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놀라워라! 쌈마이의 진심! - 박정우 [1] l [2]

쌈마이란 결국 '넘버 쓰리'다. 이 쌈마이 정신을 추구하는 데다가 '넘버 쓰리'가 될 수밖에 없는 작가까지 자청하는 박정우는, 실상 알고 보면 넘버 원이다. <주유소 습격 사건> <신라의 달밤>에 이어 최근작 <라이터를 켜라>에까지 자신의 색깔을 이어가는 박정우를 영화평론가 이상용이 만났다. 그의 쌈마이 영화, 쌈마이 작가론을 들어보자.

시나리오 작가 겸 예비 영화감독 박정우와의 대화는 자청한 게임이었다. 예전에 대다수 사람들이 그저 그런 멜로영화로 생각한 <선물>을 두고 유달리 애정이 기울어져 비평을 쓴 적이 있었지만 그것이 그의 손을 거친 작품인지는 몰랐다. <라이터를 켜라>를 보고 나서야 그의 이름 석 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 영화는 박정우의 출세작 <주유소 습격 사건>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군중에 대한 묘사, 남성들의 폭력적인 세계, 쌈마이들의 등장이 눈길을 끄는 가운데 최근 한국영화의 주요한 흐름을 따르면서도 동시에 그것들을 위반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애초에 FILM2.0에 제안한 것은 '박정우론'이었다. 그런데 나를 기다리는 것은 장문의 인터뷰였다. 적잖이 당혹스러웠지만 한편으로 쌈마이를 자청하는 사내를 만나고 싶기도 했다.

그의 젊은 시절은 충무로에서의 한철이었다. 대학교의 첫 학기를 마치고 현장으로 뛰어든 겁 없는 아이는 어느새 가족을 거느리고, 제일 잘나간다는 시나리오 작가가 되어 있었다. 그에게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글밥을 먹고사는 이들이 그렇듯 언젠가 머릿속이 텅비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충무로에서 스무 살부터 꿈꿔온 소망을 실현시킬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조급함이 있다. 그가 건네는 명함에는 '감독 박정우'라고 씌어 있다. 얼마 후에는 크레딧의 구석에서 그의 이름을 찾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앞으로 그가 어떤 식으로 충무로에서 기억될지는 한참의 공백으로 남았지만, 지금의 대화는 유쾌했다. 쌈마이의 진심을 보았으니까.

1. 현장에서 일한다

박정우가 말하는 초보 시나리오 작가들에게 건네는 세 가지 충고. 우선, '창작 작업하는 사람들은 재능이 없다 싶으면 빨리 접어야 한다.' 그게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이다. 두번째, '글쓰는 사람들은 집중력이 중요하다.' 처음 개봉할 때는 작가라는 지위가 초라하다는 박탈감도 겪었지만 그것을 견디며 자기를 높여야 한다. 끝으로, '현장을 가봐라.' 영화가 무엇인지, 배우가 무엇을 하는지, 카메라가 세트를 뚫고 어떻게 들이대는지를 배워야 한다.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현장 경험 덕분이다.

현장에 가는 것으로 유명하다. 부담스러운 일이 아닌가.

내가 쓴 시나리오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가장 싫은 일이다.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기본이다. 현장에서 고쳐달라고 하면 귀찮기는 하지만 속으로는 반가운 일이다.

감독들이 부담스러워하지 않나.

그래서 처음에는 안 갔다. 현장에 가면 '어 웬일이야' 라고 해서, 음료수만 사주고 돌아온 적도 있다. 그런데 김상진 감독과 일하면서는 정반대였다. 원래 작가들은 시나리오 한 편 써가지고는 생활고가 해결되지 않고, 상대적인 박탈감 때문에 촬영에 들어가면 빨리 다른 작품으로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주유소 습격 사건> 때부터 촬영에서 개봉 때까지 붙어 있기로 했다. 숙소를 현장 옆에 잡아놓고 낮에는 <선물> 을 쓰고 <주유소 습격 사건>은 주로 밤 촬영이니까 밤에 현장에 앉아 계속 손을 봤다. 영화가 잘 나오건 못 나오건 내 톤은 유지되니까.

