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8끼씩 먹으며 5일만에 탈고했다” - 고은님 [1] l [2] l [3]

"한 동성애자가 홈페이지에 '애인의 손을 꼭 잡고 봤다. 애인이 나중에 나도 저렇게 예쁜 여자로 태어날게라고 말해서 둘이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고 썼다. 그분들처럼 다른 분들도 사랑 이야기로 봐줬으면 좋겠다."

고은님? 기자가 본명이냐고 묻자 "제가 지으면 이렇게 부담스럽게 안 짓죠"라며 웃는다. 그도 그럴 것이 고은님은 서인우, 인태희, 임현빈, 어혜주 등 튀지 않으면서도 어딘가 평범하지 않게 작명을 해냈던 작가가 아닌가. 눈 엔터테인먼트(noon entertainment)의 창립작품 <번지점프를 하다>가 장안의 화제가 되면서 신인작가 고은님은 정오의 하늘에 튀어 오를 만큼 높게 번지점프를 하고 있다. 며칠 전 고은님은 홍익회 매점 주인이 "신문에 실린 기사와 사진을 봤다"며 껌을 공짜로 주기에 얼떨결에 받기도 하는 등 독특한 시나리오 뿐 아니라 한번 들으면 잊기 어려운 이름 때문에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감독이나 배우에게만 지면을 할애해온 일간지들조차 "미모의 시나리오 작가" "영화계의 신데델라"를 운운하며 그녀의 사진과 기사를 여러 차례 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명세를 치를수록 고은님은 진땀을 흘리고 있다. 우선 <번지점프를 하다>를 동성애영화, 혹은 반동성애 영화로 비난하는 글들이 인터넷 게시판을 도배하자 모험적인 시나리오로 관계자들을 설득할 때 만큼이나 "이 영화는 그냥 사랑 이야기"라고 해명하기 바쁘다. 또 첫번째 시나리오로 그녀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진 만큼 두번째 시나리오도 잘 써야 한다는 강박증도 그녀를 편히 두지 않는다.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지만 그동안 살면서 느꼈던 감정, 의문, 경험 등이 영화 곳곳에 녹아있는('숟가락’의 받침이 왜 'ㅅ'이 아니고 'ㄷ'이냐는 태희의 질문은 고은님이 중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께 했던 질문이다) <번지점프를 하다>와 달리 액션영화로 방향을 튼 두번째 영화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이 백일하에 드러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연극배우, 성우, 소설가 등 '말 맛'을 즐기는 직업을 꿈꿨던 고은님이 영화라는 '그림'의 바탕을 만드는 시나리오 작가가 된 것은 어쩌면 우연일 수도 있다. 98년 당시 쿠앤씨 필름에서 시나리오 작가를 모집한다고 했을 때 그녀가 가져간 것은 '말 맛'나는 자기 소개서 한 장 뿐이었다. 현재 눈 엔터테인먼트에 대표로 있는 최낙권씨가 그녀를 눈여겨 보지 않았다면 고은님은 지금 드라마 작가를 희망하는 쇼 프로그램의 구성 작가로 남아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글은 차분차분 쌓아가는 일이라기보다는 언제나 처음부터 시작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고은님은 시나리오를 쓸 때면 하루 8끼씩 먹으며 자판을 두드리는 무서운 저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 번지점프를 해봤나

안 해봤다. 뉴질랜드 촬영장에서 해보려고 했는데 상황이 열악해서 못 했다. 번지점프를 하는 스포츠영화였다면 경험이 필요했겠지만 멜로영화니까 시나리오를 쓰는데 별 무리가 없었다.

■ 그러면 번지점프 모티브를 어떻게 얻었나

대학교 1학년때 어느 책에서 "우리는 나무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바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뛰어내리는 사람을 보고서야 비로소 인생의 절벽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문장을 읽고 인생의 끝이 절벽이라는 생각이 머리 속에 남아 있었다. 인우와 현빈이 절벽에서 뛰어내리지만 그게 '죽음'이 아니라 '비상'이라는 느낌을 주고 싶어 절벽 끝의 번지점프를 떠올렸다. 이미지가 아니라 글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 원래는 제목이 더 길었다고 들었다

처음에는 <태희는 죽고 인우와 현빈은 번지점프를 하러 가다>였다. 투자자의 관심을 끌려고 영화의 핵심이 되는 문장을 제목으로 만들었는데 제목이 너무 길어서 <번지점프를 하다>로 줄였다. 멜로영화는 두 글자여야 한다는 징크스가 있어서 두 글자짜리 제목도 찾아 봤지만 결국 <번지점프를 하다>로 결정했다.

■ 시나리오가 참신하다는 평이 많다

기발한 소재라고 칭찬하는 말도 많았지만 난 이 영화의 아이디어 자체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순간적으로는 상상할 수 있는 설정인데 다른 사람들은 놓쳤을 뿐이고 난 그 아이디어를 이야기로 풀었던 거다. 연인 사이에 흔히 오가는 "다시 죽었다 태어나도 너만 사랑할 거야"라는 맹세의 한계가 어디일까? 혹시 내가 남자로, 또 여자로 성별이 바뀌어 태어나도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할까? 하는 생각은 많이들 해봤을 거다.

