주마” 같은 대사들을 썼다니까요.(웃음) 그런데 그렇게 쓰기가 싫으니까 다양한 시도를 했죠. 도서관에 가서 희곡집 같은 걸 혼자 조용히 소리내서 읽어보기도 했어요. 그러다 보면 희곡 작가들이 만들어낸 발음의 미학 같은 것이 느껴지더라구요. 오태석 선생의 희곡을 소리내어 읽어보니 말의 장단이 너무 좋았어요. 대사는 이렇게 쓰는 거구나 싶었죠.”

- 시나리오를 다 쓰고나서 직접 읽어본다고 하셨죠?

“네. 혼자 방에서 읽어봐요. 그러면 그때의 느낌대로 영화가 나오게 되지요. 읽어보면 알아요. 이 사람이 이 상황에서 이 대사를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잘 쓴 대사인지 못 쓴 대사인지.”

“아니 와인을 이렇게 두는 사람들이 어딨어. 제 정신이야? 아니 여기다 불 환하게 켜놓고 이거이거, 얼마나 뜨뜻해? 이게 다 뭐하는 플레이냐구. 와인은 온도가 얼마나 중요한데.”(‘범죄의 재구성’에서 박신양이 염정아의 와인 보관법을 탓하면서.)

- 감독님 영화는 무척이나 쿨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사실 충무로에서 쿨한 영화 찾기가 그리 쉬운 것은 아니잖아요? 감독님은 영화 속에서의 감정 과잉을 본능적으로 참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격정적 드라마는 안 쓰죠. 어려서부터 텔레비전을 보시면서 이틀에 한 번씩 우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일종의 짜증을 느꼈는데, 그것에 대한 반작용인지도 모르겠네요.(웃음) 그런 걸 쓰면 제 마음 깊은 곳에서 브레이크가 걸려요. 솔직한 심정을 말한다면 그런 걸 위해서 서사를 늦추고 싶지 않아요. 원래는 서사가 그런 걸 위해 복무해야 하는데 저는 반대인 셈이죠. 감정이 넘쳐나려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야 하는데 그게 싫습니다. 단계를 밟기 위해서 어느 순간 정지하는 걸 생리적으로 싫어하는 것 같아요.”

최동훈 감독 ⓒ 이동진닷컴-김현호

“고니야, 갔다 와서 아까 하던 이야기 마저 하자.” “얘기는 무슨.”(‘타짜’에서 이혼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누나와 조승우의 대화.)

- 아닌 게 아니라 감독님의 영화를 보면 이야기꾼의 영화란 생각이 듭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사람의 영화라고 할까요. 이야기에 대한 욕망이 정서 전달에 대한 욕망보다 영화 속에서 훨씬 더 크게 느껴집니다.

“내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듣는 사람이 울면 싫은 거죠. 근데 저도 영화 보면서 잘 울긴 해요.(웃음) 운다는 것은 진정으로 반응해서 우는 거잖아요? 울고 나서 창피한 영화와 안 창피한 영화가 있는데, 울고서 창피하지 않았던 영화는 끝까지 사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 그런 영화가 최근에 어떤 게 있으셨나요.

“박진표 감독의 ‘그 놈 목소리’와 ‘너는 내 운명’이 그랬어요. 그리고 ‘빌리 엘리어트’ 같은 작품. 그 영화는 저의 어린시절과 상황이 똑같아요. 저는 버스도 안 다니던 마을에서 태어났거든요. 전주였는데 행정구역만 전주였지 시의 가장 외곽이라서요. 사실 저희 집은 아들을 서울로 보낼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어요.”

“빨리 닫아 빨리. 지금 뭣들하고 있는 거야?”(‘범죄의 재구성’에서 사기꾼들에게 당했음을 뒤늦게 깨달은 한국은행 직원.)

- ‘범죄의 재구성’이나 ‘타짜’나 모두 기본적으로 이야기의 양이 무척 많은 작품들입니다. 감독 경력의 첫 대사를 위에서 인용한대로 “빨리 빨리”를 외치는 다급한 말로 시작하셨는데요, 감독님 영화의 스피드는 빠른 스타일을 좋아하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해진 두 시간 안에 해야 할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이야기의 양과 질이 작품의 속도와 스타일을 결정하는 측면이 있다는 거죠.