<선물> 때도 현장에 있었나.

그렇지는 않았다. <주유소 습격 사건> <신라의 달밤> <라이터를 켜라>를 함께 했다. 감독들에 따라 다르다.

오래 전부터 연출부를 한 탓에 현장 분위기가 익숙할 것 같다.

지금도 글을 써서 먹고살고 있지만 현장에 있는 게 가장 편하다.

현재 충무로의 관습 중 하나가 시나리오를 쓰는 게 감독이 되는 지름길이라고 한다. 좀 이상한 것 아닌가. 드라마를 짤 줄 아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꼭 감독이 글을 쓸 필요는 없지 않은가.

누군가가 그랬다. 자기 머릿속에 있는 것을 글로 표현 못하는데 어떻게 그림으로 표현하겠는가? 기본적으로 글로 표현할 줄 알면 반 정도는 먹고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관행이 굳어지면 작업의 분화가 안 이루어지지 않는가.

요즘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사실은 작가로 이름을 날릴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그냥 내가 쓴 시나리오가 잘돼서 나중에 감독을 할 때 밑바탕이 되었으면 싶었다. 그런데 요사이 당신까지 감독하면 작가는 누가 남나, 라는 말을 듣는다. 애초부터 감독을 하려고 충무로에 들어갔고, 연출부를 6년간 했기 때문에 다른 생각은 안 해봤다. 유능한 전업작가가 또 있겠지. 사실 마음 편하게 결혼하고 먹고사는 게 작가가 된 덕분이라서 작가도 병행해야 되지 않나,라는 생각은 한다.

최근에 시나리오 작가 중에서는 기획사에서 월급받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안다. 과거에 비춰보면 이례적인데, 이 분야의 전문가로서 갖게 되는 생각이 있을 것 같다.

여건은 정말 좋아졌다. 예전에는 불안감을 갖고 일했다. 3,4개월을 일해도 촬영에 들어갈 건지도 모르고, 계약금 없이 일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요즘은 기본적으로 최저 생계비라고 할까, 작업에 필요한 것을 조금은 보장해주는 경우가 많아졌다. 충무로는 그런 게 있다. 누군가가 모델이 되어주면 경계선을 뚫는 것은 쉬운 일이다. 문제는 모델이 되는 것이다. 연출부 개런티도 그렇고, 작가 비용도 그렇고. 하지만 먼저 시도하지는 않는 곳이다. 의식한 건 아니지만 내 경우 <주유소 습격 사건> 이후 하나의 모델이 된 셈이다. .

지금 초고 시나리오는 얼마나 받는가.

많이 안 받는다. 3천만 원 정도. 돈 가지고 싸워본 적은 거의 없다. 돈 받고 영화 하려고 한 것은 아니니까. 나중에 말 안 해도 알아서 주어야 하는, 나를 쓸려면 목돈 준비해서 불러야만 하는 위치까지 노력하자, 그때 이야기하자,(웃음) 뭐 그런 주의다.

현장에 자주 나가는 이유가 있는 셈이다.

그렇다. 작가 하려는 사람들 보면 한 작품에 매달려서 몸값을 높여야지 다작해서 먹고살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다작은 한계가 있을 것 같다.

그냥 여담인데 박 모씨라고, 시나리오를 쓰던 초창기에 제일 잘나가는 작가였다. 그때 한참 다작을 했다. 개봉한 것은 별로 없는데, 작업한 것은 충무로 내에 최다였다. 그런데 단명하더라.


2. 박정우는 쌈마이다. 하지만 생은 다른 곳에

박정우의 쌈마이 구별법. 일류, 이류, 삼류를 나눌 때 어떤 정치가가 비리를 저질러 신문 1면에 실렸을 때의 반응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일류는 이 정치가가 어떤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고 변절이 됐는가를 따진다. 이류는 이 사람과 연루 된 사람 중에 내 이름이 들어가지 않는가, 나는 피해를 입지 않을까를 따진다. 삼류는 이런 나쁜 새끼, 그런데 어제 프로야구 누가 이겼나.(웃음) 이게 쌈마이다.

