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전하려 스타일 바꿨다" 박찬욱 vs 류승완
<공동경비구역 JSA>와 영화를 이야기하다


아무도 예감하지 못했던 성공은 어떤 맛이냐고 캐묻기 위해 박찬욱(37), 류승완(27) 두 감독의 데이트를 주선한 것은 아니었다. 엿새 만에 전국 100만 관객을 돌파한 기록의 영화를 만든 스타라서, 가난하게 고투하며 한땀 한땀 떠낸 영화를 100만명에 값하는 7만 관객에게 보여준 영웅이어서만은 아니었다. 다만 폭력에 대해, 희생을 강요받은 청춘에 대해, 사람들이 돌아보지 않는 영화의 매혹에 대해 끈질기게 혹은 정열적으로 집중해온 두 '영화 청년'에겐 서로에게 할말이 끝도 없이 많을 듯했다. 그리고 그 대화 속에서 올 가을 한국 관객의 시선을 욕심스레 사로잡아버린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와 박찬욱 감독을 여는 열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두 감독이 실제로 절친한 사이라면 더이상 무엇을 망설이랴.

비평가 박찬욱의 글을 애독하고 그의 데뷔작 <달은 해가 꾸는 꿈>을 사랑한 감독 지망생 류승완이 존경하는 선배를 처음 만난 것은 1993년. 류승완 감독은 다짜고짜 <달은 해가…>에서 그가 감동한 부분이 달도 아니고 해도 아니고 꿈도 아니고 병원 복도에서 이승철이 주먹싸움 벌이는 장면임을 당당히 밝혔다. 당황한 박찬욱 감독은 "너는 나보다 아무개 감독을 찾아가는 게 좋겠다"고 조용히 충고했지만, 운명인지 인연은 계속되어 류승완 감독은 중도에 불시착한 박 감독의 영화 <야간비행>에 연출부로 동승했고 <삼인조>의 연출부로 참여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류승완 감독은 날 영화스승이라고 말하지만 류승완은 내게 인생의 스승이다"라는 애정 고백을 박찬욱 감독에게서 듣는 지경에 이르렀다. 인터넷영화 <다찌마와Lee>의 녹음 작업에 몰리면서도 류 감독은 A4 용지 몇장에 프린트한 질문지를 품고 대담에 나섰다. 그리고 <…JSA>의 힘에 대해, '자세'가 나오는 영화 인생에 대해 선배에게 질문을 날렸다.


류승완: 상투적으로 시작할게요. 한국에서 영화 좀 본다는 사람치고 박찬욱이라는 인물이 흥행 기록을 깨는 영화를 만들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잖아요? 그런데 <…JSA>가 흥행과 비평 양쪽으로 성공하고 9시 뉴스까지 취재에 달려드는 이 사태를 맞이하는 심정이 궁금해요.

박찬욱: 음, 내 영화 같지가 않고 '넘'이 만든 영화 같다고 할까. 이제 류승완의 아픔을 이해할 것 같다.


류: 최고의 자리에서 느끼는 고독이랄까요? 엇, 이런 농담했다 오해받으면 곤란한데. 우리는 언제나 다음 일을 찾는 일용직 노동자, 하이에나잖아요. 그런데 인센티브 계약은 하셨나요? 아니라니고요. 애석하네요.

박: 음, 많이 챙겼어야 하는데. (웃음)


류: 본인 아이디어로 출발한 전작들과 달리 영화사에서 제의를 받고 다른 작가도 붙고 원작도 있는 <…JSA>가 흥행은 그렇다치고 비평적으로도 월등한 결과를 얻었는데요.

박: 이 영화가 과찬받은 것 자체는 괜찮은데 예전 영화들이 무시당한 게 억울하지.


류: (깊이 공감하며) 마치 나의 <변질헤드>가 무시당한 것같이! 그런데 감독님과 절친한 이무영 선배는 자기가 만든 영화가 100만 관객이 들면 너무 많은 사람이 내 세계관을 이해한다는 게 기분 나쁠 것도 같다는 말을 한 적 있는데 감독님은 어때요?