“ ‘범죄의 재구성’ 시나리오를 다 써놓고 보니 양이 무척 많더라구요. 그 시나리오를 본 모든 사람들이 2시간 안에 다 들어갈 수 없는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신인 감독일 때는 컨트롤을 제대로 못하니까 더 그럴 거라고 했어요. 하지만 저는 두 시간 안에 충분히 들어갈 수 있다고 했죠. 사실 그런 고민들이 그 영화의 스타일과 템포를 만든 걸 겁니다. 다 쓴 뒤 대사를 혼자 맞춰서 읽어봤더니 2시간20분이 넘게 나왔어요. ‘범죄의 재구성’을 보면 대사가 안 들리는 시간이 거의 없습니다. 화면이 존재하는 한 대사가 계속 나오죠. 그게 애초부터 생각한 방법이었으니까요. 편집도 무척 빠르게 했구요. 그렇게 진행했기에 ‘범죄의 재구성’은 극장의 청소부 아줌마만 서둘러주시면 충분히 하루 7회 상영을 할 수 있는 영화가 됐죠.(웃음)

“느그들 한국은행으로 들어가던 그 시간에 한국은행으로 전화가 왔어.” “그게 누군데요.”(‘범죄의 재구성’에서 형사 천호진이 이문식에게 설명.)

- ‘범죄의 재구성’은 플래시백이 생명인 영화입니다. 제목 자체가 그렇죠. ‘저수지의 개들’과 비슷한 구성의 복잡한 구조를 지닌 작품이잖아요. 그런데 ‘범죄의 재구성’ 뿐만 아니라 ‘타짜’ 역시 구조가 일반 극영화와 다릅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하지 않고 계속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이야기를 하잖습니까. 플래시백(과거회상장면)을 사용하더라도 영화에서 묘사되는 플래시백들끼리는 시간적 순서대로 보여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두 작품은 플래시백들의 시간적 순서마저도 계속 뒤섞입니다. 순서대로 늘어놓는 것은 재미가 없다고 느끼시는 편입니까. 많은 이야기를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이야기의 경제성 때문에 그런 면도 있는 것 같은데요.

“감정을 쌓아가기에는 시간적 흐름을 따르는 게 훨씬 더 편하죠. 하지만 그렇게 하면 2시간 안에 다 못 담아요. 순서를 바꿔놓으면 관객이 혼자서 맘 속으로 이야기를 쌓아가게 됩니다. 그런 기본적인 필요에 의해서도 작품 구조가 그렇구요, 또 한 편으론 관객이 사고하면서 영화를 보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쪼개지고 점프되는 걸 보면서 관객은 그 빈 간극들을 맞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쓰면 제 자신도 즐겁구요. 전 그런 복잡한 구조가 있더라도 관객들이 다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 스타일상으로 플래시백을 좋아하시기도 하시죠?

“그럼요. 플래시백이라는 방식에 대해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좋아했던 누아르 영화들이 다 플래시백을 갖고 있거든요. ‘범죄의 재구성’ 역시 그래요. ‘자, 그러니, 이제 봅시다’라고 말하는 것 같은 스타일이죠. ‘타짜’는 ‘자, 한편!’이라고 말하면서 또다른 이야기를 비추는 식의 영화구요. 제 여자친구가 그건 ‘섹스 앤 더 시티’의 스타일이라고 하더군요. 그 영화가 ‘한편(Meanwhile)!’ 이러면서 진행되는 작품이잖아요. 그런 게 기본적으로 작품에 경쾌함을 불어넣는 것 같아요. 이 영화는 무엇무엇에 대한 영화입니다, 지금부터 이 장소에서 출발합니다, 뭐, 그렇게 말하는 듯한 영화들이 좋습니다. ‘친절한 금자씨’를 제가 좋아했던 게 내레이션이 너무 좋아서였어요. ‘금자는 그때 무척 슬펐다’라는 내레이션이 나오면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죠. 아, 좋겠다. 슬픈 장면을 직접 안 찍어도 되고.(웃음) 옛날 이야기 해주듯 하는 영화들을 좋아합니다.”

“화투하면 대한민국에서 딱 세 명이야. 경상도에 짝귀, 전라도에 아귀, 그리고 전국적으로 나!”(‘타짜’에서 백윤식이 제자인 조승우에게 화투판의 최고 실력자 세 명을 소개하면서.)

- 비유를 하자면 무협지적 세계관이랄까요(웃음), 강호에 은거하는 최고 고수끼리의 대결에 대한 로망 같은 게 있으신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와 똑 같은 구도에 대한 언급이 ‘범죄의 재구성’에도 나온다는 거죠. 위조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는 휘발유(김상호)가 경찰 앞에서 “대한민국에 그 정도 위조하는 사람이 딱 세 명 있거든요? 부산에 하나, 충청도에 하나, 그리고 여기 저!”라고 말하는데 이 대사는 ‘타짜’의 김선생 대사와 거의 흡사합니다. 이런 구도를 영화로 그려내는데 매력을 느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세번째 영화로 만들려고 오늘 서점에 가서 생각해낸 이야기도 결국 그런 이야기네요.(웃음) 장르는 달라져도 본질은 같은 건가 봅니다. 사실 ‘타짜’는 인물들의 돈에 대한 욕망보다 최고 실력자와 겨뤄보려는 욕망이 더 큰 영화입니다. 고니에게는 아귀와 겨뤄보고 싶다는 기질이 있는 것이잖아요. ‘범죄의 재구성’도 마찬가지죠.”