멜로드라마를 좋아한다고 했지만 거의 실패했다.

사람들한테 '나는 쌈마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어도 한편으로는 보다 수준 있는 영화를 하고 싶다는 고민이 있다. 창작인으로서 조금 고급한 것을 하고 싶은 마음이지. 코미디에 재능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좋기는 한데, 한편으로는 코미디를 경시하는 풍조에 지레 겁먹는 거다.

<키스할까요>나 <선물>은 멜로지만 코미디가 빠지지 않는다.

일단은 영화 하는 사람으로서 강박관념이 작용하는 것 같다. 영화는 우선 관객들이 재미있게 봐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고, 그래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코미디가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다.

인터뷰한 것을 보면 '쌈마이'라는 말에 상당히 민감한 것 같다.

아니다. 내 입으로 쌈마이라고 하면서 돌아다니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그렇게 물어보는 편인데, 요즘은 그냥 그런가보다 한다.

옛날에는 어땠는데.

충무로에 처음 들어왔을 때 선배들이 영화판이 어떤 것 같냐고 물어보면 막노동판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쪽에 길들여졌는데 변명을 하자면 영화 산업 시스템에 내리는 나름의 결론이 있는 거다. 영화는 어쨌든 돈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자기 만족으로 영화하는 것은 범죄 행위다. 감독으로서 수십 명의 스탭들을 배신하는 거다. 손해를 보지 않고, 벌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만 감독이 되어야 한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카메라 돌아가면 전권을 쥐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쌈마이 이야기를 하다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아, 그러니깐 충무로에서 살아남으려면 어깨에 힘을 빼야 하고, 쌈마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글쓰는 작업은 그래도 개인적이고 독립적일 수 있지 않나.

초반에는 그런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너무 상업적인 발상이라는 생각에 감독과 싸우고 시나리오를 끝내주면 감독이 현장에서 작가 모르게 고친다. 영화 또한 작가의 의도대로 나오지 않고, 상대적인 박탈감도 생기고. 그래서 이왕이면 잘되는 게 낫다는 주의다. 기본적인 마인드는 작가는 감독에게 맞춰주는 거다, 그게 작가의 의무다. 그렇게 생각하니깐 마음이 편해지고, 어느 순간 나는 쌈마이다라고 생각하니까 더 편해지더라. 요즘 <라이터를 켜라>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지는 상황이다. 그 이전 작품을 보면 내부에서는 분위기가 좋은데, 바깥에서는 평이 안 좋았다. <주유소 습격 사건>은 정말 평이 안 좋았다. <신라의 달밤> <선물>은 '웃기려고, 울리려고 만든 상업영화의 거시기'라는 둥 뭐 이런 식이다. 씹는 것이 평론가들의 직업이니까 하고 무시했는데, <라이터를 켜라>에서는 웃음 밑에 뭐가 깔렸다며 의미를 갖다 붙이니까 오히려 어리둥절하다. 사람이 간사해서,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싶어 좋기도 하다.


3. 박정우식 시나리오 작법

쌈마이 정신이 시나리오에 반영되면 늘 김상진 감독과 하는 말이 있다. 어깨에 힘 빼고 우리가 모르는 이야기는 절대 하지 말자. 절대로 어느 한 사람에게 깊이 들어가지 말자. 남들이 봤을 때 공감하는 수준으로만 묘사를 하자. 이 세 가지다. 이것이 쌈마이 정신에 입각한 시나리오 작법이다.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주로 다룬다.

그게 내 각본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우선 인물들을 작은 공간에 여러 명을 들이밀고 섞는 게 쉽게 잘 풀린다. 이 방에(3평 남짓한 공간에서 인터뷰했다) 두 명을 놓고 이야기를 풀라고 해도 자신이 있다. 게으른 탓도 있다. 취재 같은 것을 안 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만 한다. 기본적으로 작가가 아니라 감독하려는 놈이라는 생각 때문인 것 같다. 전업 작가의 의식을 지녔다면 다양한 공간들을 옮겨다녔을 텐데. 너무 고생하지 말자는 게 내 스타일이 되어버렸다.

실제로 공간에 대한 감각은 연출력과 연결된다.

