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좁혀가며 결말에 공을 들인다 - 박상연



드라마 <선덕여왕>, 영화 <고지전>의 박상연 작가

지금 TV드라마를 말할 때, 영화인들은 ‘캐릭터’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TV 속 캐릭터를 말할 때, <선덕여왕>의 미실을 빼놓지 않는다. <선덕여왕>을 쓴 박상연 작가는 지금 영화 <고지전>을 각색 중이다. <대장금>의 김영현 작가와 함께 KP&SHOW란 작가팀을 꾸려 <히트> <최강칠우> 등의 드라마를 집필했고, 과거에는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원작 소설인 를 썼다. <선덕여왕>을 사례로 삼아 지금 TV드라마가 변화하고 있는 몇 가지 지점, 그리고 영화와 방송을 오가는 작가로서의 고민을 들어봤다.

현재 <고지전>은 어느 정도 진척된 상태인가.

각색 중이다. <히트>를 끝내고 썼던 작품이다. <선덕여왕>에 들어가면서 넘겼는데, 사실 드라마가 끝날 때쯤 이 영화가 개봉할 줄 알았다. 그런데 각색이 지지부진해서 드라마가 끝난 뒤 본격적으로 붙게 됐다. 아무래도 나나 장훈 감독님이나 <고지전>을 앞두고 좋은 결과가 있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힘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종영한 지 3개월이 지났지만, 그래도 <선덕여왕>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이 작품에서 기존 드라마와는 다르게 시도한 실험은 무엇이었나.

크게 두 가지였다. 캐릭터에 대한 시청자의 소구력을 극대화화는 것. 그리고 미스터리, 형사물, 스릴러 등 기존 장르를 사극에 이식해보려 했다. 일단 드라마는 분량이 길기 때문에 실험할 수 있는 여건이 좋다. 어떤 게 안 먹히면 다른 걸 보여주면 되니까. 만약 영화에서 실험이 안됐다면 바로 조기종영하고 끝났을 거다.

미실의 힘은 도무지 한계를 종잡을 수 없다는 점이 컸던 것 같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더 엄청난 인물이었다는 게 드러나는 구조였다.

그건 <드래곤 볼>을 차용했다. (웃음) 적이 점점 세지지 않나. 우리 세대에 <드래곤 볼>의 드라마투르기는 깊은 영향을 준 것 같다.

미실의 캐릭터 때문에 결국 <선덕여왕>은 덕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덕만 대 미실 그리고 덕만 대 비담의 이야기가 된 것 같다.

사실 좀 가슴 아픈 부분이다. 미실이 점점 거대해지는 과정에는 드라마 시스템만이 가질 수 있는 특징이 있다. 작가가 대본을 넘기면 배우가 연기해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는 그걸 보다가 다시 대본을 쓴다. 그렇게 교감하면서 캐릭터가 강화되는 게 있다. 작가 입장에서는 드라마와 영화의 가장 큰 차이가 아닐까 싶다.

자신의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캐릭터는 처음부터 의도한 건가? 만들면서 강화한 것인가.

그건 지금 작가들이 고민하는 거대한 트렌드일 거다. 예전에는 대의를 위하거나 나라와 가족을 생각하는 캐릭터들이 소구됐는데,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캐릭터가 환영받기 시작했다. 시대 자체가 그래서 그런가? 무한경쟁으로 치달으면서 솔직하지 못하면 불편한 시대가 된 것 같다. 이제 착한 척하는 캐릭터는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이 창작자에게는 다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 캐릭터의 강화가 드라마의 성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을까.

일단 드라마의 화제성은 캐릭터에서 나온다. 스토리가 화제가 되려면 <식스 센스>나 <유주얼 서스펙트> 정도가 되어야 할 거다. 캐릭터를 보는 관객은 배신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시청률을 높이는 건 결국 스토리더라. 우리로서는 새로운 숙제를 얻은 셈이었다. 어느 순간 캐릭터와 스토리가 충돌하는 지점이 생긴다. <선덕여왕>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아직도 풀지 못한 숙제다.

만약 미실을 영화에서 묘사했다면 어땠을까.

드라마만큼 구축되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미실이 그만큼 나온 것에는 세월의 힘이 있다. 8개월을 방영하면서 시청자도 미실과 함께 살고 느꼈다. 영화는 많은 장점을 가진 시스템이지만, 캐릭터에 세월의 무게를 싣지는 못했을 것이다.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는 입장에서 볼 때, 각각의 분야에서 느끼는 차이가 있다면 어떤 걸까.

디테일한 걸로 말하자면, 드라마에서 담배를 못 피우게 하는 건 정말 화가 난다. 난 정말 그 정서를 잘 표현할 자신이 있는데…. (웃음) 표현수위에 대한 건 다 아는 문제이고. 다른 게 있다면, 이야기의 전개방식이 다르다. 드라마가 이야기를 펼쳐가는 방식이라면 영화는 좁혀가는 방식이다. 그 차이를 파악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김영현 작가님한테 배우면서 느낀 거다. 지금은 어느 정도 깨달았다고 생각한다. 드라마 쓸 때와 영화를 쓸 때의 태도가 아예 다르다. 심지어 글씨체도 달라진다. (웃음)

하지만 <선덕여왕>도 그렇고, <파스타> <지붕 뚫고 하이킥!> <추노>도 좁혀가는 방식으로 보인다.