박: 개봉 전 시사회할 무렵에 딱 하룻동안 조금 개운치 않더라. 평소에 영화평이 만장일치로 가는 우리 풍토가 싫었는데, 아무리 내 영화지만 좀 그랬어. <박하사탕>을 만든 이창동 감독님은 어땠을까 생각하기도 하고. 하지만 그건 딱 하루고 그 다음부터는 좋더라구. (웃음)


류: 누군가 몇몇 장단점을 지적하면 계속 그 부분만 부각되잖아요. 차라리 세계관이 아예 다른 사람이, 창작자와 영판 다른 지점에서 색다른 시각을 제기해 주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박: 그리고 잘 보면 만장일치도 아니야. 칭찬을 받으면 안주하고 싶어질까 걱정했는데 시간이 좀 흐르니까 안 그럴 자신이 생겼어. 이제 담담해.

류: 감독님은 안주하기에는 주변에 괴상한 인물들이 너무 많죠. (웃음) 예산에 대한 부담은 없었나요.


박: 촬영 막바지에 국방부 협조가 없어서 예산을 좀 초과했는데, 어느날 제작자가 서울 50만이 들면 적자고 51만이 들면 남는다고 하는 거야. 숨이 멎는 줄 알았잖아. 억, 이거 어떻게 찍냐. 겁나서 다 줄이려는데 제작자가 오히려 그러지 말라고 하더군.


류: 그래도 50만에 떠는 건 괜찮지요. 서울에서 1만명 안 들까봐 떠는 마음 아세요?

박: 블록버스터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인산인해 신도 없고 엄청난 세트가 폭파된다거나 하는 스펙터클이 없기 때문에 별로 어울린다고 생각은 안 해봤어. 마케팅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개념이니 그런가보다 해.


류: 저는 돈이 판문점 세트에 다 들어가서 돈이 화면에 안 보일 줄 알았는데 스펙터클이 충분히 있던데요? 갈대밭 장면이라던가. (그건 돈 별로 안 들었다고 박 감독이 말하자) '야메'로 돈 안 들이고 돈 들인 것처럼 찍는 게 진정한 기술이 아닌가 싶어요.

박: 갈대밭은 스탭의 제안으로 밤장면으로 바꿨는데, 크레인 이동 등등 골치가 아프더라고. 그런데 둘러보니 사방 풍경이 다 똑같지 뭐야. 그래서 조명 세워놓고 방향만 바꿔가며 찍었지. (웃음)


류: 영화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점이 뭔가요?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박: 너와 좀 안 어울리는 질문 같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겠다. 어떤 걸 피해야겠다는 생각은 있어. 흔히 나는 '이똥이잔'이라고 표현하는데, 똥폼, 똥무게, 잔재주, 잔머리, 네 가지야. 예컨대 젊은 영화광들이 좋아한 <다크시티>나 올리버 스톤의 영화들, <중경삼림> 이후의 왕가위 영화들은 싫어.


류: 그런데 갈대 숲장면 그렇게 찍은 것도 그다지 큰 머리는 아니지 않나? (웃음) <…JSA>를 만들며 참고한 영화는 없나요.

박: 기억을 되살리려 해도 안 나더라. 아, 하나 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랑 총격전에서 수혁이 쓰러져 있을 때 빗살같이 총알이 지나가는 장면. <씬 레드 라인>도 좀 참고했고.


류: <…JSA>는 군사영화로서도 역대 최고라는 말을 어떤 인터뷰에서 했어요. 우리 영화는 격전이 벌어져도 그 안에 감정이 없었잖아요. <…JSA>와 비교할 만한 것이 있다면 <아벵고 공수군단>에서 정윤희가 기다리고 있는데 신일룡이 북한군 사이에서 죽어가는 장면 정도?

박: 이 영화의 총격전에서 특이한 건 막상 주인공들은 전투가 벌어지면 어딘가에 쓰러져서 총을 안 쏜다는 점이지.


류: 그게 좋았던 것 같아. 거기서 갑자기 다리난간 짚고 총 쏘고 그러면, 안 행복했을 거야.

박: (--;) 아무리 그렇게야 했겠냐. 수혁을 구조하는 장면은 화력으로 압도하는 수밖에 없는데, 찍기 싫어서 어떡하나 고민하다가 차라리 주인공들이 어울려 놀던 공간인 북쪽 초소를 박살내면 감정적인 효과가 있지 않을까 하기도 했지. 하지만 그렇게 하면 총을 쏘아대는 애들은 주인공들의 적이 되잖아. 그런데 걔들이 과연 적인가. 아무리 엑스트라들이라 해도 그들이 '적'으로 묘사되면 슬플 것 같더라. 믹싱 갖고도 음향팀과 많이 싸웠어. 총성 이펙트와 김광석 노래가 대등하게 가야한다고 우겼지. 인물의 감정이 실린 김광석 목소리와 체제를 상징하는 총성은 서로 싸워줘야 하거든. 그런데 나중에 보니 다 헛수고다 싶은 게, 어느 극장은 음악이 엄청 크게 들리고, 시네마스코프 열심히 찍어봤자 상하좌우 다 잘리고, 심지어는 구조가 오락가락하다보니 프린트 순서를 바꿔 튼 곳까지 있더라.