내 시나리오를 받은 감독들은 연출하면서 힘들어하는 것 같다. 공간이 적으면 카메라가 움직이는 것이 뻔하니까. 한번은 아르바이트 삼아 장애인 드라마 특집을 쓴 적이 있다. 뇌성마비 장애인을 취재하면서 깨달은 게 취재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편적인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 사람 이야기를 하더라고. <주유소 습격 사건> 당시 김상진 감독이 한 달 동안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하자고 했는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들 이야기가 아니니까 응하지 않았다. 조직 폭력배의 경우도 내가 살아오면서 알고 있는 정도면 충분하다. 기차도 이번에 처음으로 기관실에 들어갔다. 밤차에 승무원이 4명 정도 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 이상 알 필요는 없다.

박정우의 작품들을 보면 대결 구도가 많고, 도식적이라는 느낌이 많다.

아무 생각 없이 썼는데.(웃음) 계산하면서 쓰는 것은 아니고 라스트에 어떻게 끝내야겠다는 직설적이고 명확한 하나의 목표를 상정한다. <주유소 습격 사건>은 마지막에 관객들로 하여금 주인공들이 안 잡혔으면 좋겠다는 느낌이 들게끔 하는 것이고, <선물>은 웃으면서 눈물이 쏟아지도록 하는 것이고, <라이터를 켜라>는 봉구가 마지막에 라이터를 찾아서 담배를 정말 맛있게 피우는 거다. 목표가 장르도 결정한다. <라이터를 켜라>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코미디가 알맞고, 장소는 빌딩이 될 수도 있지만 달리는 기차 안이 더 어울린다.

작품을 쓰면서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있다.

의도한 것은 아닌데 주인공들의 공통점을 보면 꼭 하나씩은 비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완성되지 않은 인간형이다. 한국 사회의 구조에 대해 깊이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학창 시절에 박힌 생각 중의 하나가 우리나라는 젊은 사람들이 자기가 지닌 재능을 십분 발휘하면서 그것으로 혜택을 받기는 어려운 사회라는 것이다. 그림을 잘 그리거나, 노래를 잘하거나, 운동을 잘하거나 하는 특출한 재능과 상관없이 우선적으로 공부를 잘해야 대접받는 사회다. 좋은 사회 제도 속에서 살면 그림만 잘 그려도 충분히 재능을 발휘하며 사회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주유소 습격 사건>의 인물도 마찬가지다. 페인트, 그림은 잘 그리는데 공부는 못하는 놈. 딴따라, 음악은 잘하는데 공부는 못하는 놈. 감독 데뷔하려는 작품도 비슷한 인물이 주인공이다. 상상력은 무지 뛰어난데 제도가 인정하지 않아 재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약삭빠른 놈들이 아이디어를 훔쳐서 잘 먹고 잘 산다. 결국 그가 분노해도 사람들은 저놈이 괴상한 상상력을 또다시 발휘한다고 생각하는 거다.

개인적인 묘사도 흥미롭지만 인물들의 집단성도 특징이다.

대중 심리를 써먹는 게 재미있다. 영화의 주인공들이 중요하기는 한데, 기본적으로 주인공 둘만 가지고 이야기를 풀기에는 깊이가 부족하다. 그래서 주변인물들로 하여금 주인공을 받쳐주도록 하는 게 내 취향이자 지식 수준에 맞다.

<주유소 습격 사건>을 보면 4명의 인물들이 일종의 무정부주의자나 혁명아 같다. 과격한 해석인가.

늘 시나리오를 쓸 때 스포츠신문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수준에 맞춘다. 나중에 영화를 보고 알아주면 고맙고 몰라줘도 괜찮은 정도의 대립 구도나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를 깔아놓는다.

그런데 김상진 감독의 군중과 장항준 감독의 군중은 좀 다른 것 같다.

어차피 시나리오만 놓고보면 시각은 똑같다. 그런데 감독의 성향에 따라 변주가 된다. 김상진이 세상살이하는 모습과, 장항준의 모습은 다르다. 두 감독의 목표도 다르다. 어떻게 보면 장항준 감독이 김상진 감독보다 더 인간적이고 잔정이 많다. 김상진은 재미의 요소에 역량을 발휘하는 편이고 다른 요소는 철저히 배제한다. 장항준은 한 컷씩 더 인간미를 표현하는 편이다.