“좆만한 새끼들이 지들이 최고인줄 알고 날뛰잖아? 그래서 내가 한 방 먹여준 거야.”(‘범죄의 재구성’에서 박신양이 형의 납골함 앞에서 독백.)

- 말씀하신대로 ‘범죄의 재구성’에서 창혁의 행동 원리 중 하나가 그런 심리임을 드러내는 대사가 나오죠.

“두 영화 모두 무협지적이라는 지적에 동의해요. 다만 무협지라고 하면 좀 볼 품 없어 보이고, 서부극이라고 하면 더 좋아 보이긴 하겠죠.(웃음)”

“이때쯤 네가 그걸 알아야 되는데. 내가 누구냐? 화투를 거의 아트의 경지로 끌어올려서 내가 화투고 화투가 나인 물아일체의 경지, 응? 혼이 담긴 구라, 응?”(‘타짜’에서 백윤식이 조승우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자랑하며.)

- 두 편의 영화에서 사기꾼과 타짜들은 최고의 실력자로 묘사됩니다. 그래서인지 고수라는 단어가 유달리 많이 등장하죠. 하다 못해 ‘범죄의 재구성’의 형사까지 “나 이래 봬도 고수다. 고수한테는 고수 대접을 해줘야지”라고 말을 합니다. ‘타짜’의 고니가 “선생님은 대한민국에서 랭킹 몇 위쯤 돼요?”라고 묻자 평경장이 “당연히 내가 일등이지, 임마”라고 답한다든지, ‘범죄의 재구성’에서 형사를 잘 따돌리라고 당부하는 김선생에게 인경이 “걱정 마. 나, 삼류 아냐”라고 대꾸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구요. 그런데 다양한 장르에서 두루 뛰어난 성과를 낸 하워드 혹스의 영화들을 일종의 ‘전문가 영화’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는 영화 속 인물이 악인이든 좋은 사람이든, 소위 전문가에 대한 일종의 존중이나 존경 같은 것을 담아 애정 어린 스케치를 하니까요. 비슷한 맥락에서 감독님 영화도 전문가 영화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비열하고 좋지 못한 인간들이지만 기본적으로 그런 인물들의 전문가적 솜씨에 대한 찬탄 같은 것이 종종 느껴지니까요.

“사기꾼과 도박사를 놓고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좀 웃기긴 한데, 제가 기본적으로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가장 존경하는 것 같습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래요. 영화를 통해서 그런 것들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캐릭터에는 기질도 있지만 직업도 있잖아요? 저는 텔레비전 드라마 ‘하얀거탑’이 무척 재미있었는데, 제 눈에는 등장 인물들이 진짜 의사처럼 보였거든요. 사실 처음 인터뷰 대상이 되었을 때도 기자들의 세계가 궁금해서 ‘몇시에 출근하세요?’ ‘하루에 몇 장이나 써야 돼요?’라고 제가 더 많이 물었어요.(웃음)”

“동생이 죽어서 슬프시겠어요.” “누구나 한 번 태어나면 죽는 거잖아요. 저는 개인적으로다가 그래요. 기쁜 것도 싫구 그렇다고 슬픈 건 또 더 싫구. 그냥 걸거치는 것 없이 그냥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걸랑요.” (‘범죄의 재구성’에서 염정아가 동생의 죽음에 대해 위로하자 박신양이 대답.)

- 삶에 대해 ‘범죄의 재구성’에서 창호가 말한 것처럼 생각하십니까.

“그 대사가 표면적으로 의미하는 바와는 오히려 반대에 가까운 생각을 갖고 있어요. 저는 사람이란 살면서 일희일비해야 한다고 보거든요. 어쩌면 일희일비 하지 말자는 견해는 삶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 것인지도 몰라요. 제가 제 인생에서 처음 배웠던 사자성어가 새옹지마였는데, 그 말은 결국 인생이 무섭다는 걸 알라는 말이잖아요? 그럴 때 저는 오히려 인생이 무서우니 좋아할 때라도 좋아하면서 그렇게 감정을 쏟아내고 살자는 거죠. 그래야 좀더 평탄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창호의 그 대사는 사실 일희일비 하자는 내용일 수 있습니다. 평탄하게 살고 싶다는 거니까요.”

“사기라는 게, 털어먹을 놈이 테이블에 앉아 있다, 그러면 끝난 거예요. 문제는 테이블에 앉히기 위해서 우리가 얼매나 공을 들이느냐.”(‘범죄의 재구성’에서 사기의 기술에 대해 설명하는 김상호.)

-대중영화라는 게, 최적의 배우를 캐스팅하면 이미 절반은 끝난 거라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감독님은 배우에 대한 감이 남달리 뛰어나신 것 같은데요, 배우를 어떻게 캐스팅하십니까.