■ 동성애를 소재주의로 악용했다는 비난도 있다

인우와 현빈의 관계가 동성애로 비춰질 수 있다는 게 이 영화의 상업적인 약점이다. 모두들 그것 때문에 걱정해서 홍보 차원에서 숨겼다. 그런 위험을 안고 쓴 건데 그걸 상업적으로 이용했다고 하니까 황당하다. 또 동성애자들이 이 영화에 비난만 하는 건 아니다. 한 동성애자가 홈페이지에 "애인의 손을 꼭 잡고 봤다. 애인이 '나중에 나도 저렇게 예쁜 여자로 태어날게'라고 말해서 둘이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고 썼다. 그분들처럼 다른 분들도 사랑 이야기로 봐줬으면 좋겠다.

■ 정신과 의사가 인우에게 "지극히 정상인데요"라고 말한다. 결국 동성애면 비정상이라는 얘기 아닌가

표현에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 그렇지만 인우가 진짜 동성애자였어도 나는 의사가 정상이라고 말했다고 썼을 것이다.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썼는데 오해의 여지를 준 건 경솔했다고 생각한다. 그 말 때문에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 다른 설정에 비해 교통사고는 상투적이다

왜 신선하게 가다가 교통사고로 진부하게 빠지냐는 지적이 있었지만 타의에 의해 우연히 죽어야 하는 데 마땅한 게 없었다. 아주 신선하게 죽지 못할 바에야 가장 흔하게 죽는 방법을 택하자, 다만 표현은 세련되게 하자고 했는데 영화는 막상 그렇게 안 나왔다.

■ 영화에 불만족스러운가

완성된 영화를 보고 내가 시나리오를 쓸 때 떠올렸던 그림과는 같은 장면이 하나도 없다는 것에 놀랐다. 교통사고 씬은 촬영이나 편집이 좀 절제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안 나와서 아쉬웠고, 마지막 번지점프 장면은 좀 더 역동적이고 희망적으로 나왔으면 했는데 "동반자살 아니야?"라는 말이 나올만큼 무거웠다. 촬영지도 위험했고 감독이 "담담하게 끝내자"는 의도로 연출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우의 대사에도 그런 말이 있듯이 '다르다'와 '틀리다'는 다른 의미다. 내 시나리오와는 '다르'지만 '틀린' 영화는 아니었다

■ 방송작가를 5년 동안 했다고 들었다. 시나리오 작가가 꿈이었나

구성작가도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었다. '신혼 퀴즈쇼'라고 주부 프로그램도 했고 심야 토크쇼, 코미디 프로 등등 여러가지를 썼다. 일이 재미있었지만 글을 쓰는 느낌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글을 잘 쓴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고 상도 많이 받았다. 대학시절에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영화감상이 취미다 보니 대사나 그림으로 표현하는 시나리오가 소설 이상의 매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98년부터는 극장에서 빵 먹으면서 하루에 3,4편씩 영화를 봤다.

■ 영화를 해보니 어떤가

영화는 여러 사람이 만들기 때문에 어려운 작업인 것 같다. <번지…>의 경우는 만나는 사람마다 설득할 일이 많아 더 힘들었다. 100명에 98명은 "이건 동성애 영화 아냐?"혹은 "신선하긴 한데 아직은 일러"라고 말렸고 난 계속 설득해야 했다. 이 영화에 관계된 사람들은 걱정 일색이었지만 투자자나 홍보사의 친구 등 어떻게 보면 일반 관객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시나리오를 읽고 감동받았다"고 해서 자신감을 얻었다.

■ 최낙권 대표가 스파르타식으로 시나리오를 쓰게 했다는 말이 있던데

내 작업 스타일이 구상하는 시간이 좀 걸려도 오래 쓰지 않는 것이다. 최대표가 "초고 쓰는 데 얼마나 걸리겠어?"라고 묻길래 "한달만 달라"고 했고 25일 생각하다가 5일동안 한번에 썼다. 초고로 투자자랑 계약하고 2고는 일주일 뒤, 3고는 사흘 뒤 이런 식으로 작업했다. <번지...>는 여럿이 같이 하는 게 아니라 혼자 하는 거고 머리에 다 들어 있었기 때문에 빨리 쓸 수 있었다. 몰아쳐서 빨리 나온 건 아니다.

■ 눈엔터테인먼트와 어떤 조건으로 일했나

편당 고료 지급이 아니라 직원으로 연봉 계약했다. 전속이 안정적이지만 부자유스럽고 부담되는 것도 사실이다. 눈에서 계속하자고 하는데 아직 결정을 못했다.

FILM 2.0 글 : 한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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