개인적으로 어느 쪽이 자신의 의도와 더 맞는 것 같나.

장항준이 맞는 것 같은데 취향은 다르다. 조금 거창한 이야기를 하면 김상진 감독은 부르주아 타입이다. 고생 없이 자라서 세상 보는 게 대단히 낙관적이다. 장항준 감독은 배가 고파본 사람이다. 프롤레타리아 스타일이다. 나는 장항준 감독과 조금 비슷하다. 대신에 장감독은 치열하기보다는 유한 편이고, 김상진 감독은 치열하다. 그건 약간 아이러니지.

박영규씨는 <라이터를 켜라>에서는 정치가지만 <주유소 습격 사건>에서는 자본가였다. 본질적으로 비슷하다.

막말로 두 작품은 다를 게 없다. 그동안 기술적인 게 늘어서 인물 묘사가 그때보다 성공적일 수 있다. 하지만 기본적인 사고 방식이나 의도는 바뀐 게 없다. 그동안 많은 책을 읽은 것도 인생 경험을 한 것도 아니다. 기본적인 사고 방식을 고백하자면 정치인은 나쁜 놈이라는 생각, 왜 그런지 모르겠다. 경찰은 공권력이니까 무기력, 그리고 여자배우는 있으나 마나. 안 그렇게 하려고 해도 늘 그렇게 등장한다. 시나리오 쓰면서 느끼는 건데 머릿속에 갖고 있는 것이 반영되는 것 같다. 다행히 사기를 칠 만큼 능숙한 테크닉을 지닌 것도 아니니까 자라면서 경험한 것이 그대로 나온다. 학교에 대한 나쁜 기억, 경찰들의 무기력한 모습, 정치인들의 좋지 않은 모습, 여자는 개인적으로 영화를 하면서 멀리 해야 한다는 생각이 박혀 있었다.

아니, 왜 영화를 하면서 여자를 멀리하나.

충무로에 처음 들어왔을 때 조감독 형들이 무척 어려웠다. 당시 나는 50만 원을 받고 1년을 일했는데, 조감독 형들은 2,3백만 원으로 살았다. 결혼한 형들은 아내에게 신세를 졌다. 무척 궁색해 보였다. 형들이 너는 감독이 될 때까지 여자를 사귀지 말라고 충고했다. 여자가 생기면 부담감이 생길 것 같아 의도적으로 멀리했다. 작가 생활하면서 본의 아니게 여유가 생겨 결혼을 했지만 기본적으로 청춘 시절을 여자와 담 쌓고 살았다. 그래서 여자라는 존재에 애정이 많이 안 가는 것 같다. 정말 농담으로 이번에는 김상진 감독하고 여자 주인공을 2명 이상 등장시켜 보자고 했는데, 1명 이상 못 만들겠더라. 등장해 봤자 술집여자다. 나가요, 창녀, 싸가지 등. 써놓고 보면 내가 이런 놈인가 싶더라.


4. 그가 본 영화판, 그가 본 세상

얼마나 쑥맥이냐면 은행에서 돈 찾는 법을 대학교 가기 전까지도 몰랐다. 그렇게 대학에 들어갔는데 개강하고 한참 지나고 보니 대학교라고 해서 별 특별한 것도 없었다. 등록금은 비싼데 교수들은 고등학교 수준과 비슷하고. 이것을 위해 몇 년을 미친 듯이 공부했나 싶더라. 애착이 가는 것을 찾다가 영화 동아리를 찾았다. 막연하게 저런 거 하면 재미있겠다 싶었다. 여름 방학 때 단편을 찍다가 돈이 없어서 엎어졌다. 엎어 진 날 술을 진창 마시면서 충무로에 가기로 결심했다. 1학기 마치고 충무로에 간 거다.

<산책>은 완전히 다른 코드의 영화다.