“정말 캐스팅이 영화의 절반일 거예요. 저는 캐스팅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그 배우에 대한 판타지를 속으로 키워갑니다. 그 사람이 제가 쓴 대사를 말하면 어떻게 될까 상상하는 거죠. 김혜수씨의 경우, 캐스팅하기 전에 어떤 식당의 옆 자리에서 말하는 걸 계속 듣게 됐어요. 그때 속으로 그런 상상을 했죠. 저는 제 상상력을 자극하는 배우가 좋습니다.”

“나, 오후면 좀 나른해지거든요. 고양이 같이.”(‘범죄의 재구성’에서 자신의 습성에 대해 말하는 염정아.)

-아닌 게 아니라 ‘범죄의 재구성’에서 염정아씨는 정말 고양이 같습니다. 창호의 비밀 번호가 뭔지 추측하다가 혼자 담배를 들고 춤추면서 걸어갈 때의 모습 같은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지요. 배우로서 염정아씨는 ‘장화, 홍련’에 이어 이 영화에서의 배역으로 전성기를 맞았는데요, 염정아씨와의 작업이 어떠셨나요.

“촬영 전에 염정아씨에게 서인경은 일관성 없는 게 특징인 캐릭터라고 말했어요. 어떤 때는 아주 여성적이었다가 또 어떤 때는 매우 터프하죠. 그런데 염정아씨에게도 그런 면이 있어요. 함께 식사도 하고 분장실에서 장난치고 놀기도 하면서 몇몇 모습을 인상적으로 기억해뒀죠. 그러다가 서인경이 형사에게 딱딱하게 굴 때의 모습이나 창호에게 애교를 부려야 할 때의 모습을 찍을 때가 되면 ‘그때, 왜, 분장실에서 이러저러한 말을 했을 때의 그 톤으로 해야 할 것 같아요’라고 말하곤 했던 겁니다.(웃음) 염정아씨를 캐스팅한 것은 제가 손과 발이 긴 여자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우아해 보이잖아요.”

-감독님은 확실히 길쭉한 여자의 우아한 뒷모습을 무척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타짜’의 김혜수씨나 ‘범죄의 재구성’의 염정아씨 모두 극중에서 두 팔을 길게 뻗어 스트레칭을 하는 뒷모습이 영화에 인상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김혜수씨는 고니와 하룻밤을 보낸 뒤 침대에 앉아 대화를 나눌 때 그렇게 하고, 염정아씨는 운동복 차림으로 창호에게 로또가 꽝이 됐다고 말하면서 서점 문 앞에서 스트레칭을 하죠. 그러잖아도 이 질문을 드리려고 했는데, 먼저 고백하시네요.(웃음)

“음… 그런 것 같긴 해요.(웃음) 제가 고양이나 표범이 나른하게 몸을 쭉 펼 때의 모습 같은 것을 좋아하거든요. 저는 바디 랭귀지도 대사라고 생각해요. 그런 모습들도 뭔가를 말하고 있다는 거죠. 그 스트레칭은 마치 100m 달리기를 하기 직전에 선수가 몸을 푸는 동작과 같은 걸 겁니다. 그 장면들이 지나면 두 여자가 싸움을 하러 가야 하는 상황에서, 그 직전의 나른함을 표현하는 거죠. 거기에 제가 좋아하는 여성의 모습이 있는 것도 사실인 듯 해요. 이런 거 들키니까 정말 창피하네요.(웃음) 그래도 제 영화 속에서 여자가 스타킹을 신고서 식탁을 기어다니는 장면 같은 것은 없잖아요?(웃음) 페데리코 펠리니는 그런 장면도 참 과감히 쓰던데요.”

“너 도박의 꽃이 누군지 아니?”(‘타짜’에서 백윤식이 조승우에게 김혜수에 대해 언급하면서.)

-김혜수씨는 ‘타짜’에서의 연기를 통해 지난 20년간 출연했던 그 어느 영화에서보다도 더 큰 성과를 얻었습니다. 배우의 오랜 갈증을 감독이 최적의 방식으로 해갈시켜준 것 같다는 인상이었죠. 이 영화에서의 정마담 연기만큼 파워풀한 모습을 김혜수씨가 이전에 보여준 적이 없었는데요, 김혜수씨를 이 영화에 기용한 것은 결과적으로 볼 때 타입 캐스팅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들 처음에는 정마담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그 전에 했던 영화 ‘얼굴 없는 미녀’의 영향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영화가 공포영화니까 김혜수씨를 캐스팅하면 관객들이 좀 무서워하지 않겠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영화가 공개되고나서 타입 캐스팅이란 말을 듣게 된 것이 저로선 무척 기분 좋은 일이죠. ‘타짜’에서 김혜수씨를 꼭 캐스팅하고 싶었던 것은 이전에 김혜수씨가 정마담 같은 배역을 단 한 번도 안 했다는 점이었어요. 저로선 의아스러울 정도였죠.”