류: <…JSA> 시나리오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브라이언 드 팔마가 떠올랐어요. 새뮤얼 풀러만큼이나 히치콕을 좋아하잖아요. 드 팔마가 재현한 히치콕의 세계와 <…JSA> 속에 재현된 히치콕의 세계를 비교할 수 있을까요?

박: 나 예전만큼 히치콕 안 좋아한다. 원래 웰 메이드(well-made) 영화에 대한 거부감이 있고. 하지만 히치콕이나 구로사와 아키라쯤 되면 그런 경지를 뛰어넘는 부분이 있다고 믿긴 하지. 그래도 따라하고 싶지는 않았어. 하지만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아주 간절하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 영화는 웰 메이드 스타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나보다는 관객이 중요하고 연기가 중요하고 이야기가 중요한 영화니까.


류: B급 영화란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영화라는 생각이 있는데, 전 사실 우리가 잘 만들었다고 감탄하는 샘 페킨파나 아벨 페라라의 B급 영화를 보면 대화장면은 문법에 충실하고 사운드 디자인도 꼼꼼하고 연기도 기가 막히잖아요. <개달리다>도 그런 예죠.

박: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야기가 뭐 저러냐" 하면서 싫어하지. <블루벨벳> 같은 작품도 지금은 고전이 됐지만,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뭐야 저거"하는 분위기였어. 그러니까 더더욱 사회적 이슈를 다룬 영화는 코스타 가브라스 같다는 '욕'을 먹어도 웰 메이드로 가야 하지 않을까 해.


류: 하긴 <삼인조>도 감정이 중요한 시나리오였죠. 정서는 다를지 몰라도 <노킹 온 헤븐스 도어>처럼 현실에 몰리다 못해 탈출하다 사고치는 이야기잖아요. <삼인조>는 의도적으로 정숙함을 파괴한 영화였지만, 개인적으로는 영화 자체가 지닌 폭력적 저항의 냄새가 캐릭터 안에 이미 깃들어 있으니 오히려 문법에 충실했으면 감정을 더 잘 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했어요.

박: 글쎄, 확실히 시나리오는 재밌다고 한 사람이 많았던 반면 영화는 그렇지 못했지. 하지만 나는 반대로 더 난폭하게 찍어야 하지 않았나 생각해. 그런데 질문 좀 짧게 해. 네가 지면에 더 많이 나가려고 그러는 거지?


류: 저야 독사진도 안 찍었는데요, 뭐. (볼멘소리에 좌중 웃음) 그건 그렇고 감독님 작품세계를 논하면서 평자들이 단편 <심판>을 논외로 치는 것에 섭섭하지 않아요?

박: 졸라 섭섭하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거든.


류: 제가 볼 땐 감독님 전작 가운데 <…JSA>와 연관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영화가 <심판> 같아요. <달은 해가 꾸는 꿈>과 <삼인조>는 웰 메이드 영화에 대한 삐딱한 시선을 담은 B급 영화 예찬론자의 영화였지만 <심판>부터는 달랐어요. <달은 해가…>-<삼인조>와 <심판>-<…JSA>는 존 카펜터와 히치콕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느낌이에요.

박: 말한 대로 <달은 해가…>는 분명 테크닉에 대한 고민이 많았고 <삼인조>는 그것을 피하려고 오히려 과도하게 노력한 영화야. 테크닉을 없애고 감춘 것도 없고 보이는 게 다인 영화를 하려고 애쓴 거지. 이제는 억지로 그럴 필요가 없다, 작품에 따라 필요하면 어떤 테크닉도 사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 된 거고. 그러고보니 연기의 중요성을 이해한 것이 <심판> 때부터인 것 같아. 예전에는 "난 디즈니가 부럽다. 연기가 맘에 안 들면 배우를 찢어버리면 되니까"라는 히치콕의 말을 읽으며 "참 멋진 말이야. 예술은 감독의 것 아니겠어?"했지만, 이제 변했어. 가만 보니까 나 자신이 되풀이해 보는 영화들의 공통점이 배우들이 멋있거나 연기를 잘하거나 앙상블 연기가 훌륭한 영화더라구.


