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편의 영화처럼 - 천성일



드라마 <추노>의 천성일 작가

지난 3월25일, <추노>가 끝났다. 사극의 무대를 궁궐이 아닌 저잣거리로 불러왔다는 것, 개성있는 다수의 캐릭터와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퇴장, 그리고 탐미적인 액션 연출과 영상미로 영화인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된 드라마였다. <추노>를 쓴 이는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과 <7급 공무원> <아빠가 여자를 좋아해>의 시나리오를 집필한 천성일 작가다. <추노>에 대해서도 물어볼 게 많았지만, 그가 누군지도 궁금했다. 아쉽게도 그는 사진 촬영을 고사했다. “난 어차피 무대 뒤에 있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들은 네가 뭔데 신비주의냐고 하지만, 그냥 뒤에만 있고 싶어서 그럴 뿐이다. 얼마 전에는 몰카로 찍힌 뒷모습이 나갔는데, 그것도 난감했었다.” 이번 인터뷰에는 그의 얼굴 대신 명함을 싣는다.

<추노>의 인물들이 원한 혁명은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일단 결말에 대한 의도부터 묻고 싶다.

실패로 끝났다기보다는 실패도 과정의 연속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업복이의 죽음은 세상을 변화시키지는 못했지만 충실한 노비로 살려고 했던 상노 아저씨를 변화시키지 않았나. 거의 반죽음이 된 송태하도 결국 이 땅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황철웅이 선영이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도 그런 이유다. 그들의 죽음은 그냥 죽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추노>의 소재는 어디서 찾은 건가.

5년 전에 사극 시리즈로 영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코미디와 로맨틱코미디, 하드보일드한 추격전, 이렇게 3개의 연작이었다. 자료를 찾던 도중 노비추세도감이란 관청이 고려 때부터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관노비를 잡아들이는 국가기관이었던 거다. 관련자료에서 보면 나중에는 도망노비들에 비해 관원이 부족해서 사적으로 노비를 추세했다고 하더라. 지금으로 보면 그들이 흥신소 역할을 한 셈이다. 이쪽에서 치열한 이야기가 많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영화로 개발한 아이템인데, 드라마로 선회한 이유는 무엇인가.

시나리오 초고를 끝내놓고 나니까 규모가 엄청 크더라. 80억원가량 들 것 같았다. 병자호란도 담아야 하고, 인물도 많아서 한편으로 끝낼 수 있을지도 걱정이었다. <킬 빌>처럼 2개로 나눠서 해볼까 생각도 했다. 그러다 모니터를 하던 와중에 드라마로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래서 계획없이 그냥 한번 해보자 했던 거다.

<추노>의 초반부를 봤을 때, 첫 느낌은 질퍽하다는 거였다. 쌍과부 주모나 그들 주변의 영감들이 솔직하게 욕망을 드러내더라.

그런 부분을 쓸 때 떠올린 건 막노동판이었다. 스무살 때인가, 알바 삼아서 막노동을 했는데 재밌는 게 이런 거다. 가면 일단 새참을 먹고, 커피를 배달시킨다. 또 나중에 점심을 먹고 커피를 시킨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새참을 먹고 또 커피를 시키더라. 그럼 레지노동자가 오는데, 이때 분위기가 정말 질퍽했다. 내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두분과 나, 이렇게 셋이 있는데…. 서로 오가는 말들이 장난이 아니었다. 아저씨들이 농짓거리를 하면 레지노동자들이 또 능수능란하게 받아준다. 그때 들은 말 중에 ‘배꼽 맞춘다’는 대사가 그나마 가장 수위가 낮은 쪽이다. “이게 만진 거여? 오다가다 스친 거지”, 그런 대사들도 그렇고.

성적인 묘사 측면에서 지금의 KBS가 이 기획을 받아들인 건 꽤 흥미로웠다.

나도 에로작가로 불리지만, 곽정환 감독님께서도 곽‘선정’으로 이름을 바꿨다. (웃음) 어떻게 용납이 됐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내가 먼저 감독님에게 대사의 수위가 아슬아슬한 것 같다고 말했었다. 알아서 할 테니까 쓰고 싶은 대로 쓰라고 하더라. 그래서 방송통신위원회에서 경고가 떨어지지 않냐, 경고가 가면 감독에게만 가는 거냐, 작가한테까지 오는 거냐고 물어봤다. “작가에게는 안 떨어집니다”, 그래서 그럼 뭐 그렇게 하시죠라고 농담처럼 이야기했다. 감독님도 표현수위의 끝에서 해보고 싶으셨던 것 같다.

<추노>의 재미는 다른 드라마가 안 하던 것을 한다는 점에 있다. 일단 끝까지 갈 줄 알았던 인물들이 빨리 퇴장하는 점이 뜻밖이었다.

원래 더 빨리 죽이려 했는데, 늦춘 거였다. 그러니까 내가 드라마에 감이 없었던 거다. 주인공 위주의 이야기를 가져가면서 맛깔나는 조연들을 끝까지 배치하는 게 좋았을 수도 있다. 설마 내가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빨리 죽였겠나. (웃음)

남자끼리 대화하면서 ‘형’ 대신 ‘언니’란 호칭을 썼다. 처음부터 설정한 부분이었나.

그건 꼭 쓰겠다고 한 거였다.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에 ‘언니’란 호칭이 나온다. 임꺽정처럼 털이 복슬복슬한 이미지와 가녀린 언니란 호칭의 언밸런스가 너무 재밌었다. 사실 형은 한자어 아닌가. 우리 말 고운 말 입장에서 보면 ‘언니’가 맞을 수도 있겠더라.