“나랑 일하면 BMW 탄다.”(‘타짜’에서 뒷모습 누드로 걸어가면서 조승우에게 제안하는 김혜수.)

-‘타짜’에서 김혜수씨는 파격적인 누드 연기를 보였습니다. 그때 어떻게 찍으셨습니까.

“시나리오에는 딱 한 줄이었어요. ‘침대 위에서 이야기하는 둘.’(웃음)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에 김혜수씨가 마치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그 장면은 어떻게 찍을 거냐고 묻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직접 조승우씨와 김혜수씨가 취해야 할 자세를 보여줬죠. 듣고 있던 김혜수씨가 딱 한 마디 하더라구요. ‘살 좀 빼야겠네.’(웃음) 저는 사실 그 누드 장면이 관객들을 놀라게 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어요. 어린 고니를 대담하게 한 번에 잡아버리는 그 장면이 없다면 정마담이란 캐릭터의 무게가 생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뿐입니다. 김혜수씨도 그 장면을 찍고 나서 정마담이 어떤 여자인지 알았다고 말하더군요. 배우가 벗는다는 것은 굉장히 민감한 문제죠. 어떤 면에서는 용기일 수도 몰입일 수도 있는 거죠. 또 어떤 면에서는 정치적 판단도 있는 거구요. 그런데 그게 드라마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면 저는 언제라도 배우를 설득할 것 같습니다. 흔쾌히 응해준 김혜수씨에게 고맙죠.”

-그날 촬영장 분위기가 묘했겠네요.

“쥐 죽은 듯 침묵 속에 굉장한 흥분이 있었죠. 김혜수씨는 그 장면 다 찍을 때까지 점심도 안 먹었어요.(웃음)”

“누구예요? 보디가드?” “고니라고. 내일 선수로 뛸 아이야. 난 바람이나 잡고.” “그렇게 실력이 좋아요? 그냥 젠틀해 보이는데요.”(‘타짜’에서 김혜수와 백윤식의 조승우에 대한 대화.)

-조승우씨가 연기를 잘 한다는 건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타짜’에서는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사실 조승우씨의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른 배역이었는데요.

“조승우씨가 일반적으로 젠틀한 역을 하잖아요? 처음에 조승우씨를 떠올렸던 것은 고니가 남들이 화투를 치고 있을 때 작두를 들고 깽판을 치는 장면을 썼을 때였어요. 그걸 조승우씨가 하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죠. 조승우씨라면 순진하고 조금 어리숙해 보이는 소년에서부터 아주 날카로운 타짜까지 다양한 모습을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이 있었어요. 일단 연기력이 출중한데다가 얼굴이 어떻게 보면 순진해 보이고 또 어떻게 보면 비열해 보인다는 장점까지 있죠.”

-조승우씨는 웃는 모습이 참 매력적입니다. 여성 팬들이 그 미소를 정말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진짜 매력적이죠. 촬영장에서도 조승우씨가 웃으면 다들 기분이 좋아져요. 배우로서 타고난 천재의 기운이 있는 거 같아요. 촬영장에서도 평소에는 신발도 대충 구겨 신은 채 앉아서 탁자에 놓인 과자 중에서 어느 걸 먹을까를 궁리하는 소년 같은데, 카메라가 돌아가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뀝니다. 감독들이 조승우씨의 그런 모습에 매료되는 것 같아요.”

“최창혁이. 얘는 어때?” “애는 진국이요. 구라 좋고 빠꼼하고 도박 좋아하고.”(‘범죄의 재구성’에서 박신양에 대한 김상호와 백윤식의 대화.)

-‘범죄의 재구성’에서 박신양씨는 특수분장까지 하고 1인2역을 했습니다. 함께 작업할 때 박신양씨는 어땠습니까.

“박신양씨는 그 특수분장을 위해서 매번 다섯시간씩 꼼짝 않고 앉아 있어야 했어요. 그렇게 모두 22회 촬영을 했는데, 특수분장 때문에 촬영하면서 애를 먹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촬영 시간에 언제나 30분 일찍 왔으니까요. 연기에 대한 열의가 대단한 배우죠. 초반에 의견이 조금 달라서 약간 티격태격했는데, 박신양씨가 신인 감독인 저를 예쁘게 봐줬죠.(웃음) ‘범죄의 재구성’이 굉장히 특별한 영화가 될 거라고 많이 격려해줬어요.”

“내가 쪼그라들었다고 어떤 씨발놈이 그래, 어?”(‘범죄의 재구성’에서 박신양이 소문을 들먹이며 약 올리자 갑자기 핏대를 올리는 백윤식.)