류: 특히 북쪽 초소에서 네 배우의 호흡이나, 거기 한명의 방해자가 뛰어들어 한 공간에서 다섯 인물이 연출한 긴장은 예술이었어요. 서로 감정을 잡아먹지 않는 느낌, 동선을 세밀하게 짜놓고 연기를 섬세하게 잡아내는 품이 <심판>이랑 비슷했죠.

박: 영화전문지나 평론가들이 꼭 롱테이크해야 예술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았지만, 현장에서는 우습게 생각하잖아. 그런데 필요할 때는 길게 찍고 그 다음에 작게 따고 들어갈 필요도 있거든. <심판>에서도 그걸 해보고 싶었어. 넓은 의미의 플랑 세캉스라고 할까.


류: 아무튼 롱테이크를 잘 찍는 사람이 대단하긴 해. 특히 한참 롱테이크를 찍다가 끄트머리에 다 돼서 실수 하나 나오면 자세 안 나오죠. 특히 종일 찍고 해떨어질 때 다 돼서 그러면 정말 자세 안 나와요. 그런데 감독님 영화는 시나리오와 완성된 영화가 늘 거리가 있어요. 이번에도 시나리오의 치밀한 미스터리 구조가 영화에서는 다 빠졌어요.

박: 영화가 길어질까봐 그런 것도 있지만 수사 자체는 '미끼'에 지나지 않았어. 수사보다는 과거에 벌어진 일이 중요하고, 소피는 탐정이라기보다 관찰자로 출발해서 더이상 관찰자로 머물지 못하고 개입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는 점이 중요하지. 미스터리 부분이 결함이라고 다들 얘기하는데, 난 별로 그렇게 생각 안 해. 미끼를 너무 중시한 게 아닐까. 처음에는 <…JSA>가 캐릭터보다 판문점이라는 공간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했어. 사실 가보면 참 웃긴 곳이거든. 서로 더 높은 깃대 세우려고 경쟁하다, 회담장 탁자의 깃대가 천장에 닿는 일도 있고.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게 뭐 판문점 관광 영화도 아니고, 그래서 그림자가 넘어오는 장면만 남겼어.


류: 어느 평론가가 "이 영화는 절제가 가장 큰 미덕이다"라고 했는데 정말 맞는 말이에요. 그림자 장면만 해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잖아요.

박: 나도 그 장면 좋아해. 송강호가 ADR(좋은 대사가 나올 때까지 되풀이하다 적절한 부분을 자동으로 기록하는 방식)을 너무 싫어해. <쉬리>의 한 장면이 컴퓨터 화면과 동조 문제가 있어서 아주 힘들었대. 그래서 후시녹음을 했는데 "그림자 넘어왔어, 야" 하는 대사가 처음에는 그냥 무겁게 깔려 나왔는데, 후시에서 약간 장난기 있게 끝을 올린 것이 무척 마음에 들었어. 보통 동시녹음의 효과를 유지만 해도 다행인데, 개선됐으니 드문 경우지. 그런데 이 얘기는 <쉬리>에 실례가 되나? 그냥 전작 중 하나라고 할까?


류: 글쎄요, 그러면 도리어 모든 영화를 적으로 만드는 거 아닐까요?

박: 그럴까?


류: 그럼 그냥 한 배우가 그랬다고 할까요?

박: 아무튼 절제의 문제에서는 배우들 공이 커. 모두들 오버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거의 강박에 가까웠거든. 특히 이영애는 굉장했지. TV와 영화는 다르다, 절대 오버하면 안 된다면서 말 한 마디 해놓고도 무척 겁을 냈어. 송강호도 너무 감상적이라며 대질 심문장면을 빼자고 계속 주장했어. 영화를 본 뒤에는 "아, 그 장면 뺐으면 큰일났지!" 했지만.


류: 제가 볼 때 감독님은 많은 모순을 안고 출발한 듯해요. 영화적인 피와 자연인 박찬욱의 피가 다르다고 할까요.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는 이훈 감독님과 비교하자면 너무 많은 문제를 염두에 두고 고민한다고 할까요. 예컨대 트랜스섹슈얼이 예비군 훈련받는 장면을 동성애자 인권문제를 건드릴 수 있다는 이유로 뺀다든가. 이훈 감독님이라면 찍은 걸 다 붙일 텐데.