천지호란 캐릭터에 시청자의 애정이 많았다. 특히 죽어가는 장면의 묘사도 독특했다. 농담삼아 천지호의 죽음은 화살이 아니라 무좀 때문이었다는 말도 한다.

우리끼리도 그런 농담 한다. (웃음) 성동일 선배는 <원스 어폰 어 타임>을 같이 하면서 판만 깔아주면 되는 배우라고 생각했다. 멍석을 크게 깔면 크게 놀고, 넓으면 넓은 대로 놀고, 좁게 깔아주면 그 안에서 높낮이로 뛰어논다. (웃음) 대본을 쓰면서도 천지호는 편했다. 부족한 부분을 다 알아서 메워주니까. 예를 들어 입에 엽전을 물고 죽는 건 대본에 없었던 거였다. 성동일 선배가 직접 만든 거다. 선배님은 대본을 바꿔서 미안하다고 하셨는데, 난 너무 고맙다고 했다.

전체적으로 <추노>는 배반이 키워드인 드라마다. 내용상에도 ‘배반’이란 키워드가 있지만, 시청자의 예상과 기대를 배반하는 것도 있다. 처음부터 정해놓은 규칙이 있었나.

잘 몰라서 그런 거였는데, 크게 4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가 이야기를 빨리 전개하자는 거였고, 두 번째가 액션에서 장풍과 와이어 금지였다. 세 번째가 출생의 비밀이나 과거를 금지하는 거였고, 마지막으로 궁궐 안으로 들어가지 말자는 게 있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궁궐은 좀 많이 나오기는 했다. 와이어는 가끔 썼고. 장풍은 쓰지 않았다. 과거사는 미루어 짐작하면 충분할 정도로 묘사했다.

그만큼 <추노>에서도 여러 실험을 해본 것 같다.

가장 큰 실험이 사극인데도 궁중사극을 하지 말자는 거였다. 처음 구성하면서도 굉장히 위험한 발상 같았다. (웃음) 두 번째는 로드무비에 대한 도전이었다. 사실 로드무비는 영화에서도 힘들다. 세트도 없이, 산길에서 달려나가는 걸 4, 5초 찍으려고 하루 종일 산에 올라가야 하니까. 영화에서도 시도하기 힘든데, 드라마는 오죽했을까. 보통 사극은 세트에서 쭉쭉 나가다가 가끔 야외에서 말 한번 타야 하는 건데 말이다. 스탭들에게 정말 미안했다. 한번은 산에 올라갔는데, 조명크레인까지 왔기에 조명감독 눈에 안 띄려고 했다. (웃음) 그외에 특별히 실험한 건 없었다.

<추노>를 구상하면서 롤모델로 삼은 영화가 있었나.

액션 같은 경우는 좀 아름다운 디자인이었으면 했다. 기획 당시 <300>이 나왔는데, 그런 느낌을 생각한 것 같다. 나머지는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감독님은 드라마여도 그 시간 동안 몰입해서 볼 수 있도록 하자고 하시더라. 그래서 이야기 전개도 빠르게 가려고 한 거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영화가 롤모델이었던 것 같다. 감독님도 사실상 24편의 영화를 만들고 싶으셨던 같고. 그래서 사전제작도 충분히 했다. 배우들도 놀랐다고 하더라. 많이 찍고 오래 찍고 집요하게 찍어서. 어제 크랭크업을 할 때도 정말 감독이 잔인하다고 느꼈다. 이종혁이 우는데 나 같으면 15번 오케이했을 걸 가지고 끝까지 안 하더라. 이 정도면 되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말이지. 감독의 그런 에너지가 전이된 것 같다.

<추노>에는 전작과 비슷한 부분도 있다. 역사에 기록될 리 없지만, 역사를 움직이는 이야기다. <원스 어폰 어 타임>이나 <7급 공무원>에도 그런 부분이 있었다. 지령을 내리는 실체는 없고, 서로가 서로의 편인 줄 모르는 사람들을 그렸다는 면에서 비슷해 보인다.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원스 어폰 어 타임>에서 지령은 김구 선생님이 내리는 건데, 출연을 안 하시는 거다. (웃음) 아무래도 두 작품 모두 소재 면에서는 후발주자였다. 남들이 한 걸 빼놓고 가려니까 나온 것 같고, 또 하나는 의외성이 주는 재미를 담으려 했던 거였다.

영화쪽에서는 작가이자 영화사 하리마오 픽쳐스의 대표다. 감독이 제작사를 갖는 경우는 있지만, 작가가 차린 경우는 드문 것 같다.

대표였는데 바뀌었다. 지금은 하리마오 컨텐츠 대표로 있다. 제작과 기획개발을 따로 분리한 거다. 그리고 소문이 와전된 게 있다. 작가가 회사를 만든 게 아니라 회사를 만들었는데 작가가 된 거다. 제작을 하려고 기획개발을 하고 있었는데, 모든 영화사 그렇듯 어려움이 많았다. 기획은 계속해도 개발비용이 모자라니까.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일단 써보자 했던 것이다. 내가 시나 소설을 쓰는 것도 아니고 감독님들이나 스탭들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것이란 믿음 때문에 덤볐던 것 같다.

그래도 어찌됐든 성공한 작가가 됐다. 지금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까.

그런 건 없다. 사실 <추노>에도 그런 건 없었다. 일단 내가 체계적으로 공부한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관객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건 없다. 다만, 관객이 지금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할까가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

다음 작품은 무엇인가.

드라마도 하겠지만, 일단 <서부전선 이상없다>란 전쟁영화를 준비 중이다. 2년 전부터 기획한 영화인데, 해놓고 보니 올해가 6·25 60주년이더라. 미리 머리를 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 같다. (웃음)


씨네 21 - 글 : 강병진 사진 : 오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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