-‘지구를 지켜라’에 이어 ‘범죄의 재구성’에서 뛰어난 연기를 선보임으로써 백윤식씨는 50대 후반의 나이에 영화배우로 크게 각광받게 되었습니다. ‘범죄의 재구성’에서 백윤식씨의 연기는 정말 대단했죠. 그런데 백윤식씨는 위에 제가 인용한 대사를 할 때 앞 부분에서 천천히 낮게 읊조리다가 욕을 하는 부분에선 갑자기 흥분해 목소리를 터뜨리듯 끌어올리는 독특한 말투를 선보입니다. 극중 부패한 형사에게 욕을 할 때도 비슷한 대사의 톤을 보여주죠.

“백선생님은 술 마시면서 노실 때 그런 뉘앙스가 튀어나옵니다. 3 옥타브를 넘나드는 목소리 변절이라고 할까요.(웃음) 그 장면을 찍을 때 처음엔 무게를 잡는 식으로 평범하게 하셨죠. 그래서 제가 그런 내면 연기 말고 외면 연기로 해달라고 부탁드렸더니 그 목소리가 튀어나오더라구요. 본인도 좀 쑥스러우셨던지 ‘이거 안 쓸 거지?’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바로 ‘아뇨, 쓸 건데요’라고 말씀드렸죠.(웃음) ‘범죄의 재구성’에서 백선생님이 연기한 김선생은 마치 장 가뱅처럼 전체적으로 무게중심을 잡아야 하는 게 있었죠. 그런데 그게 늘 한결같기보다는 허점이 있어서 가끔씩 깨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백선생님의 조금 우스꽝스러운 면을 찍은 겁니다. 그래야만 김선생이 실은 양아치에 불과하다는 게 드러나니까요. 저는 ‘범죄의 재구성’에서의 백선생님 모습도 좋지만, ‘그때 그 사람들’에서의 연기를 정말 좋아합니다.”

“니가 얼매나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노. 내가 그랬나. 이 씨발 새끼야. 죽이삘라.”(‘범죄의 재구성’에서 사정없이 용의자를 구타하는 다혈질 형사 김윤석.)

-‘타짜’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 아귀로 나온 김윤석씨의 연기에 감탄합니다. 불과 다섯 씬에만 나오는데도 정말 대단한 카리스마를 보였죠. 그런데 감독님은 이미 ‘범죄의 재구성’에서 김윤석씨를 캐스팅하셨죠. ‘범죄의 재구성’에서도 김윤석씨는 성질 급하고 말이 빠른 형사 역을 아주 잘 소화해냈는데, 김윤석씨와 처음 작업했을 때의 이야기를 좀 들려주시죠.

“원래 ‘범죄의 재구성’에서 김윤석씨 배역에 할당된 대사는 딱 두 줄 뿐이었어요. 그런데 연기를 워낙 잘 하시니까 제가 자연스럽게 대사를 점점 늘이게 되더라구요. 정말 형사 같았거든요. 천호진 선배가 이 사람 정말 대단한 것 같다고, 무슨 대사를 해도 리액션을 다 해낸다고 감탄했어요. 그래서 ‘타짜’를 하게 됐을 때 술 먹는 자리에서 차기작에도 출연해달라고 부탁했죠. 김윤석 선배는 평소에 무척이나 젠틀한 사람이예요. 그런데 배우로서의 내면에는 전혀 다른 게 내재해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 몫의 촬영이 없는 날 촬영장에 놀러오실 때 보면 옆집 수퍼 아저씨가 온 것 같죠. 그런데 분장을 하고 카메라 앞에 서면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되어 서 있어요.”

-김윤석씨가 ‘타짜’ 이후 밀려드는 출연 요청으로 맹활약하고 있는 상황이 기분 좋으시죠?

“진짜 기쁘죠. 저는 배우가 돋보이도록 만드는 게 영화가 잘 될 수 있는 최고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이거 왜 이래? 새삼스럽게.” “고발이 들어와서 그래. 며칠만 들어갔다 나와.” “아이 참, 나 이대 나온 여자야. 내가 어떻게 그런 델 들어가?” (‘타짜’에서 도박 혐의로 경찰서에 가게 된 김혜수의 경찰에 대한 항변.)

-‘범죄의 재구성’의 가장 유명한 말이 ‘청진기’ 대사라면, ‘타짜’의 가장 유명한 대사는 “나, 이대 나온 여자야”일 겁니다. 심지어 이 말은 구설수에 오르기까지 했으니까요. 근데 사실 감독님은 이대 외에도 고려대와 서울대 역시 대사로 거명하신 전력이 있으시죠.(웃음) ‘범죄의 재구성’에는 “여보, 인사해. 여기 우리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동창. 은행 다녀”라는 대사와 “나 고대 다닐 때 내 룸메이트가 한의학 전공했었어요” “고대 나오셨어요? 나도 고댄데”라는 대화도 나오잖아요. 그런데 왜 감독님의 출신학교인 서강대는 등장시키지 않으셨습니까.(웃음)