박: 그렇지. 그 친구는 빼면 러닝타임을 채울 수가 없잖아. (웃음) 나같은 사람은 흔한 사례야. 성장환경이 무난하고 남들처럼 교육받고 책 많이 읽고. 그런 사람이 예술을 할 경우에는 그런 요소를 부정하고 싶어하잖아.


류: 전 지식인처럼 보이려고 하는데도 잘 안 되는데요? 요즘 감독님 혼란 느끼지 않나요. 예전처럼 껄렁하게 영화 만들 때랑 지금이랑 완전히 사람들이 대하는 태도가 다르니.

박: 어떤 인터뷰에서 왜 이리 영화스타일이 바뀌었냐고 물어서, B급 영화 아무리 해봐야 사람들이 영화를 우습게 보고 존중하지 않고 영화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감정적으로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다른 스타일로 만들었다고 말했어. 그런데 기사는 "B급 영화 감독이라고 사람들이 깔봐서 오기로 그랬다"는 식으로 나왔어.


류: 하하. 저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때 비슷한 일이 있었죠. 한창 바빠서 "내 스케줄이 컨추리 꼬꼬예요"라고 했는데 마치 컨추리 꼬꼬 싫어하는 것처럼 기사가 났지 뭐예요.

박: 또 총격장면을 찍기 싫어 <쉬리> 같은 영화를 못 찍는다고 했는데 아예 헤드라인이 그걸로 뽑혀서 마치 그런 영화는 수준이 낮아 안 찍는다고 한 것처럼 나와서 난처했지.


류: 어유, 저는 어떤 여성지랑 인터뷰한 기사 제목이 "고학력 아내 만나고 영화도 성공해 요즘 행복합니다"라고 나왔는데요 뭐. (박장대소)

박: 어쨌든 내가 가진 상반된 욕구와 속성- 지식인적인 셩격- 이 모순이라면 그걸 공격적으로 장점으로 바꿔야 할 것 아니야. 영화마다 작품에 맞게 성격을 바꿔가며 찍어야지. '치기'라는 표현이 보는 사람에게서 나오면 틀린 거라고 생각해. 대담하다거나 실험적이라거나 하는 말이 나올 만큼 해내야지. 삐끗하면 자세 안 나오지.


류: 할 하틀리가 그런 걸 참 잘해요. 상거래 원칙을 준수하면서, 아예 안 될 듯한 영화는 단편으로 찍는다든가. 아무리 적게 드는 상업영화도 제작비가 10억원인데, 이건 한 사람이 평생 벌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돈이잖아요. 직업 감독으로서 그런 건 지켜줘야 한다고 봐요. 저예산으로 해야 빛이 나는 아이디어들도 있구요. 장편을 해서 번 돈으로 단편을 찍고 싶다는 얘기도 한 적 있지요?

박: 당연하지. 하지만 내 돈을 직접 쓰는 일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 봐야지. (웃음)


류: <달은 해가…>는 폭력에 노출된 젊은이의 이야기였고 <삼인조> 역시 난폭한 영화였죠. <심판>에서는 자연재해 형태로 폭력을 표현했고 <…JSA>는 시스템의 폭력을 보여주었어요. 폭력묘사에 대한 생각이 궁금해요. 진 켈리의 뮤지컬이나 영화 속 폭력이 별 다를 게 없다는 쪽인가요.

박: 오우삼처럼 폭력을 안무한다거나 하는 입장은 전혀 아니야. 폭력을 멋지게 묘사하는 건 보기 싫어. ("멋있을 수도 있죠"라고 류승완 감독이 이의를 제기한다.) 그냥 사람이 사람에게 물리적 심리적 위해를 가하는 문제에 대해 생각이 많아. 더군다나 국가권력에 의한 폭력과 그것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폭력이 행해지는 시대에 청년기를 보냈으니까. 본의 아니게 되풀이되는 나의 테마는 죄짓는 행위로서의 폭력과 구원받으려고 발버둥치다 저지르는 폭력이야. 어쩌면 가톨릭 교회를 다닌 성장 환경의 영향이 남아 있는지도 모르지.