그 작품은 할 말이 많다. 시나리오상으로 가장 흡족해 하는 영화가 <산책>이다. <주유소 습격 사건> 이후 작품들은 상업성이 밝아져 기술자가 되어간다고 생각하면서 쓴 것들이지만 <산책>은 영감을 받아 쓴 작품이다. 어느 날 TV 다큐멘터리를 보았는데 고수부지에서 비둘기 밥을 주는 할머니의 이야기였다. 할머니가 손을 흔드니까 사방에서 비둘기가 날아오더라. 저거 너무 이쁘다. 작가 기질이 발동했다. 설정은 비둘기의 밥을 주는 남자의 이야기. 마침 그때 시집을 봤는데 정호승 시인의 시집이었다. '사랑하다 죽어버려라'라는. 그림 하나, 시집 하나 그리고 동생이 들어보라고 준 멜로를 테마로 한 CD. 이것을 가지고 시나리오 한 편을 10일 만에 썼다. 초고가 무척 좋았다. 그런데 바로 전 주에 <키스할까요>를 탈고했었다. 두 편을 김태균 감독에게 보여주었더니, 개인적으로는 <산책>이 좋은데 상업적으로는 <키스할까요>가 낫다면서 나중에 <산책>을 하자고 했다. 그 사이에 이정국 감독에게 넘어갔다. 그런데 이정국 감독과는 전혀 안 맞았다. 당시만 해도 작가가 감독에게 맞춰주어야 한다는 원칙을 결심하기 전이었다. 이정국 감독이 몇 번이나 말을 했지만 딱 한번 재고를 써다주었다. 결국 이정국 감독이 손떼라더니 <주유소 습격 사건> 촬영 전까지 자신이 시나리오를 고치더라. 그렇게 나온 최종본이 내가 생각한 것과 너무 달라서 현장에서 시나리오를 집어던졌다가 영화사에 끌려간 적이 있다.

끌려갔다고?

그것을 이성재씨가 봤다. 그 회사가 이성재씨를 캐스팅하려고 시나리오를 보여준 건데 그걸 내가 읽었던 거다. 자기는 안 그랬다고 하는데, 들은 이야기로는 쓴 작가도 안 좋아하는 작품에 왜 출연하느냐고 했다고 하더라. 도와주어도 안 될 판에 훼방놓고 다닌다고 해서 해명하느라 혼났다. 그리고 보너스 이야기가 있다. <키스할까요>를 쓰면서 우연히 여자를 만났는데 재미 삼아 읽어보라고 <산책>을 보여주니까 감동했던 것 같다. 지금의 아내다.

시도 아니고 시나리오로... 재주도 좋다.

<주유소 습격 사건>도 한달음에 쓰기는 했지만 <산책>만큼 그렇게 흥이 나서 쓴 적은 없다. 사람들이 물어보면 <산책>이 제일 좋다고 하는데, 주변에서 그러면 안 된다고, 개봉을 앞둔 작품이 제일 좋다라고 말해야 한다고 하더라.(웃음)

그래선가. <라이터를 켜라>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소문이 났다.(웃음)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라이터를 켜라>는 가장 힘들게 쓴 작품이다. <신라의 달밤> 촬영 당시 어머니가 투병하시다가 돌아가셨다. <주유소 습격 사건> 때는 그래도 투병중이시니까 희망을 갖고 썼다.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어머니의 병원비를 대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그런데 <라이터를 켜라>를 쓸 때 돌아가셨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어딘가로 좀 도망가고 싶었다. 시나리오를 쓰려고 호텔에 들어갔는데, 몇 년간 쌓였던 것이 밀려와 몸과 마음이 개판이 된 상태였다. 정말 어렵게 썼다.

초고를 빨리 쓰기로 유명하다.

그래야 먹고살 수 있으니까. 평균 2주 정도다. 2주를 넘기는 거는 못 쓰는 거다라고 생각한다. <신라의 달밤> 이후로는 헝그리 정신이 없어져서 한 달 넘게 걸리는 것 같다. 김상진 감독이 저거 굶겨야 한다고 시비를 건다. 옛날에는 그렇게 빨리 쓰더니... 연출부 시절 베테랑 작가들이 시나리오 쓰는 것을 보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늦게 쓰더라. 하루에 한두 장면 정도 팩스로 넘어오는데 깊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왜 그러나 싶었다. 시나리오 작업 해보니까 하루에 두 시간만 집중해도 2주면 한 편 쓰더라. 좀 산술적이기는 하지만 총 140신이라고 하고 하루에 10신만 써도 2주면 되더라. 그런데 지금은 이해가 간다.(웃음)

어떻게 이해가 가나.