최동훈 감독 ⓒ 이동진닷컴-김현호

"잘 아시겠지만, 저는 그 대사에서 이대를 비꼬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대를 대사로 쓴 것은 대학 이름 자체에 엄청난 판타지가 있기 때문이죠. ‘왜 이래, 나 서강대 나온 여자야’라고 하면, 그게 무슨 감흥이 있겠어요.(웃음) 제가 서강대를 나왔으니 서강대를 도마에 올린 대사를 쓰고 싶기도 한데, 서강대는 대학명으로서 어떤 판타지 같은 게 없지 않습니까. 시간 잘 지키고 일을 잘 처리하지 못했을 때 자학하고, 뭐 그런 인물에 대해서는 서강대를 언급할 수도 있겠죠. 아니, 그런 때라도 서강대 대신 카이스트라고 쓸 것 같네요.(웃음) 서울대 대사 역시 서울대 경제학과를 욕하는 게 절대 아니죠. 그런 대사를 들었을 때 관객들이 느끼는 모종의 뉘앙스 때문에 쓴 것 뿐입니다.”

“그래, 그 접시는 언제부터 돌리시고?” “아이 뭐. 철들고부터 돌리기 시작했죠.”(‘범죄의 재구성’에서 박원상이 사기꾼 경력을 묻자 박신양이 대답.)

-감독님은 (영화라는) 접시를 언제부터 돌리셨습니까.(웃음)

"중학교 때부터입니다. ‘어우동’을 필두로 극장을 수도 없이 들락거렸죠.”

-그 나이에 ‘어우동’을 보셨다니, 정말 충격이 크셨겠습니다.(웃음)

"충격이 한 1년 갔죠.(웃음) 영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대학교 4학년 때 영화 동아리에서였습니다. 그때 제가 단편 영화를 하나 찍었는데 완성본을 보고나서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거의 목불인견 수준이더라구요. 다시 찍으면 그것보다는 잘 찍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자꾸 드는 거예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시나리오 작가를 하려고 한 거죠. 감독이 되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라고 생각했고, 제 성격 자체가 카리스마가 없어서 감독에 어울리는 성품이 아니라고 판단했으니까요. 그래서 그때부터 시나리오 공모전이 있을 때마다 도전했는데 전부 다 떨어졌어요.(웃음) 영화 아카데미에 들어갈 때도 확신이 없었어요. 그러다 ‘눈물’에서 임상수 감독님 연출부 생활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감독 꿈을 꾸기 시작한 겁니다.”

“아니, 선생님 그 손?” “손이 왜?” “어떻게 하신 겁니까.” “손은 눈보다 빠르다.”(‘타짜’에서 신기에 가까운 손놀림에 조승우가 놀라자 백윤식이 일갈.)

-‘타짜’에서 평경장은 고니에게 손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합니다. 반면에 짝귀는 고니에게 화투는 손이 아니라 마음으로 치는 것이라고 가르치죠. 모든 영화는 손과 마음이 다 필요하지만, 장인들의 장르 영화는 손으로 찍는 영화에 가깝겠지요. 굳이 고른다면 감독님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손으로 영화를 찍습니까, 아니면 마음으로 영화를 찍습니까.

"제 영화는 손으로 만드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시나리오를 쓸 땐 아주 꼼꼼하게 씁니다. 그러나 촬영장에서 영화를 찍을 때는 기분 내키는 대로 찍습니다. 최대한 재미있게 찍으면서도 최대한 안정적으로 찍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불안정한 쇼트들을 좋아하거든요. 어쨌든 현장에선 가능한 경쾌하게 찍으려고 해요. 손으로 만들어도 물론 그 속에 마음이 있긴 하죠. 마음으로 찍는 영화를 높게 평가하는 게 대세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최동훈이라는 사람의 성향이 그런 건 어쩔 수 없는 거죠.”

“넌 화투 배우지 마라. 길에서 객사할 팔자다.”(‘타짜’에서 제자가 되고 싶다는 조승우의 손금을 보던 백윤식.)

-영화가 팔자라고 느끼십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어려서부터 문자중독증에 가까울 정도로 책을 즐겼습니다. 결코 영상세대가 아니었던 거죠. 그런데 대학 국문과에 진학하고나서 내 자신이 너무나 글을 못 쓰는 것 같아서 자책하기 시작했어요. 나에겐 왜 언어의 조탁력이 없을까. 난 왜 엉덩이가 진득하니 무겁지 않을까. 그런데 영화는 엉덩이가 무거울 때와 가벼울 때가 다 생산적인 매체죠. 그리고 상상력이 중요한 시나리오는 유려한 문장이 아니어도 되구요. 그런데 사실 영화 일은 종사하는 누구에게나 다 팔자라는 느낌을 주는 이상한 직업입니다.”