류: 개인적으로 올해 잘된 <반칙왕>이나 <…JSA>가 멜로가 없어도 영화가 된다는 사실을 입증해줘서 좋아요. 마치 영화를 만드는 데 필름이 있어야 하듯 멜로를 필수요소로 생각하는 강박관념이 있었는데

박: <서편제>도 그렇고 의외로 크게 잘된 요소 중 멜로가 빠진 작품들이 있지. 나는 남녀간의 애정에 대해서는 별로 잘 그릴 자신이 없어서 일종의 형제애를 많이 다루는 게 아닌가 싶어.


류: 저야 뭐, 형제애나 우정이 나와야 '쌈'이 나니까 그래서 좋아하죠.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같은 영화를 좋아하다가도 성룡 신작 나오면 바로 아작이에요. (웃음) 제 새 영화 견적 좀 내보려고 그러는데, 몇회나 찍었나요. 편집 과정에서 들어낸 장면은 없나요.

박: 55회 촬영했고 컷은 900여개 정도였어. 필름도 별로 안 썼고 배우와 스탭이 선수라서 규모에 비해 적었지. 잘라낸 것은 '판문점 투어'장면들. 이영애가 회담장에 와서 선글래스에 어색할 만큼 공격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남한군에 질문하는 장면이 있었지. 그런데 인민군들은 왜 이리 태도가 여유만만이냐고 물으면 단 한마디 대답이 돌아오지. "이기니까." 지금 보면 넣었으면 어땠을까 싶은 대사도 있어. "이 사건이 재미있는 점은 공범자들이 하나의 시나리오로 입을 맞춘 게 아니라 상반된 주장을 하기로 입을 맞췄다는 점이다"라는 이영애의 대사나 그것과 연결해 "우리 아버지가 제3국을 택한 포로라는 사실은 하나인데, 남북은 이를 정반대로 해석한다. 그런데 결과는 똑같다. 양쪽 다 나를 거부한다는 것"이라는 대사. 많이 찍고 버리는 짓 안 하려 애썼고 진행을 서둘렀어. 촬영감독이 러닝타임 넘칠까봐 이렇게 고민하는 감독 처음 봤다고 하더라. 하지만 나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류: 불만이 있다면 소피의 추리 과정이 마치 <라쇼몽>처럼 내부자와 아웃사이더의 시선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보여주길 바랐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점이에요. 그런데 라스트가 정말 짱이었어요. 이상하게 마지막의 정지 프레임 하나가 그때까지 잡아낸 영화의 모든 단점과 취향을 초월해, 꼭 남북이 화해하듯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와 화해하고 극장을 나서게 만들더라구요.

박: 결말 시나리오는 열 몇개가 있었어. 소피가 몇년 뒤 다시 방문한 판문점에서 다시 네 주인공과 비슷한 젊은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있었고, 이병헌이 소피 아버지처럼 외국으로 떠나는 결말도 있었지. 김지운 감독은 그게 좋았는데 왜 안 했냐고 하더니 잠깐 생각하고나서 또 "그럼 마지막의 사진을 못 쓰나? 그건 아닌데…" 하더라구. (웃음) 사실 결말의 아이디어는 병사들 인터뷰 과정에서 얻었어. 북한 애들과 좀 사귀고도 같이 어울릴 용기가 없는 친구들 있잖아. 그런 애들이 근무 설 때 졸병시켜 기념사진을 찍으면 약속한 시간에 맞춰 북한 애들이 뒤로 슬쩍 지나가며 사진에 모습을 담는다는 거야. 슬프지.

류: 다음 영화 계획은 정해졌나요.

박: 우선 흡혈귀 이야기를 담은 <박쥐>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던 무성 공포영화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구상한 작품으로 종교영화에 가까운 호러야. 유괴범죄를 새롭게 해석하는 아주 비정한 미니멀리즘에 입각한 저예산영화도 궁리하고 있고, 인혁당 이야기도 꼭 만들어야지. 사이버 캐릭터와 인간의 갈등을 그린 스토리도 하나 있어. 그러고보니 애니메이션 <셀마>(햄릿의 철자를 뒤집은 제목)도 파이낸싱중이네. 당장 작업하고 싶은데 그동안 가족 내팽개친 데에 대한 비난이 거세서 좀 쉬려구. 충무로에 들어온 이후 어떤 창작도 하지 않고 하루라도 보내는 건 요즘이 처음이야. 네 계획은?


류: 그건 비밀이에요. (야유가 나오자) 에이, 그게 아니라 될지 안 될지 몰라서 그래요.

<글:씨네 21-김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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