영화적인 작법을 차용하고 있는 것 같다. 좁혀간다는 건 꼭 반전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완결을 짓는 쾌감의 문제다. 그리고 스토리를 좁혀가면 완성도가 높아진다. 사실 드라마는 결말에 공을 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49부에 시청률이 50% 나오면 마지막 50회를 대충 만들어도 50%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좁혀가고 결말에 공을 들이는 것이 요즘 드라마에서 변화하고 있는 부분인 것 같다.

<선덕여왕>은 다른 드라마에 비해 복선의 폭이 넓다는 점에 놀랐다. 예를 들어 3회에 덕만이 화주를 얻는데, 39회에 가서 그 화주로 세필을 확인하더라. 복선으로 계획한 거였나, 아니면 순발력이었나.

계획한 것도 있고, 얻어서 걸린 것도 있다. 아무래도 그런 부분이 완성도로 직결되니까 고민할 수밖에 없다. 덕만이가 사막에서 정광력을 얻고, 나중에 일식 에피소드에서 사용하는 건 처음부터 계획된 거다. 그외에도 <선덕여왕>에서는 캐릭터를 중간투입시키는 실험을 해봤다. 비담과 유승호는 작가들과 함께 ‘투입 며칠 전’이라고 염두에 두면서 시나리오를 썼다.

캐릭터를 중간에 투입하는 게 이전 드라마에서는 어려웠던 건가.

출연횟수 보장이라는 관습이 있었다. 말하자면 60부작에 섭외하려면 60부 출연료를 줘야 하는 거다. 그게 아니면 잘 안 하려는 게 있다. 그 기간 동안 다른 걸 할 수 없어서 그런 거다. <선덕여왕>은 처음부터 배우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문노나 칠숙도 처음 나오고 나중에 나오지 않나. 미리 말씀을 드리고 설득하니까 또 되더라. <선덕여왕>의 배우들이 <추노>에 나오기에 봤는데, <추노>도 캐릭터를 중간에 투입하는 구성을 하고 있더라.

혹시 <히트> <선덕여왕> 때의 경험이 <고지전>에 반영된 것이 있나.

경험으로 치면 일단 빨리 쓰는 거다. 이우정 PD나 영화계에서 나를 아는 사람들이 다 인정하고 있다. (웃음) 예전에는 정말 늦게 썼다. 확실히 드라마는 스토리텔링에서 영화와 비교할 수 없는 순발력을 요구하기 때문인 것 같다. 작가뿐만 아니라 연출자, 배우, 스탭들이 순발력을 요구당할 수밖에 없으니까.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는 입장에서 고민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나는 드라마와 영화를 다 쓰고 있지만, 영화 시나리오 전문작가들이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었으면 한다. 한때 그런 이야기를 했다. “충무로에서 시나리오 쓰는 사람은 두 종류다. 감독이 되고 싶은데 못 되는 사람, 그리고 감독으로 가는 과정 중에 있는 사람.” 물론 한때 작가들이 잘나가던 때가 있었다. 박정우, 공수창, 김대우…. 하지만 결국 다 감독이 되셨다. 만약 영화 마니아들한테 지금 한국 시나리오작가 중에 누굴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누구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좋아하고 안 좋아하고를 떠나서 어떤 시나리오작가가 있는지 모를 거다. 영화계가 작가의 처우에 대해서 좀더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

최근에 주변 작가들 가운데 드라마에서 활동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편인가.

매우 많다. 영화를 준비하다가 결국 드라마로 옮겨온 거다. 시나리오작가는 드라마작가에 비하면 훨씬 더 비정규직이다. 프로젝트에 들어갔어도 끝까지 못 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드라마는 큰 문제가 없는 이상 시청률이 얼마가 나오든 간에 끝까지 간다. 시나리오작가의 롤모델이 없다는 게 비극인 것 같다. 영화계 안에서 작가의 롤모델은 없지 않나. 대신 감독의 롤모델이 많은 거지.

최근 드라마의 변화 원인을 영화적인 작법을 고민하던 사람들이 방송계로 왔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도 있을까.

그런 측면도 있을 것이다. <아이리스>의 작가들도 원래 영화쪽 인력이었고, 천성일 작가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라고 본다. 같이 놓고 봤을 때, 영화란 공통점 외에 70년대 초반 태생의 남자 작가란 특징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다. 천성일 작가의 연배는 잘 모르겠다. 나중에 한번 확인해달라(확인 결과 천성일 작가도 70년대 초반 태생이었다). 절대적인 수치로 봤을 때, 드라마를 쓰는 남자 작가는 여자 작가에 비해 별로 없다. 또 이 세대가 사실 미국 드라마를 섭취한 1세대다. <맥가이버> <에어울프> <600만불의 사나이> 같은 것. 그런 문화에는 당시 여성보다 남성이 더 많이 열광했고, 그렇게 비슷한 감성을 가진 남자 세대가 드라마에 유입되어 나타나는 결과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물어보자. 이미 드라마쪽에서 입지를 다졌다. 굳이 영화를 안 해도 되는 것 아닌가.

드라마만 써도 되긴 한다. 하지만 내가 영화가 좋고, 영화에 대한 욕망이 있어서 하는 거다. 그 욕망이란 건 결국 완성도다. 작법 면에서도 영화는 드라마보다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일 수 있으니까. 또 일단 나온 영상을 봤을 때도 다르다. 드라마보다 영화가 내가 쓴 이야기를 더 충분히 구현할 수 있는 시간적, 물질적 토대가 있다.

다음 드라마는 언제쯤 하게 되나.

아마 내년에 다시 시작할 것 같다. 일단 <고지전>을 끝내야 본격적으로 구상할 시간이 생길 것 같다.


씨네 21 - 글 : 강병진 사진 : 오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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