어떻게 이해가 되냐면 하루에 30분도 앉아 있지를 않는다. TV도 봐야 하고, 사람들 만나 뻐꾸기도 날려야 하고, 찍고 있는 영화 잔소리도 해야 하고, 신문, 잡지, 책도 봐야 하고, 인터넷과 게임도 해야 하고. 하루가 어찌나 바쁜지. 몸에 이상이 오니까 운동도 해야 하고. 역시 대한민국 사람에게는 헝그리 정신이 필요하다.

라스트를 마지막에 쓰는 것으로 알고 있다.

왜 김상진 감독하고 마지막에 쓰는 것을 암묵적으로 용인하고 있냐면 현장에서는 분위기 때문에 신을 오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라스트를 남겨두면 시나리오와는 좀 다르게 왔더라도 여태 온 것을 기준으로 삼아 목표를 확실히 전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김상진 감독하고 나와의 작업은 이상적이다.

현장도 알고 있고, 시나리오 썼다. 그런데도 현장에 가고 싶나.

지금은 시나리오 쓰기가 싫다. 현장이 재미있다. 방구석에서 시나리오를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밖에서 뛰어다니는 것이 체질에 맞는다. 김상진 감독도 예전에 시나리오를 썼었다. <마누라 죽이기>. 그런데 지금은 한 글자도 안 쓴다.

연출 데뷔할 비장의 시나리오는 뭔가.

처음 충무로에 왔을 때 떠오른 아이템이 하나 있었다. 그때 일단은 하고 싶은 것을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될 때까지 시나리오 작가로 명성을 키우자로 결심한 후 접었었다. 문제는 몇 년간 묵혀두었다가 보니까 20대의 박정우와 30대의 박정우는 너무 다르더라. 그때는 파릇파릇한 게 있었는데 지금은 기술자의 모습이다. 이게 통할까 싶다. 지금 그 시나리오를 쓰려고 하는데 현재에 알맞게 고치는 게 힘들다.

2주 만에 못 쓰면 안 쓴다고 하지 않았나.

필이 오지 않았다면 벌써 집어치웠겠지. 개인적으로 <라이터를 켜라>가 반가운 현상도 아니다. 이런 분위기면 감독해서 잘해봐야 본전 아닌가. 사람들은 코미디 작가로 알고 있는데, 다른 것 해서 안 되면 전공 놔두고 까불다가 망했다라는 소리도 들을 것 같고. <주유소 습격 사건> 하고 작가 그만두었으면 딱 좋았을 텐데. <선물>을 쓸 때 강우석 감독에게 "이렇게 시나리오 쓰는 게 감독하는 데 도움이 될까요" 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럼 도움이 되지. 그만큼 공력이 쌓이는데." 그래서 열심히 썼는데 얼마 전에는 "저거 입봉할 건데 진이 다 빠져서 기운이 없어. 다 뽑아먹었어." 딱 그러더라고. 농담이지만 많이 빠지긴 빠졌지.

오늘은 시나리오 작가로서 이야기를 나눴지만 다음번에는 감독으로서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다.

솔직히 <라이터를 켜라>에 관련된 글들을 보고 이제 내가 할 일은 다했다는 생각도 했다. 연출이 잘되면 다행이지만 걱정이 앞선다.

*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1994, 장길수 감독)
<마지막 방위>(1997, 김태규 감독)
<키스할까요>(1998, 김태균 감독)
<주유소 습격 사건>(1999, 김상진 감독)
<산책>(2000, 이정국 감독)
<선물>(2001, 오기환 감독)
<신라의 달밤>(2001, 김상진 감독)
<라이터를 켜라>(2002, 장항준 감독)

FILM 2.0 글 : 이상용(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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