“일 하나만 더 해. 오백 줄테니까 차 하나 쌔벼서 전주로 와.”(‘타짜’에서 김혜수가 사립탐정에게 지시하며.)

-‘타짜’의 속편을 연출하지 않기로 하셨습니다. 왜 거절하셨는지요.

“도박 영화가 어렵더라구요. 원작이 있을 경우 저는 제 나름의 각색 방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 틀에 안 맞으면 전부 버리죠. ‘타짜 2’를 제가 하면 인물을 다루는 방법 등에서 ‘타짜’와 똑 같은 방식으로 할 것 같아요. 그러면 과연 그 영화가 재미있을까요? 제가 속편까지 하면 오히려 관객들이 안 좋아할 수도 있을 거예요. 그리고 전 다른 걸 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기도 하구요.”

-그 속편은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 감독이 맡기로 했죠. 장준환 감독의 ‘타짜 2’는 어떤 영화가 될 것이라고 예측하시는지요.

“제가 만든 ‘타짜’와는 완전히 다른 영화가 나올 것 같습니다. 앞으로 ‘타짜’는 매번 다른 감독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찍었던 ‘에일리언’ 시리즈와 비슷한 방식으로 나올 것 같습니다. 시리즈 영화는 그렇게 속편이 나오는 게 재미있을 것 같아요. 사실 우린 둘 다 도박을 거의 못한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그런데 얼마 전 서울 아트시네마에서 장준환 감독을 만났는데 ‘언제 한 번 포커 치자’고 외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다가가 ‘제발 사람들 다 보는 데서 큰소리로 말하지 말라’고 부탁했죠. ‘타짜’ 1-2편의 감독 둘이 그런 대화를 나누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웃음)

-두 분이 일대일로 붙어서 포커나 화투를 치면, 정말 그림이 환상적이겠는데요?(웃음)

“그래서 지금, 사람 불러다놓고 1.4후퇴 때 이야기 하자는 거예요?”(‘범죄의 재구성’에서 경찰서에 불려온 사기꾼 염정아의 항변.)

-감독으로서 관객을 극장에 불러놓고 하시고 싶은 이야기가 결국 어떤 이야기입니까.

“저는 무조건 나쁜 인간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해리슨 포드 나왔던 ‘헨리 이야기’ 같은 내용을 너무 좋아해요.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가 자신의 과거를 살펴보니 자신이 너무나 나쁜 놈이더라, 뭐 이런 이야기잖아요. 반면에 싫어하는 영화는 윌 스미스가 주연한 ‘행복을 찾아서’ 같은 영화예요.”

-왜 나쁜 인간에 그렇게 관심이 많으신가요.

“저는 성악설을 믿는 편입니다. 아이들을 보면 교육 받기 전 인간의 원초적인 본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요. 무조건 생존의지만 있는데, 인간에게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죠. 바로 그래서 나쁜 거예요. 생존만 하면 되는데 거추장스런 도덕이 있으니까요. 죄를 짓는 사람들이 더 흥미롭습니다. 그게 인간의 본모습에 가까워서요. 사람들에겐 자신에게 피해만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런 인간을 보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사람들이 바로 관객이라고 보시는 거죠?

“그렇죠.”

“우리 오랜만에 샤워 한 번 할까.” “하지 마.” “그래, 비즈니스가 우선이니까.”(‘범죄의 재구성’에서 오랜만에 만난 백윤식과 염정아의 대화.)

-이런 분류 자체가 우습지만, 감독님은 예술영화보다는 상업영화 쪽에 훨씬 더 무게를 싣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충무로 사람들이 감독님께 계속 큰 기대를 걸고 있기도 하구요. 본인에 대한 이런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또 저 혼자 깊숙한 곳에서는 예술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있죠.(웃음) 사실 제가 상업영화적이라기보다는 할리우드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장르영화를 무척 좋아하시죠? 만드신 두 편도 그렇구요.

“네. 저는 제가 운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제가 데뷔작으로 범죄극 시나리오를 쓸 때 그런 영화가 없었으니까요. 케이퍼 무비(경쾌한 범죄영화)는 언제나 영화사에 있어왔는데도 불구하고, ‘범죄의 재구성’ 같은 이야기를 충무로에서 하지 않았기에 관객들이 그 영화를 좋아했다고 전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타짜’가 잘 된 것은 원작과 배우의 힘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운이 좋았을 뿐이예요. 전 계속 제가 하던 방식대로 이야기를 할텐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어요. 화무십일홍이고 감독은 길어야 10년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10년이면 사회 전체가 아예 바뀌는 것 같아요. 지금은 한국 영화의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는 시기인 것 같은데, 앞으로 10년이 어떻게 될지 당혹감이 있어요. 저도 시대와 같이 가는 거니까 제가 어떻게 변화할지 궁금합니다.”

이동진블로그'언제나영화처럼'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